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한하운 타계 41년 인천에서 그를 재조명하다’ 1) 25년 살았던 인천에서 그의 흔적을 찾다

<편집자 주> ‘문둥병 시인’으로 유명한 한하운은 1975년 2월 28일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 산39번지의 자택에서 간경화로 사망했다. 당시 56세였다. 그가 인천에 정착한 지 25년만이다. 짧은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인천과 부평에서 살았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한센병으로 불운의 삶을 살았던 그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나이 40세인 1959년 음성으로 판명돼 성혜원을 떠나 사회에 복귀했지만, 한센병 환우들을 잊지 않고 부평에 거주하며 죽는 날까지 한센인의 권익을 위한 활동을 계속 했다.

인천시는 올해 ‘인천 가치 재창조’ 선도 사업의 하나로 부평구가 제출한 ‘한하운 재조명 사업’을 선정했다. 사업으로 한하운 시비와 사이버문학관 건립, 한하운 백일장 개최 등, 여러 가지를 구상하고 있다.

<인천투데이>은 한하운의 삶과 문학을 재조명하고 그의 삶과 문학이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고자 기획취재를 준비했다. 한하운 시인이 남긴 흔적을 찾아 그의 고뇌와 인생이 문학예술에 어떻게 투영됐는지 5회에 걸쳐 살펴보고자 한다. 1회는 ‘25년간 살았던 인천에서 그의 흔적을 찾다’이다. 다음호에는 ‘짧게 살았던 수원과 묻혀 있는 김포에서 그의 흔적을 찾다’를 실을 계획이다.

17세에 나병 진단을 받고…

▲ 한하운(왼쪽) 이리농림학교 재학 시절.<사진제공ㆍ한국근대문학관>
한하운의 본명은 ‘태영’이다. 1920년 3월 10일 함경남도 함주군 동천면 쌍봉리에서 한종규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영의 집은 유복했다. 어머니는 함경남도 부호의 외동딸로 17세에 다섯 살이나 어린 아버지와 결혼했다. 아버지 집안은 3대가 과거에 급제한 선비 집안으로 지방 지주였다고 한다.

태영은 7세에 함흥으로 이사해 함흥 제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우등생으로 음악과 미술에 뛰어난 재질을 보였고,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3세에 이리농림학교(현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 수의축산과에 입학했다. 당시 이리농림학교는 식민지 유일의 5년제 국가기관에서 세운 학교였으니 부호와 지주의 자식임이 증명된다.

그러나 17세(1936년) 때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현 서울대병원)에서 나병(한센병) 확정 진단을 받았다. ‘나의 슬픈 반생기(인간사, 1957)’에서 한하운은 ‘진찰이 끝난 뒤에 조용한 방에 나를 불러놓고 마치 재판장이 죄수에게 말하듯이 문둥병이라 하면서 소록도로 가서 치료를 하면 낫는다고 걱정할 것 없다고 하였다. 나는 뇌성벽력 같은 이 선고에 앞이 캄캄하였다’고 기록했다. 태영은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동경의 성혜(成蹊)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1950년에 정착한 나환자촌의 이름이 ‘성계원’이다.

성계의 정확한 한자음은 ‘성혜’이고, 그가 다녔던 고등학교의 이름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측하는 학자가 많다. 성혜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나병의 악화로 귀국해 요양하다가 중국 북경으로 가 22세(1941년) 때 중국 북경대 농학원 축목학계에 입학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최원식(인하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는 2014년 발표한 논문 ‘한하운과 『한하운시초』’에서 ‘북경대 농학원’의 존재에 대해 1898년에 설립된 중국 최고의 국립대학인 ‘북경대’가 아닌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왕징웨이 친일정부가 세운 ‘북경대학’ 농학원이라 추측했다. 진짜 북경대는 일제가 북경을 점령하자 피란길에 올라 1938년 국립서남연합대학이란 이름으로 쿤밍에 자리 잡았다가 해방 후 북경으로 복귀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이뿐만 아니라, ‘3대를 과거에 급제한 선비 집안의 지방 지주’라는 가계와 유학 경력들도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4세(1943년) 때 농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해 함경남도 도청과 장진군청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 급성으로 한센병이 발병해 공직을 그만두고 낙향해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방안에 틀어박혀 병과 싸워가며 문학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본명 대신 필명 ‘하운’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시를 팔아 구걸하던 시인, 첫 시집 ‘한하운시초’ 출간

▲ 한하운의 부평구 십정동 자택 모습 사진.<사진제공ㆍ한국근대문학관>
해방 후 지주 집안으로 몰려 재산을 몰수당하고 동생과 서점을 운영하다 1946년 3월, 함흥학생데모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수감됐다가 풀려난 뒤 29세(1948년) 때 월남했다. 남쪽으로 내려와 곳곳을 떠돌며 밤에는 쓰레기통 옆에서 자고 낮에는 깡통을 든 채 빌어먹는 걸인으로 연명하다 구걸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은 서울 명동으로 왔다.

명동의 문인들이 자주 다니던 다방에서 자신이 쓴 시 ‘파랑새’ ‘비오는 길’ ‘개구리’ 등을 팔았다. 그 인연으로 당대 유명한 시인들을 만났다. 몇몇 시인의 도움으로 1949년 4월 문학잡지 ‘신천지(新天地)’에 ‘전라도길-소록도 가는 길에’를 포함해 시 13편이 실렸다. 시인 이병주의 도움으로 한 달 뒤 ‘한하운시초(정음사. 1949)’를 출간했다. 잡지에 실린 시에 11편의 시를 보탰다.

그가 시인으로 전국에 알려지자, 같은 병을 앓던 환자들이 ‘구걸하지 말고 같이 모여 살자’고 제안했고, 그 제안을 받아들여 1949년 경기도 수원시 세류동 수원천 근처에 나환자 정착촌에서 8개월간 지냈다. 나병 환자들에 대한 차디찬 시선이 가득하던 시절, 정부는 경기도와 강원대 일대에 사는 한센병 환자들을 집단 수용하기 위해 인천 부평에 새로운 나환자 수용소를 만들고자하는 계획으로 한하운과 교섭했다. 한하운은 수원천변에 함께 거주하던 나환자 가족 70여명과 함께 1950년 새 정착지인 ‘부평’으로 옮겼다.

아름다운 곳에는 저절로 길이 생기는 ‘성혜원’

▲ 현재 산 34번지 인광교회 주변 새마을금고 건물이 예전 감금원이 있던 터이고, 경로당 자리가 병원이 있던 부지다. 지금 부평농장 사무소 건물 옆에 있는 자리가 예전 공회당 터다. 지금은 남아있는 건물이 아무 것도 없어 당시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현재 산 34번지 인광교회 주변 새마을금고 건물이 예전 감금원이 있던 터이고, 경로당 자리가 병원이 있던 부지다. 지금 부평농장 사무소 건물 옆에 있는 자리가 예전 공회당 터다. 지금은 남아있는 건물이 아무 것도 없어 당시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한하운은 나환자 정착촌인 ‘성혜원’으로 이주해 1950년 3월 자치회장이 됐다. ‘성혜’는 하운이 다녔던 일본 동경의 고등학교 이름과 같다. 사마천의 ‘사기’에 있는 ‘도리지하 자성계(桃李之下 自成蹊)’의 문구에서 인용했는데 ‘복숭아나 오얏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 아래 길을 이룬다’는 뜻으로 복숭아나 오얏처럼 맛있는 열매가 열리면 자연히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 샛길이 나듯이 덕이 있는 사람의 보람이나 효과가 크다는 뜻이다. ‘아름다운 곳에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고 지름길이 생긴다’는 뜻으로도 해석해 이곳 성혜원을 이상향으로 생각한 것으로 연구자들은 추측한다.

성혜원의 위치는 현재 인천시 남동구 간석3동 산 34번지다. 당시 성혜원에선 나환자 700여명이 공동체 생활을 했다. 현재는 70여 가구 90여명이 여전히 정착촌에서 자치회를 구성해 운영하며 살고 있다. 지난 19일 신분 밝히기를 거부한 자치회 관련자 A씨를 만났다.

A씨는 “당시 성계원(현재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성혜원이 아닌 성계원이라 부른다)에는 감금실과 공회당, 국립부평나병원이 있었다. 감금실은 유랑 환자나 공동체 규율을 위반하는 사람을 가둬두던 곳이고, 공회당은 환자들을 관리하고 주민들이 회의하던 곳이었다. 전화가 있어서 전화를 교환해주던 교환실도 있었다”고 말했다.

“한하운 기리는 사업 원치 않아, 조용히 살고 싶어”

▲ 한하운 사망 소식을 다룬 새빛 잡지.<사진제공ㆍ한국근대문학관>
부평삼거리에서 인천가족공원 입구를 지나 간석사거리로 넘어가는 길 왼쪽편이 예전에 성혜원 자리다. 지금은 부평농장이라 부른다. 현재 산 24번지 인광교회 주변 새마을금고 건물이 예전 감금원이 있던 터이고, 경로당 자리가 병원이 있던 부지다. 지금 부평농장사무소 건물 옆에 있는 자리가 예전 공회당 터다. 지금은 남아있는 건물이 아무 것도 없어 당시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정부 시책으로 1968년 12월에 병원 문을 닫았다. 완치되거나 경증 환자들을 격리시키는 게 인권에 문제가 있다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없앴다고 한다. 음성 환자들은 자활할 수 있게 하고, 중증 환자는 소록도로 보냈다. 지금은 소록도에 다리가 생겼지만 그때는 고덕도에서 배를 타고 들어갔다. 국립부평나병원이 없어지고 나서 이곳에 230여명이 남아 생활했다”

이곳에 남은 사람들은 양계장 운영 등을 하면서 자립하려고 했다. 그러다 이 지역이 1986년 주거지에서 준공업지역으로 변경됐다. 자치회 성원들이 직접 공장에서 일을 하긴 어려워, 그때부터 공장을 운영하게 공간을 빌려주고 월세를 받아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임대료가 다른 곳보다 평당 50% 이상이나 저렴했지만 처음에는 들어오려는 사람이 없었다. 유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현재 5평에서부터 100평 정도의 공장 600여개가 입주해있다. 부평농장 사무소에서 일괄적으로 관리하고 임대차계약 등의 업무를 총괄한다. 지금도 자치회가 잘 운영되고 있다. 대표가 있고 이사들이 있고, 회의 구조로 이사회와 총회 등이 있다.

공장에 입주해있는 사람들이 지금도 꺼려하냐는 질문에, A씨는 “지금은 괜찮다. 초창기 공장 사장들은 괜찮아했지만 사장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 불편해 해서 안 오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자치회에서 주민을 소집해 총회를 해 낮에 가급적으로 외출을 삼가자고 결정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지방자치단체에서 한하운 시인을 기리는 사업들을 하는 것에 대해 A씨는 “우리는 조용히 살고 싶다. 우리가 죽은 후에는 뭘 해도 상관없지만, 지금은 원치 않는다. 2세대인 우리 자식들이 힘들었다. 친구도 없었고 어디 사냐고 물어도 대답을 못했다. 그렇게 평생 살아온 상처가 있다”고 한 뒤 “한하운이 살았던 곳이라고 알려져 사람들이 보러오는 게 싫다”고 했다.

현재 인천에는 한센인 200여명이 살고 있다. 부평농장이 90여명으로 가장 많이 살고 있고, 청천농장이나 재가환자까지 포함한 수가 그 정도라고 한다. 한국한센복지협회에서 두 달에 한 번씩 방문해 한센인을 케어하고 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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