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판도라

박정우 감독|2016년 개봉

바닷가 ‘핵발전소’ 인근 마을 월촌리에 살고 있는 재혁(김남길)은 식당을 운영하는 홀어머니 석 여사(김영애)와 형수(문정희), 조카와 함께 살고 있다. 형과 아버지를 집어삼킨 발전소가 징글징글한 재혁은 어떻게든 이 시골마을에서 도망칠 궁리를 하지만, 당장 먹고살기 위해 발전소 하청 직원으로 일한다. 재혁뿐 아니라 발전소 인근의 거의 모든 사람이 정규직이든 하청이든, 사무직이든 기술직이든, 모두 발전소에 기대어 먹고산다.

그러던 어느 날 발전소 부근에서 강한 지진이 발생한다. 잦은 고장이 있었지만 제대로 정비하지 못한 채 계속 돌아가고 있던 노후한 핵발전소는 결국, 폭발하고 만다. 정부는 언론을 통제하며 시민들에게 발전소 폭발 사실을 감추고, 제때 대피하지 못한 주민들은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알고 아비규환의 피난길을 떠난다.

결코 꺼질 줄 모르는 핵발전소는 방사능 물질을 마구 뿜어대고, 발전소에 있던 노동자들 종이인형처럼 픽픽, 쓰러진다. 구조대원들도 너무 높은 방사능 수치에 구조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지옥이 있다면 이 모습일까. 인간이 어쩌지 못하는 재난의 상황.

 
노후한 핵발전소의 실태를 비밀리에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가 잘린 발전소 전 소장 평섭(정진영)은 이미 강력한 방사능에 노출된 재혁을 비롯한 발전소 노동자들과 함께 2차 폭발을 막기 위해 방사능 구덩이로 들어간다. 그야말로 죽을 걸 뻔히 알면서도 지옥불로 기어들어가는, 목숨을 내놓은 사투다.

‘판도라’는 핵발전소 폭발이라는 재난을 소재로 한 재난 블록버스터 영화다. 이미 재난영화는 ‘사는 게 지옥 그 자체’인 한국에서 꽤 ‘먹히는’ 장르로 통해왔다. 부패한 무능에서 비롯한 어쩌면 ‘필연’인 재난상황, 시민을 보호하기보다는 사고를 덮기에 급급한 정부기관들, 정작 책임져야할 국가의 부재, 결국은 가장 약자인 평범한 시민 안에서 영웅의 출현.

사실 영화를 보지 않아도 이미 각이 나오는, 빤한 재난영화이지 않을까 해서 볼 마음이 없었다. 그러다 어찌어찌 인연이 닿아 보았는데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재난영화의 익숙한 공식을 따르는 빤한 재난영화인 건 맞다. 아니, 기존의 재난영화들보다 조금 더 촌스럽고, 작정하고 관객들의 눈물 콧물 다 빼는 신파이기까지 하다. 진이 다 빠지게 통곡에 가까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판도라’는 그 촌스러움이, 신파가, 오히려 미덕인 영화다. 최근 경주에서는 수차례 지진이 발생했다. 그곳에는 수명을 다한, 이미 잦은 사고로 여러 차례 경고를 보내온 핵발전소가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한국수력원자력과 정부는 핵발전소의 위험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사실을 덮기에 급급하다.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사고 이후 세계는 탈핵으로 가고 있음에도, 한국은 더 많은 핵발전소를 짓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촌스러운 신파는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명제를 산산이 깨뜨린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라 우리에게 곧 닥칠 현실이다. 그 현실은 영화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아비규환, 아수라장 그 자체일 것이다. 만약 핵발전소 폭발이 매끈한 만듦새의 영화로 만들어졌다면, 그것이 오히려 기만일 것이다.

우리를 재난에서 구할 영웅은 없다. 시스템이 만든 재앙을 개인의 희생으로 극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재혁을 비롯한 발전소 노동자들이 보여주는 희생은 영웅의 구원담이라기보다는 지옥 끝의 불가항력적인 저항일 뿐이다. 시스템을 바꾸지 않고 재난을 피할 도리는 없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것, 극장에서 개봉한다는 것 자체가 다행이다. 영화는 스크린 안에 머물지 않고 스크린 밖의 현실세계를 깨운다. 판도라는 2014년 세월호와 2016년 촛불을 복기하고, 지금 여기에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질문하기에 더 없이 적합한 영화다.

※ 영화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핵발전소보다는 원자력발전소라는 용어가 훨씬 많이 쓰인다. 하지만 일부러 ‘핵발전소’라 표기했다. 원자력발전소라는 표현 자체가 핵발전의 위험성, 핵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감추기 위한 전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