어렸을 때 눈이 거의 오지 않는 남쪽지방에 살았다. 눈이 오는가 싶다가도 이내 비로 바뀌거나 내리는 족족 녹아 땅에 쌓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눈사람 한 번 만들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다.
눈발이 날리면 환호성을 지르며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날도 그랬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눈을 입으로 받고 손으로 받고, 그렇게 놀고 있었다. 장갑 낀 손 위에 떨어진 눈 한 송이가 반짝 빛을 내고는 작은 물방울로 변했다. 나는 자리에 멈춰선 채 ‘조금 전에 본 것이,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본 것은 육각형 모양의 아주 작고 얇은 유리판 같은 것이었다. 텔레비전이나 책에서 눈이 그런 모양이라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은 있지만, 현미경도 아닌, 직접 내 눈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누구에게 자랑할 새도 없이 너무 순식간에 사라져 아쉬울 뿐이었다. 놀라움과 신비로움이 온 몸을 관통한 흔치 않은 순간이었다.
그것은 눈 결정이었다. 물질을 이루는 분자들이 모일 때 고유하고 독특한 배열을 갖는다. 원자들 사이의 당기는 힘 때문이다. 분자나 원자들이 모여 일정한 공간적인 배열을 가진 것을 결정이라 부른다. 물 분자의 결정은 육각형 형태를 띤다. 눈 결정이 육각형인 것은 이 때문이다.
중학생이 돼 분자와 결정 구조에 대해 조금 알았을 때, 눈이 내리는 것을 보며 궁금증이 생겼다. 눈도 얼음도 둘 다 물이 언 것인데, 즉 재료는 같은데 왜 얼음은 육각형 모양으로 얼지 않을까. 온도가 낮고 습도가 높은 구름 속에선 수증기들이 서로 천천히 달라붙어 결정 구조가 크게 만들어질 수 있다. 미세한 결정핵을 중심으로 수증기들이 결합해 눈에 보일만큼 큰 결정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얼음은 결정구조가 만들어지기 전에, 액체에서 고체로 상태만 변한 것이다.
사실 눈이라고 해서 모두 육각형의 나뭇가지 모양을 띠는 건 아니다. 눈 결정의 형태는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투박한 육각기둥이나 바늘, 심지어 모래시계 모양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구름 속에서 생성된 결정핵이 땅으로 내려오는 동안 온도와 압력, 습도의 변화를 겪게 되고, 먼지나 오염물질처럼 물 이외의 다른 물질과 섞여 형태가 틀어지는 것이다. 미국 유타대학의 연구 결과를 보면, ‘눈송이’ 하면 떠오르는, 완벽하게 대칭인 육각형 눈 결정은 많아야 1000번 중에 1번 나타난다. 게다가 눈 결정은 사람처럼, 완전히 똑같은 것은 단 한 개도 없다. 아주 까다로운 녀석이다.
작년 이맘 때였다. 하늘에서 육각형 눈송이들이 쏟아지던 그 흔치 않은 순간, 나는 운이 좋게도 길을 걷고 있었다. 낮이었고, 때마침 어두운 색의 겉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옷소매에 눈송이들을 받아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형태가 잘 보이는 상태로 눈송이가 소매에 떨어지는 것도, 그것을 녹기 전에 사진 찍는 것도 쉽지 않았다. 손가락은 얼고 옷도 젖어갔지만 상관없었다.
수십 번의 시도 끝에 결국 맘에 드는 몇 장면을 사진으로 남겼다. 역시 눈 결정의 모양이 ‘완벽’하지는 않았다. 처음 눈송이를 보았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나는 어쩌면 앞으로도 완벽한 형태의 눈송이를 결코 볼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어떤 것이라 해도, 이 세상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형태의 눈송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저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유와 조건이 있다. 나는 눈송이를 마주하며 그저 변함없이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느낄 뿐이다. 이번 겨울에도 그런 순간이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심혜진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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