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답게, 시와 더불어 살고 싶었던 사람 한하운”
“사람답게, 시와 더불어 살고 싶었던 사람 한하운”
  • 김영숙 기자
  • 승인 2016.06.01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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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간] 부평역사박물관 ‘한하운’ 특별기획전

한센병, 나균에 의해 감염되는 만성 감염 질환으로 나병(癩病)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의학적 용어와 상관없이 한센병을 천형(天刑)이라고도 부른다.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아무 법문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 한하운 시인의 벌(罰)이라는 시의 일부다.

한센병에 걸려 1950년 3월 부평에 온 시인 한하운은 1959년 완치라고 할 수 있는 음성 판정을 받고도 1975년 2월 간경화로 죽기 전까지 부평구 십정동에 살았다.

부평역사박물관은 지난 18일부터 ‘살고 싶었던 시인, 한하운’이라는 제목으로 상반기 특별기획전을 하고 있다. 한하운 시인과 나병, 그리고 부평에 관한 이야기가 조용하게 넘쳐난다. 이 전시는 8월 28일까지 부평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열린다.

지난 23일 이 전시를 기획한 김정훈 학예사를 부평박물관에서 만나 얘기를 나눴다.

서울 명동거리에서 시를 팔던 시인, 부평에 정착하다

▲ 전시장 입구에는 ‘영가’가 관객을 맞이한다. 한하운 시인은 힘들었던 슬픈 날을 ‘영혼의 노래’로 승화했다.
한하운 시인의 본명은 한태영이다. 함경남도 함주군 동촌면, 지주의 맏아들로 태어난 한하운의 출생연도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친필 이력서나 여러 가지 기록에는 1919년 출생이라고 적혀있지만, 김정훈 학예사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찾아본 자료에는 1920년으로 기록돼있는 것들도 있었다. 그래서 김 학예사는 이번 특별기획전에선 출생년도에 물음표를 달았다.

“행정자료에는 1919년으로 나와 있긴 해요. 이리농림학교 수의축산과에 다니다 열일곱 살 때 나병 진단을 받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도 일본이나 중국으로 유학을 다녀와서 공무원 생활을 했는데, 급성으로 발병돼 투병생활을 시작합니다”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낙향해 방안에 틀어박혀 병과 싸워가며 문학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본명 대신 필명 ‘하운’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1945년이었다. 그런데 그는 해방의 기쁨보다 지주 집안으로 몰려 가산 일체를 몰수당하고 이듬해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해야 했다. 그는 시국사건에 연루돼 원산형무소에 갇혔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남쪽으로 내려온다. 그 후 곳곳을 떠돌며 걸인으로 연명하다 1947년 서울 명동에 진출한다.

“한하운은 당시 문인들이 자주 다니던 다방에서 자신이 쓴 시를 팝니다. ‘파랑새’ㆍ‘비오는 길’ㆍ‘개구리’ 등을 도화지에 써서 사달라고 하면, 천대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주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걸 계기로 당대 유명한 시인을 만나기도 했고요”

그 인연으로 이병주 시인이 그의 시 26편을 모아 첫 시집인 ‘한하운 시초’(정음사. 1949)를 발행했다. 한하운 시인은 그렇게 등단한다. 그가 시인으로 전국에 알려지자, 같은 병을 앓던 환자들이 ‘구걸하지 말고 같이 모여 살자’고 제안했고, 그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1949년 경기도 수원시 세류동으로 갔다. 그리고 1950년 3월, 현재 부평농장이라 불리는 곳에 정착했다. 그 당시 정부에서는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에 사는 한센병 환자들을 집단으로 수용하는 정책을 만들었고, 그 장소로 부평을 선정했다.

“이번 전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눴습니다. 1부는 ‘사람답게 살고 싶었던 인간, 한하운’입니다. 나병에 걸리기는 했지만 보통의 인간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절규하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2부는 ‘시와 더불어 살고 싶었던 시인, 한하운’입니다. 슬픈 운명에 처했지만 시로 삶을 다시 노래한 문학작품이 전시돼있습니다. 마지막 3부는 ‘새 빛 아래에서 살고 싶었던 위인, 한하운’입니다. 부평에 정착한 이후의 삶을 담았습니다. 음성 판정을 받고 나서도 시 습작은 물론, 잡지나 계몽지에 나병에 대한 잘못된 세상의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죽는 날까지 펜을 놓지 않았습니다. 한센병 환자들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 활동한 사회사업가로서 모습을 부각했습니다”

한하운 시인 타계 41주기, 재조명 사업을 시작하다

▲ 한하운 시인은 1959년 나병 완치 이후에도 부평에 남아 나병 환자의 인권을 위해 집필활동을 했다. ‘나병은 전염병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친필 유고.
한하운 시인의 시신은 경기도 김포 장릉공원묘지에 안장돼있다. 미망인 유씨의 뜻이다. 유씨는 경미한 한센병 환자로 1950년대 부평 나환자촌에 한하운과 함께 거주했다. 그 후 십정동에서 같이 살다가 시인이 사망하자, 부천으로 이사했다고 전해진다. 김포 묘지를 날마다 찾을 정도로 정이 각별했다고 한다.

인천문화재단은 2010년에 한하운을 인천문화예술 대표인물로 선정해 시 낭독 콘서트와 특별전을 열었고, 타계 35주기인 그해 ‘한하운 전집’(2010. 문학과 지성사)을 발간했다.

인천시는 올해 ‘인천 가치 재창조’ 선도 사업으로 13건을 선정했다. 그 중 하나가 부평역사박물관이 돕고 부평구가 제출한 ‘한하운 재조명 사업’이다.

“공교롭게도 특별기획전을 시작한 지난 18일에 선도 사업 최종 발표가 있었어요. 그리고 전날인 17일은 국립소록도병원이 개원 100주년을 맞아 기념식을 한 날이기도 했고요. 사실 이번 전시는 이런 것과 무관하게 지난 2월 기획했습니다. 지역 원로들이 ‘한하운의 역사가 많은 부평구에 콘텐츠가 빈약한 것이 안타깝다’고 여러 번 표현했거든요. 교과서에도 실린 한하운의 시를 보며 우리 지역 청소년들이 한하운의 역사를 알면 애향심 제고 차원에도 영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원로들의 말씀에 전시를 기획했습니다”

올해는 한하운 시인이 타계한 지 41년이 되는 해다. 김정훈 학예사는 이번 전시를 41주기에 맞춰 하는 건 아니라고 강조했다.

부평역사박물관은 매해 1~2회씩 동별로 학술조사를 실시한다. 한하운과 연고가 있는 십정동은 내년에 조사할 예정이었다.

“충분한 조사가 이뤄지진 못했지만 구청장과 지역 원로들의 뜻을 받아 문화콘텐츠를 확장하자는 취지로 이번 전시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전시를 계기로 ‘인천 가치 재창조’ 선도 사업과 연계할 예정입니다. 선도 사업으로 한하운 시비와 사이버문학관 건립, 한하운 백일장 개최 등, 여러 가지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인천시의 지원은 2년간인데, 부평구에서는 계속 진행할 고민도 하고 있습니다. 전시 준비가 부족해 아쉬운 점이 많지만, 선도 사업으로 시인이 어떻게 부평에 정착해 나환자촌을 운영했는지 등을 연구하고 한하운 시인과 인연이 있는 많은 사람을 인터뷰할 계획입니다”

성계원, 아름다운 곳은 자연스레 모여들고 지름길이 생긴다

▲ 김정훈 학예사.
한하운 시인은 부평으로 오기 전에 경기도 수원시 세류동에 있는 수원천이라는 하천 인근의 나환자촌에 8개월간 살았다.

“지난 2011년 세류동 주민자치센터에서 수원천변에 한하운 시비와 안내판을 세웠어요. 시인이 8개월간 살았던 역사를 기리자는 취지죠. 그런데 부평에는 25년 살았지만 아무 기록물이 없어요. 주민들이 꺼리고 지역사회에서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죠. 한하운 시인은 1952년에 신명보육원을 설립한 사람인데도 보육원 쪽에서 이를 알리는 걸 원치 않습니다. 시비와 사이버문학관이 만들어진다면, 한센병에 대한 선입견이 많이 없어질 겁니다”

한하운 시인은 1949년 12월 30일, 나환자 70여명과 함께 만월산 계곡에 터를 잡았다. 시설 이름을 ‘성계원(成蹊院)’으로 짓고 자치위원장이 됐다. ‘성계’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있는 문구에서 인용했다.

“보통은 이런 시설의 이름에 애(愛)자를 많이 넣잖아요. 그런데 한하운 시인은 ‘도리지하 자성계(桃李之下 自成蹊)’라는 글귀에서 ‘성계’를 따왔어요. ‘복숭아와 오얏꽃 아래에서는 저절로 지름길이 생긴다’라는 뜻인데, ‘아름다운 곳에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고 지름길이 생긴다’는 뜻으로도 해석하죠. 이곳을 이상향으로 생각하신 게 아닌가, 추측합니다”

계(蹊)는 ‘혜’로도 읽혀, ‘성혜원’으로 기록된 자료도 많다. 또한 이곳에서 자립을 위해 양계장을 운영한 것과 연동해 닭 계(鷄)와 혼동하기도 한다.

김정훈 학예사는 3부가 전시된 곳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1959년 시인이 한센병 완치 판정을 받은 이후에도 부평을 떠나지 않고 나환자들의 복지와 자활을 위해 글을 쓰고 사회사업을 했던 흔적이 전시돼있었다. 육영수 전 영부인이 시인에게 보낸 격려 편지 원본도 있었다.

또한 전국에 있는 나환자 정착 농장에 대한 자료가 있었고, 1971년 기준으로 인천에 있는 나환자촌에 대한 자료도 있었다. 당시 인천에는 부평ㆍ십정ㆍ청천ㆍ간석 등, 집단 나환자촌이 네 곳 있었다. 만월산 아래의 부평은 치료시설이었고, 나머지 세 곳은 완치 이후 사회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이 집단을 이뤄 살았던 곳이다. 이들은 나병을 극복해 사회복귀를 법적으로 허락받았지만, 나병에 대한 사회인식이 좋지 않아서 사회로 복귀하지 못했다. 그래서 시인은 신문이나 잡지에 나병과 관련한 글을 많이 기고했다. 나환자들의 인권과 자활 문제 등을 다룬 친필 유고들이 남아있다.

“전시를 한 지 일주일이 안 돼, 사람들의 반응은 잘 모르겠어요. 시인이 나환자로서 삶을 어떻게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켰는지를 알 수 있는 ‘파랑새’와 ‘보리피리’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습니다. 학교와 연계에 단체관람을 유도할 계획입니다. ‘나의 슬픔 반생기’라는 시인의 자서전에도 드러나 있지만, 사람답게 살고 싶었고 시와 더불어 살고 싶었던 시인이 완치 이후에도 부평을 떠나지 않고 같은 병을 앓는 사람들과 같이 살았던 그 마음을 배워야합니다. 부평구의 슬로건이 ‘참여+나눔, 더불어 사는 따뜻한 부평’입니다. 40년 전에 이런 삶을 산 시인의 마음을 전시회에 오셔서 느끼면, 지역에 더 많은 애착심이 생기지 않을까요? 많은 사람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