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과 현실 중에서 나는 확실히 현실 쪽에 관심이 많다. 다큐멘터리나 뉴스 프로그램 이외에 가상으로 엮은 드라마나 캐릭터 중심의 예능 프로그램에는 도무지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책도 소설보다는 과학이나 사회현상을 다룬 것을 주로 본다. 판타지물은 지금까지 한 권도 읽지 않았다.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 요리만화책을 즐겨 본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나는 ‘과연 어떤 요리가 어느 시점에 등장할까, 이 요리가 어떤 이야기와 버무려질까’에만 관심을 갖는다. 아무리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져도 내겐 그저 꾸며낸 이야기 중 하나일 뿐이다. 만화는 도무지 현실감이 없다.

이런 내 뒤통수를 친 책이 있다. 몇 년 전, 아베 야로의 ‘심야식당’을 읽었다. ‘심야식당’은 밤 12시에 문을 열고 먹고 싶은 것을 주문하면 그날 들어온 재료로 만들 수 있는 것을 만들어서 대접한다는 것이 영업방침인 기묘한 요리집이다. 한 권에 요리 15가지 정도가 등장해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맛을 더한다. 재미있긴 해도 비현실적이긴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2권 ‘게’ 편을 읽고는 깜짝 놀랐다. 크리스마스이브, 심야식당엔 그동안 오간 단골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저마다 우울한 이야기 한 자락씩 펼쳐놓지만 분위기는 따뜻하다. 그때, 산타가 선물을 들고 등장한다. 그 산타란 바로 조직폭력배인 류씨. 그가 커다란 박스에 킹크랩과 대게를 잔뜩 담아온 것이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먹는 킹크랩이라니…. 이 비현실적인 설정은 바로 내 이야기였다.

딱 10년 전,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아 남자친구와 소래포구에 갔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던 우리 눈에 꽂힌 것은 바로 커다란 킹크랩.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특별한 걸 먹고 싶었던 우리에겐 더 할 바 없는 재료였다. 킹크랩을 사들고 이번엔 마트에 갔다. 큰 게를 넣고 찔 커다란 들통도 하나 샀다. 그리고 싸구려 와인도 한 병. 요리는 남자친구가 자처했다. 물에 와인을 조금 넣고 그냥 푹 찌는 게 전부였다. 잠시 후 상엔 엄청 큰 붉은 게 한 마리가 허연 김을 내뿜으며 앉아 있었다. 가위로 다리를 숭덩숭덩 잘라 구멍에 젓가락을 넣으면 속살이 밀려나왔다. 부드럽고, 달고, 맛있었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상 위엔 게 껍데기만 가득했다. 양손은 온통 게 국물 범벅이었고, 와인 잔도 얼룩덜룩해졌다. 크리스마스의 낭만과 거리가 먼, 너무나 현실적인 풍경에 놓인 두 사람.

그날 이후 우리는 크리스마스 때마다 킹크랩을 먹었다. 만일 소설이라면, 지금의 나는 다른 남자와 결혼해 크리스마스를 보내며 옛날 일을 떠올리지는 않을까? 그래서 어느 크리스마스 날, 혼자 킹크랩을 사러 어시장에 갔다가 역시 혼자 킹크랩을 사러 온 옛 남자친구를 아주 우연히 만나지 않을까? 그 다음은? 역시 드라마를 많이 보지 않아 내 상상은 여기까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소설과 다르다. 지금 나와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남편은, 여전히 킹크랩을 좋아하는, 바로 그 사람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는 식구들이 늘었다는 점이다. 달라진 건 또 있다. 많은 식구가 킹크랩으로 배를 채우려니 돈이 무척 많이 든다. 그래서 이번 크리스마스엔 킹크랩 대신 꽃게를 쪘다. 킹크랩이 꽃게로 쪼그라들었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들과 크리스마스 리추얼(ritual)을 이어갈 수 있음에 감사한다.

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한 해 동안 열심히 살아온 모든 이들이 사랑과 웃음 가득한 연말을 보냈으면 좋겠다. 세상이 하수상해 비현실적인 바람으로 들릴 테지만, 그래도 가끔은 비현실이 현실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 모두 용기 잃지 말고, 해피 뉴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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