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람] ‘마지막 무관생도들’ 출간한 소설가 이원규

대한제국무관학교, 1895년 4월 초급 무관 양성을 위해 설치한 훈련대가 그해 8월 발생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9월에 폐지됐다. 이듬해 1월에 다시 무관학교가 설립됐지만 한 달 만에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무용지물이 됐다가 1897년 2월 고종이 환궁한 뒤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7월에 대한제국무관학교가 설립됐다. 대한제국무관학교는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 해산되면서 인원이 축소됐고, 1909년 8월엔 폐교되고 생도들은 일본육군중앙유년학교에 편입됐다.

인천 출신 소설가 이원규(70) 선생은 지난달 ‘망국의 역사 위에 내던져진 마지막 무관생도 45인’에 관한 실제 기록을 책으로 펴냈다. ‘마지막 무관생도들’이 그것이다.

이 선생은 인천고등학교와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나와 대건고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동국대와 인하대에서 후학들을 길렀다. 지난 7일, 남동구 논현동 그의 자택 서재에서 만났다. 책과 자료로 둘러싸인 서재는 아늑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무관생도 45명의 이야기

▲ 이원규 소설가
“10년 전 쯤 동국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는데 고대사를 전공한 이기동 사학과 교수가 본인의 역저 ‘비극의 군인들’을 제게 줬습니다. 대한제국시대 나라를 구하고자 무관학교를 다녔던 청년들이 나라를 잃은 후 어떤 인생을 선택했는지가 이 책(=‘마지막 무관생도들’)의 모티브였습니다. ‘조국이 패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독립전쟁에 몸 바치자고 결의했는데 겨우 네 사람만 실천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실망해 가슴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제가 강단에서 소설을 강의할 때 강조했던 등장인물과 작가의 ‘거리 두기’에 제가 쉽지 않았죠”

당시 이 선생은 독립운동가 김산의 평전을 탈고한 직후였다. ‘김산 평전’에 대한 믿음이었는지 이기동 교수는 대한제국시대의 무관생도들을 다룬 자신의 책과 집필노트를 이 선생에게 주고 글쓰기를 권유했지만, ‘거리 두기’에 실패한 이 선생은 한동안 잊고 기다리기로 했다.

또한 인천의 인물 조봉암의 평전을 쓰며 잊어보려 했다. 그러나 ‘지금 안 쓰면 평생 못 쓴다’는 선배 홍신선 교수의 말에 자극받았다. 홍 교수는 문예지 <문학선> 발행인으로 이 계간지에 이 선생이 소설을 연재할 것이라는 광고까지 낸 것이다. 2014년 초부터 10회 연재한 것을 묶어 이번에 단행본으로 발간했다.

“다시 꺼낸 집필노트를 보곤 마음이 눅진하게 녹아있는 자신을 발견했죠. 조국을 배반했던 인물들마저 끌어안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렇게 대한제국의 마지막 무관생도 45명의 묻힌 진실을 밝혀냈다. 이타적 애국은 물론 반민족적 배반까지도 깊이 파고들어가 인간 존재의 내면에 도사린 욕망과 양심을 끄집어냈다.

“그 당시 나라면 어땠을까, 10년간 끊임없이 나한테 질문을 던졌어요. 그러니까 녹아들어가더라고요. 관대해진 거죠”

팩션, 객관적 사실에 문학적 상상력을 불어넣어 만든 예술작품

시인이자 소설가인 김용범 한양대 교수는 이 소설의 추천사에서 ‘그의 팩션(faction)은 독자들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다. 그 힘은 생생한 팩트(fact)와 상상력의 결합에 있다’고 기술했다. 팩션이란 뭘까.

“팩션은 새로 생긴 문학용어입니다.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합성한 신조어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새로운 작품을 창조하는 예술장르죠. 제 소설에는 주석이 260개나 나와요. ‘마지막 무관생도들’은 많은 이야기와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모두 실제 사건과 실제 인물들입니다. 저를 전폭적으로 도와준 학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제가 이용한 자료들의 절반정도가 미공개 자료인데 찾았다고 하더라고요. 전공자들도 자료를 보고 놀랐습니다. 역사하고 문학이 다른 게, 역사는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규명하지만 문학은 그 사실의 얼개를 만들고 벌어진 틈새에 상상력을 넣습니다”

이 선생의 서재에는 다양한 책뿐만 아니라 자료들이 도서명별로 분류돼있었다. 또한 피시(PC)에도 폴더로 세부적으로 분류해 자료를 보관하고 있었다. 성격인지 물으니, 아니란다.

“향토 사학자인 아버님(이훈익)이 언젠가 쓸 일을 생각하며 자료를 꾸준히 모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끈질긴 지구력이 필요하다고 하셨죠. 인천에는 자료가 없으니까 국회도서관을 이용했어요. 자료가 하나하나 쌓이고, 역사 전공자도 모르는 자료를 찾았을 때는 기쁨과 보람도 있지만 사명감도 생깁니다. 근현대사 인물들을 평전으로 쓰다보면 우리나라 국립도서관ㆍ국회도서관ㆍ국가기록원, 일본의 국립도서관ㆍ국립공문서관에 어떤 자료들이 있는지 대략 알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자료를 요청하면 줄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있습니다”

소설 쓰지 않아 생기는 병으로 등단

▲ 1908년 7월 30일 일본 측이 작성한 대한제국무관학교 생도 성적순 명부. 희귀 자료(미공개)로서 책에도 실렸다.
이 선생과 얘기를 나누다보니 작가가 숙명인 것처럼 느꼈다. 어떻게 소설가가 됐는지 궁금해졌다. 1947년 인천의 변두리인 서곶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이 선생은 초등학교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에게 인정받아 학교 대표로 백일장에 나가 입상했어요. 닭과 돼지들이 밥을 달라고 소리소리 질러서 아침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던 시골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썼을 뿐이었는데, 그게 입상했다는 게 오히려 신기했죠”

감성적인 누나들 덕분에 일찍부터 음악의 세계에 빠져든 그는 인천고교 1학년 때 교지에 ‘오페라 해설’을 실을 정도로 음악광이었다. 그런데 3학년 5월에 급성 류머티스열이라는 진단을 받고 장기 결석했다. 누나와 여자 친구의 도움으로 책을 읽으며 병고와 싸움을 벌였다. 그 후 동국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1학년 때 ‘불연속성의 도정’이란 단편소설로 동국대 학술상 문학부분을 수상하며 이름이 알려졌지만, 뜻하지 않게 군에 입대하고 베트남전에도 참가했다. 그때의 기억과 기록으로 훗날 장편 ‘훈장과 굴레’를 썼다.

제대 후 신춘문예나 신인공모 등에 응모해 일곱 번이나 최종심사에 올랐지만 매번 고배를 마시고 펜을 꺾었다. 그 후 7년간 대건고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명(耳鳴)이 심해져 이비인후과에 갔고, 회복의 기미가 없자 정신과를 찾았다.

“소설을 까맣게 잊고 애들만 가르쳤어요.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투표를 하면 1등을 뺏긴 적이 없었죠. 그러다 서른다섯이 됐는데 갑자기 텅 빈 느낌이 들더라고요. 3년간 고3 담임을 했는데도 내가 껍데기 같았죠”

이 선생의 솔직한 고백을 들은 정신과 의사는 ‘다시 소설을 쓸 것’을 처방했다. 그가 다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데는 동국대 국문과 선후배들의 애정과 노력이 있었다. 이미 문단에 명성이 난 작가들이 그와 함께 스터디그룹을 만든 것이다.

그는 1984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고, 2년 뒤인 1986년 2월 <현대문학> 창간 3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에 ‘훈장과 굴레’가 당선됐다. 1988년 11월에는 ‘침묵의 섬’으로 대한민국문학상 소설부분 신인상을 수상했고, 1990년에는 ‘황해’로 박영준 문학상을 받았다.

나이가 들면 감성은 떨어지지만 통찰은 깊어져

▲ 이원규 선생의 서재.
▲ 이원규 선생은 저서별로 관련 자료들을 정리해 서재 한 쪽에 보관하고 있다.
이 선생의 작품들 중에는 우리의 묵직한 근현대사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다. 특히 분단을 다룬 소설이 많다. 그 이유에 대해 이 선생은 ‘소설가 조정래 때문’이라고 했다.

“어느 날 조정래 선배가 ‘넌 해방 후에 태어나 분단 소설은 쓸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1980년대는 분단 소설이 한창 나오던 시절이라 비평가들도 분단 얘기가 아니면 말을 안 하던 시기였죠. 선배가 나를 놀리고 자극을 줬어요. 단편 ‘포구의 황혼’을 읽더니, 장편은 자기의 ‘태백산맥’보다 못하지만 단편은 제 것이 낫대요. 제게 계속 성취동기를 줬죠”

그 후 ‘분단 작가’로 알려지고, 신구문화사 설립자가 찾아와 남북의 좌우익을 가리지 않는 항일운동 소재 대하소설을 요구해, 방송사와 신문사 기자들과 중국과 러시아를 10여 차례 방문한 후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 후 연거푸 ‘약산 김원봉’과 ‘김산 평전’ 그리고 ‘조봉암 평전’을 썼다.

“1940년대 출생해 196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우리들은 분단 문제를 객관적 시선으로 볼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새롭게 공부를 많이 했죠. 제 연배 작가들이 신인작가들과 비교하면 많이 밀린다는 걸 느낍니다. 문체나 감각이 느려지는 것도 있지만 세계관의 차이도 있죠. 독자의 트렌드가 달라지는 것도 있고요. 그러나 나이가 들면 감성은 떨어지지만 인생에 대한 통찰은 깊어집니다. 역사를 얘기할 때도 인생의 지혜가 생겨 흥분하지 않고 목소리를 낼 수 있죠. 그 힘으로 평전을 썼고 이번 작품도 분류하자면 소설이지만 실록과도 같은 것이니 평전 작업의 연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올해 일흔인데 요즘도 일주일에 네 번 테니스를 치면서 체력을 유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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