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구보의 ‘구술로 보는 인천 민간소극장사’ <11>

▲ 장구보 구보댄스컴퍼니 대표
“1990년대에 정부는 문화정책의 기본 이념을 문화 향유권과 참여권의 신장으로 정하고 국민의 일상생활 속에 문화적 감성을 심고자 했다. 1980년대 전국적인 대규모 문화시설 조성과 지방문화 육성으로 다져놓은 기반을 바탕으로 국민의 생활문화 정책에 중점을 뒀는데, 특히 1990년대는 경제 성장과 국민소득 수준 향상, 가치관의 변화 등으로 국민의 여가 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그 결과 1994년에 건립된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이하 인천예술회관)은 인천시 최초의 대형 공연장으로 연간 30만명의 인천시민이 이용하고 있는 중요한 문화시설로 자리 잡았다. 시민들에게 질 높은 문화예술서비스를 제공하고 지역 문화예술의 창달이라는 목표 아래 수준 높은 합창단ㆍ무용단이 1981년에, 그리고 시립극단이 1990년에 각각 창단하면서 규모와 활동 면에서 시민들의 다양한 문화적 욕구를 수용할 수 있는 예술단체로 성장했다”(김유미, 2012. 재인용)

“…이렇게 시작한 시립극단과 문예회관이 소극장을 폐관으로 몰고 간 장본인 중 하나라는 사실은 어찌 보면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시립극단은 창단 후 몇 회 동안 무료공연을 실시한다. 관객의 저변확대라는 목적에서였고, 한편으로는 시민세금으로 운영되는 극단이 시민에게서 돈을 받는다는 사실이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과 고급인력이 집약된 시립극단의 무료공연은(곧 입장료를 받았지만 타 극단보다는 적은 금액이었다.) 민간 극단과 소극장의 경영난을 심화시켰고, 이런 여파는 소극장들의 잇단 폐관으로 이어졌다. 먼저 경동예술극장이 문을 닫더니 이어 다른 소극장들도 연이어 문을 닫았다. 그리고 돌체소극장 하나만이 남았다. 따지고 보면 소극장 6개가 문을 여는 데 10년이 넘게 걸렸지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데는 채 3년이 걸리지 않은 셈이다”(이재상의 인천 연극의 도약을 꿈꾸며, ‘소금밭’ 3호 17쪽, 2004.)

“그런 원망들이 인천에 많았지요. 시립극단의 초대공연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리고 할인권까지. 지역에 있는 극단들에서 얘기가 많았어요. 왜냐하면, 지하에 있는 100석 짜리 소극장이 (입장료를) 1만원에서 1만 5000원 받았는데, 그때 인천예술회관에선 5000원 하고 그랬어요. 어느 날은 관객 한 분이 항의하더라고요. ‘시설도 좋고 다 좋은 인천예술회관에서도 5000원 하는데, 너희는 무슨 배짱으로 1만 5000원씩 받느냐’고. 그런 얘기가 많았어요”(김병균 ‘가온누리’ 대표 인터뷰 중)

이 시기의 또 다른 특징으로, 한은숙(2005)은 ‘1980년대 중ㆍ후반부터 (서울) 강남의 소극장들이 주로 백화점과 함께 어린이연극을 주로 유치하는 전문공연장을 갖췄고, 이후 이런 경향이 전국적으로 확산돼 소극장들이 어린이연극 공연장의 역할을 주로 했고, 이러한 소극장의 증가가 어린이연극 제작 활성화에 많은 영향을 미친 점’이라고 꼽았다.

또한 한은숙은 ‘1980년대가 정치ㆍ사회적으로 불안하고 경직됐으나, 경제적으로 호황을 누리면서 자연스럽게 2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그 영향의 일부가 어린이연극 양적 성장을 위한 토양을 조성했다’고 보았다. 특히 ‘백화점 쇼핑센터들이 고객유치 일환으로 개설한 소극장들도 어린이연극 환경 조성에 큰 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 1986년 5월 6일 매일경제. 백화점 공연시설 이용이 늘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 당시에 ‘키즈마케팅’ 개념이 호황을 누리면서 ‘아동과 소비’가 문화시장에 확산되는 형상을 가져온다.
“그러다가 2000년에 접어들면서 2001아울렛이 생기고 롯데백화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요. 그들이 전용소극장을 갖기 시작합니다. 당시 모든 2001아울렛에는 소극장이 있었어요. 그러면 상대적으로 영세하고 규모가 작은 우리(=민간 소극장)는 시장에서 밀려나는 거지요. 부모들이 애들을 거기다 맡겨놓고 쇼핑하는 소비문화가 활성화되고, 또 백화점 쪽은 극단에 돈(주당 150만~200만원)을 주고 작품을 사와서 공연하니까, 결국 꿈나무소극장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지요”(김태용 꿈나무어린이소극장 대표 인터뷰 중)

1990년대 이후, 문화센터가 백화점에서 대형마트로 확산되면서 평생교육에 대한 관심과 역할이 대두됐다. 개인 삶의 질을 향상하고 언제 어디서나 개인이 원하는 학습을 받을 수 있게 하는 평생학습을 지향하는 문화센터는 평생교육기관으로서 여가선용, 지역주민의 생활문화 향상, 성인 재교육, 개인소질 개발, 기업홍보와 이익창출, 사회 환원 등의 기능까지 하는 문화소비의 중심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민간 소극장들의 고민은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중구 신포동 르네상스 시대 이후부터 2000년 사이에 상업적으로 흥행한다고 본 어린이 전용소극장이 늘어난다. 이 시기의 소극장은 거의 모두 어린이극장으로 운영됐다고 볼 수 있다.

1989~90년에 생긴 꿈나무어린이소극장이 처음으로 신포동을 벗어나 부평에 문을 열었고, 5~6년 뒤인 1995년에 마루나소극장이 인천예술회관 가까이에 개관했다. 1997년에는 어린이 전용극장인 학동예술회관이 연수구 연수동에 문을 열었다. 그에 앞서 1988년에 인토소극장이 옛 송도에, 같은 해 보물상자소극장이 연수구 선학동에, 동쪽나라연극실험실이 남구 주안동에 개관했다.

이렇듯 이 시기는 대부분의 민간 소극장이 어린이 전용극장을 표방했고, 과거 신포동에 밀집해있던 것과는 달리 점차 여러 지역으로 확산하는 양상을 보였다. 아울러 신길아트홀, 동방아트홀, 에스더소극장도 있었다.

“중구 사동(답동 로터리)에 에스더소극장이라는 게 있었어요. 1년인가 2년 정도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인토소극장은 최종적으로 송도 인천상륙작전기념관 밑에 있었는데 워낙 외지니까 손님들이 없어서 문을 닫은 거지요”(최종욱 극단 한무대 대표 인터뷰 중)

‘이밖에도 4막5장 극장이 있었는데, 1986년에 6개월가량 운영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극단 미추홀이 대관해 작품 3개를 공연했단다. 그 후 기록은 찾을 수 없다. 1987년에는 극단 ‘泰’가 중심이 돼 신포동에 에스더 소극장을 개관했다. 그러나 ‘泰’가 작품 ‘폴리스의 자존심’을 한 번 공연하고 1년도 못가 폐관했다. 1988년에는 신길아트홀이 개관해 극단 예술무대의 주요 무대로 사용됐으나 1988년 1월부터 1992년 7월까지 공연 여섯 번만 올렸을 뿐, 자취를 감췄다‘(남승연의 1980년대 인천 소극장 운동사, ‘드라마연구’ 29호 29쪽, 2008.)

‘인천 연극계가 내년(1989)에 개최될 7회 전국 연극제 예선전을 앞두고 신포아트홀 소속 극단 ‘중앙’의 참가자격 유무를 놓고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 예선전에는 현재 연극협회 인천지부에 등록돼있는 돌체소극장 소속 ‘마임’과 미추홀소극장의 ‘미추홀’과 ‘엘칸토’ 등, 극단 3개의 참가만이 확정된 상태고, 극단 ‘중앙’과 에스더소극장의 ‘泰’의 경우는 협회에 등록돼있지 않다는 이유로 참가자격이 주어지지 않고 있다. ‘泰’의 경우는 최근 창단한 신생 극단이라 그렇다 치고, 창단한 지 5년이나 된 극단 ‘중앙’의 경우 당초에는 협회에 등록돼있었는데 지난해 10월 무렵 협회로부터 제명조치를 당했던 것이다’(인천예총의 ‘인천예술50년사’ 1775쪽, 1992.)

“롯데백화점 근처에 소극장이 있었어요. 동방소극장이라고 나중에는 동아아트홀이라고 바뀌었어요. 꿈나무어린이소극장이 있다가 동방이 생기고 동아아트홀로 바뀌었지. 그래서 어린이 연극교실을 거기서 만들었지. 그 당시 우리는 그런 걸 할 시간이 없었고. 여기는 했어요. 왜 그러냐면 백화점에서 가깝고 그 문화센터에서 어린이 연극교실을 했지. 어린이 연극교실이 그 당시에 여기가 처음이었을 거예요. 그리고 그게 생기고 그 후에 신세계백화점 건너편에 있는 뉴코아에도 소극장이 생겼지”(김태용 대표 인터뷰 중)

※ 장구보 구보댄스컴퍼니 대표의 ‘구술로 보는 인천 민간소극장사’를 격주 간격으로 연재합니다. 이 연재는 지난 2월 ‘구술로 보는 인천 민간소극장사(출판 보고사)’를 바탕으로 장구보 대표가 일부 수정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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