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현 ‘굿모닝 인천’ 편집장, (사)인천사람과문화 1월 ‘인천마당’서 강연

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이사장 신현수)는 기존 ‘인문학콘서트’와 ‘숲포럼’을 합쳐 올해부턴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 오후 8시에 ‘인천마당’을 열기로 했다.

그 첫 시작을 지난 27일 저녁 부평아트센터 세미나실에서 유동현 월간 ‘굿모닝 인천’ 편집장의 강연 ‘골목, 살아지다’로 진행했다. 유 편집장은 2013년에 ‘골목, 살아(사라)지다’라는 제목으로 책을 내기도 했다. 그는 이 책에서 ‘거창한 건축물이나 유서 깊은 관광지에만 역사와 이야깃거리가 있는 건 아니다. 오래된 골목은 저장된 기억의 창고이다. 우리가 살아 온 역사이며 문화, 문화재이다’라고 했다.

유 편집장은 이날 강연에서는 중구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 일대와 부평구 십정동 일대의 옛 이야기를 들려줬다.

인천과 백범 김구의 인연

▲ 유동현 굿모닝 인천 편집장.
“자유공원이 있는 중구 송학동 응봉산 기슭에는 김구 선생의 흔적이 많다. 1883년 개항 이후 응봉산 중턱에 감리서를 세웠다. 감리서에는 법원 기능의 법조기관과 감옥도 있었는데 그 감옥 건물은 우리나라 최초로 유리가 끼워진 한옥 건물이었다. 그곳에 백범이 두 번이나 갇혔다”

감리서(監理署)란 조선 말기 개항장(開港場)ㆍ개시장(開市場)의 행정과 대외관계의 사무를 관장하던 관서를 말한다.

백범은 일명 ‘치하포 사건’으로 해주 감옥에서 인천 감리서로 이감된다. ‘치하포 사건’이란 1896년 일본군 장교를 살해한 사건으로, 백범일지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복수로 일본인 군관을 죽인 것’이라고 기록됐다. 백범은 이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탈옥했다.

그러나 1911년 ‘105인 사건’으로 다시 인천 감리서에 투옥됐다. ‘105인 사건’이란 일본 총독부가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의 암살미수사건을 조작해 독립운동가 105인을 감옥에 가둔 사건이다.

“아들 옥바라지를 위해 백범 모친인 곽낙원 여사가 동인천 경인면옥 근처 객주집에서 식모살이를 했다. 인천대공원 백범광장에는 김구와 곽낙원 여사의 동상이 있다. 백범일지에 ‘나에게 인천은 아주 특별한 곳이다’라고 적혀있다”

김구의 본명은 김창수다. 유 편집장은 “의혈청년이었던 김창수를 체계적인 독립운동가로 만들어준 곳이 인천”이라고 말한 뒤 “재판을 참관한 인천시민들이 그를 보며 ‘보통 청년’이 아님을 알고 감옥에 책을 넣어줘 독립정신을 키웠다”고 했다.

감리서가 있던 자리에 인천지방법원이 들어섰고, 지방법원이 석바위로 옮기면서 그 터를 (주)한진이 인수해 법원을 없애고 아파트를 지었다. 아파트 근처에는 감리서 터였다는 비석이 남아있다.

“해방 후 백범이 지방순회를 했는데 첫 번째로 온 도시가 인천이다. 중구 내동에 있는 내리교회에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백범을 죽인 안두희가 죽은 곳이 중구 신흥동의 한 아파트다. 백범을 죽이고 쫓겨 다녔던 그는 마지막으로 백범과 관계가 있는 인천에서 죽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자유공원과 홍진 선생

▲ 응봉산 중간 위에 위치한 기와 건물이 인천감리서다.
응봉산 정상에 있는 지금의 자유공원은 1988년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공원이다. 세워질 당시는 ‘만국공원’이라 불렸고, 일제강점기에는 ‘서공원’, 해방 후 다시 ‘만국공원’으로 불리다 1957년 지금의 ‘자유공원’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1919년 3.1운동이 있고 나서 4월 2일에 전국 13도 대표가 이곳 자유공원에 모여 한성임시정부 수립 선포식을 했다. 이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 인천은 일본인이 득실대던 곳이었는데, 일본인들 앞에서 한성임시정부 수립 선포식을 한 것이다. 이왕 할 거면 적들의 심장부에서 하자는 결기였다. 그리고 한성임시정부의 중심에 홍진 선생이 있었다”

유 편집장은 “러시아 영토인 블라디보스톡에 세운 노령임시정부와 한성임시정부가 모태가 돼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됐고, 홍진 선생은 상해임시정부에서 지금의 국회의장과 같은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고 했다.

홍진 선생은 해방된 이듬해 사망했다. 당시 명동성당에서 영결식을 했을 때 이승만ㆍ김구ㆍ조소앙 등, 좌우익 세력이 함께 추도했다. 선생의 운구는 홍씨 문중이 있는 인천 남구 관교동에 묻혔고, 관교동이 개발되면서 국립 현충원으로 이장됐다.

“우리는 기억해야한다. 교육청이나 시청 공무원들을 상대로 강연할 때 이 얘기를 강조했다. ‘자유공원에 맥아더 동상만 있어서는 안 된다. 한성임시정부 선포 기념비를 세워야한다’고 강조했지만, 3년간 얘기해도 움직임이 없다. 나는 백범이 있기 전에 홍진 선생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하운과 십정동 일대

▲ 인천의 대표 달동네인 십정동 일대의 모습. 동암 신동아아파트단지도 보인다.
인천의 대표적인 달동네를 꼽는다면, 많은 이가 십정동을 얘기한다. 1960년대 도시에서 밀려난 빈민들과 수출 공단이 들어서면서 노동자들이 모이고부터 동네가 형성됐다.

“저녁에 십정동을 찍은 사진이 있다. 불빛이 골목의 외등 말고는 별로 없었다. 노인들이 불을 안 켰거나 비어있는 집이 많다. 한하운 시인은 십정동과 관계있다. 예전에 한센병자들은 부평공동묘지, 현재 인천가족공원 위쪽에 모여 살았다. 경제적 자립을 위해 양계장을 만들어 닭을 키우고 달걀을 팔았다. 한하운은 1949년 12월 30일 한센병자 60여명과 이곳으로 들어왔다. 당시는 묘지만 있고 아무도 가지 않던 북망산이었다. 사람들 눈을 피해 이곳으로 와 땅을 파서 움집을 짓고 살았다”

양계장이 있던 이곳을 부평농장이라고 불렀다. 한센병 음성 판정을 받은 이들은 경인농장(경인전철 동암역 근처)과 청천농장(인천나비공원 부근)에 정착했는데, 그때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오지였다. 특히 경인농장에서 생산한 달걀이 인천 생산량의 90%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한하운은 1959년 음성 판정을 받고 사회로 복귀해 십정동 자택에 살다가 1975년 2월 28일 간경화로 사망했다.

“나환자들인 부모들로부터 아이들을 격리시키기 위해 신명보육원을 만들었다. 철조망 사이로 부모와 자식이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 한하운 선생이 신명보육원 초대 원장이다. 아이들이 취학할 나이가 돼 동암초등학교에 가려는데 학부모와 교사들이 막았다는 기록도 있다. 나환자들은 근거 없는 말들과 사회적 편견으로 고통을 받았다”

유 편집장은 자신의 경험을 들려줬다. 초등학교 시절, 만월산(약사사와 약산공원이 있어 약산으로 널리 알려짐)으로 소풍을 갔는데 ‘부평농장에 사는 나환자들이 아이들을 잡아먹으니 절대 산을 넘지 말라’는 교사들이 신신당부에도, 유 편집장을 포함한 사내아이 몇 명이 호기심에 산을 넘다가 흰 저고리에 갓을 쓴 남자를 보고 혼비백산해 산을 굴러 내려왔다는 것이다.

“한하운 선생은 나환자를 위로하고자 시낭송회를 하기도 했고, 문우인 박목월 선생이 부평농장에서 시낭송을 하러 오기도 했다. 인천지역에서 한하운 문학상이나 백일장 등을 만들어 이 역사를 기억해야한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