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기획취재] 섬 생태ㆍ문화관광의 현재와 미래 3. 유럽이 사랑한 산토리니(상)

<편집자 주> 인천의 섬은 168개로 섬마다 고유한 자연과 역사,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인천 섬은 수도권과 가까운데도, 인천 앞 바다에 그 아름다운 섬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많다. 이에 인천시는 섬 활성화를 위해 각 섬의 특성을 살린 관광콘텐츠를 발굴하고, 이를 인천 관광의 핵심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구상 중이다. 아울러 관광객의 섬 접근성을 개선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들이 섬에 주목하자, 지역신문발전위원회는 ‘섬 생태ㆍ문화 관광’을 주제로 한 공동기획취재를 기획했고, <인천투데이> 또한 같이 참여해 섬 관광이 활성화돼있는 국내ㆍ외 지역을 취재했다. 이 공동기획취재 보도가 ‘인천 섬 활성화 정책’을 수립하는 데 기여하길 바란다.

‘아틀란티스’의 전설은 여전히 산토리니에

[공동기획취재] 섬 생태ㆍ문화관광의 현재와 미래

1. ‘섬 관광 1번지’ 통영의 고민
2. 유럽 문명의 발원지 크레타
3. 유럽이 사랑한 산토리니(,하)
4. 그리스 정부의 섬 관광 정책
5. 지속가능한 인천 ‘섬 관광’
산토리니(Santorini, 그리스에선 티라 Thira)섬은 그리스 13개주 중 남에게(South Aegean)주 키클라데스현(=키클라데스 제도) 최남단에 있는 둥근모양의 화산 군도다. 면적은 약 73㎢이고, 인구는 약 1만 4000여명이다. 그리스 본토와는 약 200km 정도 떨어져 있고, 그리스 최남단 크레타와 110km 떨어져 있다.

산토리니는 물이 들어찬 칼데라와 화산섬으로 지구 역사에서 거대한 화산으로 손꼽히며, 지금도 에게해 화산대에서 가장 활발한 지대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산토리니의 관광산업은 이 화산지대가 가져다 준 선물이다.

기원전 17세기, 지금으로부터 약 3600년 전 미노아문명(=크레타문명) 절정기에 화산분출이 일어났고, 이 분출로 거대한 칼데라가 생겼으며, 그 주변에 높은 화산재 섬이 생겼다. 이게 오늘날 산토리니 섬이다. 칼데라 깊이는 무려 400미터에 이른다.

당시 화산재는 이집트에서도 그 흔적이 발굴 될 만큼 큰 화산이었다. 이 화산폭발로 거대한 쓰나미가 일어나 산토리니 남쪽 110km에 있는 크레타 섬의 미노아문명이 몰락하는데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저서 ‘크리티아스’와 ‘티아미오스’에서 아틀란티스를 설명하고 있다. 아틀란티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장남으로 이 땅을 최초로 다스렸다는 ‘아틀라스’에서 따온 이름이다. 사람들에게 산토리니는 이 전설의 섬으로 남아있다.

아틀란티스, 이 전설 속 대륙은 지중해 서쪽에서 아름답고 윤택하며, 강한 국가였다. 플라톤이 자기가 살던 시대보다 9500년 전에 존재했다고 기술한 이 나라는, 어느 순간 대지진과 홍수에 의해 하룻밤에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아틀란티스가 현존했을까? 그렇다면 어디였을까? 많은 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했다. 플라톤의 상세한 묘사는 제자들을 들끓게 했고, 아카데메이아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계속됐다.

플라톤 이후 2500년 세월이 흘렀지만 아틀란티스는 여전히 해양학자와 고고학자들을 매혹시키고 있으며, 사람들은 그 대륙이 혹시 그리스의 산토리니 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여전히 품고 있다.

산토리니, 크레타와 교류하며 ‘키클라데스문명’ 발전

▲ 산토리니 피라마을 바닷가 보도에서 이아마을쪽(사진 가운데 하얀 마을)을 바라본 피라마을 일부(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하얀 건축물들)와 칼데라(사진 가운데 바다) 전경.
산토리니에 첫 문명이 등장하기 시작한 때는 기원전 3000년 무렵이다. 산토리니 유적에는 크레타(=미노아문명) 섬 미노아인들이 크레타문명을 전한 흔적이 남아있고, 이는 키클라데스문명으로 발전했다.

그 뒤 미노아 문명은 산토리니섬 화산 폭발 이후 급작스레 몰락했으며, 기원전 1400년 이후 에게해 일대 문명 주도권은 그리스 본토인들의 미케네문명으로 넘어갔다.

두터운 화산재에 덮인 채 남아있는 산토리니의 아크로티리(Akrotiri) 유적만이 당시 번영했던 해양 강국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산토리니 화산폭발로 파묻힌 아크로티리 유적은 종종 ‘에게헤의 폼페이’로 불릴 만큼, 화산폭발 당시 섬 생활 모습을 생경하게 엿볼 수 있다.

산토리니가 아틀란티스와 연관 돼 있음을 주장하는 계기가 된 유적이 바로 아크로티리 유적이다. 지금도 발굴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미노아문명과 교류했던 흔적을 볼 수 있다. 유적에서 발굴된 ‘복싱하는 소년’과 ‘파란 원숭이’ 같이 훌륭한 작품들은 현재 아테네고고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화산폭발로 고생할 때 유럽인들이 사랑하기 시작

▲ 산토리니 ‘아크로티리’ 선사유적박물관. 화산폭발 당시 산토리니 사람들은 다시 돌아 올 것처럼 침대를 포개서 쌓아 두었고, 그릇은 한쪽에 가지런히 모아 놓았다. 
산토리니 군도는 5개 섬으로 돼 있다. ‘산토리니’라 통칭되는 티라 섬을 비롯해 티라시아, 팔레아카메니, 네아카메니, 아스프로니시 등이다. 그 중 면적이 가장 넓고 가장 남쪽에 있는 티라 섬이 산토리니 중심이고 이 티라 섬의 중심이 피라마을이며, 서쪽 끝 최근 낙조로 유명해진 마을이 이아마을이다.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 푸른 지붕과 하얀 벽으로 유명한 산토리니는 전 세계 관광객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1년에 약 200만명, 휴가철인 4~10월에는 하루 약 2만명이 섬을 방문하고 있다. 그러나 산토리니가 이렇게 유명해 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산토리니시는 “화산폭발, 독일 고고학자에 의한 유적지 발굴, 산토리니를 다룬 책, 이 세 가지로 유명해 졌다”고 설명했다.

산토리니가 우선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공교롭게도 산토리니 사람들을 힘들게 한 화산 때문이다. 1866년에 화산이 폭발하면서 주변 섬과 그리스 본토에서 관심을 갖게 됐다.

그 뒤 1867년 독일의 고고학자가 티라유적지를 발굴해 이를 신문에 보도하기 시작했고, 이게 유럽 고고학자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됐고, 다시 정보가 확산되면서 유럽인들이 산토리니에 관심을 갖게 됐다.

1925년에 이 지역 출신 신부에 의해 첫 번째 크루즈여객선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그때부터 유럽인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6년 그리스 작가 일리아 베네지가 산토리니의 역사와 삶을 소재로 쓴 ‘바람’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산토리니는 더욱 유명해졌다.

1956년 산토리니에 다시 화산이 발생해 산토리니의 주요 도심인 피라마을과 이아마을 전체가 붕괴됐다. 현재 시내 모습은 그 후 새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유럽인들이 산토리니를 더욱 사랑하게 된 계기가 이 화산폭발이다.

산토리니는 가난한 섬이다. 그리스 본토나 다른 섬과 달리 화산재로 된 섬이라 농사를 짓는 데 제약이 심해, 아테나 여신이 그리스에 주었다는 선물 ‘올리브’조차 없다. 산토리니는 대신 화산재를 팔아서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다.

섬에서 주로 생산되는 농산물은 포도와 방울토마토, 완두콩이다. 바람이 심해 포도의 경우 자라면서 소쿠리처럼 똬리를 틀게 해 그 안에 열매가 맺히게 할 정도로 힘들게 농사를 짓는다. 또한 바람이 심하다 보니 주로 절벽에 동굴을 파고 움막생활을 했다.

그런데 화산이 폭발하면서 산토리니가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이 유럽 전역에 번지면서 사람들이 도움의 손길을 보내기 시작했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람이 모여들자 숙박시설과 식당이 필요했다. 현재 이아마을과 피라마을 절벽에 있는 값 비싼 호텔과 풀장, 식당 등은 산토리니 원주민들이 살던 집을 자본가들이 매입해 개조한 시설들이다. 산토리니는 그렇게 유명해졌다. 원주민들이 개조했다면 돈을 벌었을 테지만, 그 몫은 재력가들의 몫이고, 원주민들은 주로 농사를 짓는다.

그리스 ‘세월호 참사’를 구조한 산토리니사람들

▲ 산토리니 이아마을. 이아마을 성채(사진 가운데)에서 바라보는 석양도 장관이지만, 석양에 파스텔톤으로 물드는 이아마을의 풍경도 아름답다. 
여객선을 타고 산토리니항에 도착하면 절벽의 하얀 집들과 호텔 아래로 400미터 깊이의 푸른 칼데라가 펼쳐지는데, 그리스해양청은 그 바다위에 대형 원형 띠를 둘러놓았다. 산토리니는 아름다운 풍광만큼이나 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 원형 띠 아래 침몰 여객선이 수장 돼있다.

2007년 4월 크레타섬을 출발해 산토리니로 가던 이탈리아 선적 시다이아몬드5(Sea Diamond5) 크루즈여객선이 에게해를 항해하던 중 암초에 좌초 돼 기관고장을 일으키며 표류하게 된다.

좌초 한 여객선에는 물이 차올랐고, 침몰 직전에 놓였다. 당시 여객선에는 승객 1160여명과 승무원 390여명 등 1550여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산토리니 관광에 부풀었던 승객들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에 빠지고 만다.

조난신고를 받은 그리스해양청은 선장에게 안전을 위해 수심이 낮은 산토리니 뒷편으로 사고선박을 유도했다. 하지만 선장은 이를 무시하고 수심이 400미터에 이르는 산토리니 앞쪽으로 여객선을 운행했고, 산토리니항 코앞에서 침몰했다.

▲ 산토리니항 인근 크루즈 여객선 침몰 지점(사진 오른쪽 아래 둥근 띠). 사진 오른쪽 중간에 멀리 하얗게 보이는 마을이 이아마을이다.  
그리스 정부는 조난신고 직후 구명보트 수십척과 헬기 6대, 군 수송기 2대 등을 현장에 보내 3시간 만에 거의 모든 승객과 승무원을 육상으로 안전하게 대피시켰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인명 피해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리스해양청과 함께 이들을 구한 영웅은 산토리니 주민들이다.

여객선이 산토리니에 다다랐을 때 이미 저녁이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섬에서 자라 수영을 잘하는 산토리니주민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배가 있는 주민들은 배를 끌고 바다로 나아갔다.

그리스해양청은 승객과 승무원 중 한 사람만 실종되고 나머지는 다 구조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사고발생 6일 뒤 실종됐던 사람이 안타깝게 시신으로 발견됐다. 당시 사고선박 선장은 12년 2개월형을 선고받고 아직 복역 중이다.

아직도 사고여객선 시다이아몬드(Sea Diamond5)호는 산토리니 앞바다 수심 400미터에 잠들어 있다. 그리스는 당시 사고의 교훈을 간직하려는 듯, 침몰장소 위를 둥근 원형으로 표시해놓았다. 세월호 참사 때 마찬가지로 진도 어민들과 인근해역을 지나 던 상선들이 세월호로 달려갔다. 그러나 결과는 그리스와 너무도 달랐고, 여전히 구조과정은 의혹으로 남아있다.

※이 공동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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