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없이 달려온 한해를 정리하는 연말이다. 올해 <인천투데이>은 부평 현대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미군기지촌 관련 기획취재를 했다. 미군이 한국에 주둔한 지 어느 덧 70년이다. 부평엔 한때 한국에서 가장 큰 기지촌이 형성됐다. 하지만 기지촌에 관한 연구 등은 매우 부족한 상황이다.
올해 초 한 통의 전자메일을 받았다. 2013년에 저술한 책 ‘캠프마켓’이 계기가 됐다. 부평에서 태어난 혼혈입양인이 이 책을 보고 ‘엄마를 찾고 싶다’며 사연을 전했다.
그녀는 1957년에 태어난 ‘김 캣티 크라운’씨다. 1959년 11월 고아원으로 보내졌고, 1961년 1월 미국의 한 가정으로 입양됐다. 그녀는 지금도 애타게 엄마를 찾고 있다. 이 인연으로 미국과 한국에서 입양혼혈인들을 지원하는 여러 자원활동가를 만났다. 특히 9월 26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한국인과 캠프타운 2015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미국계 아시아인이란 뜻의 아메라시안(Amerasian) 200여명이 참여했다.
국가가 나서서 성(性) 상품화
한국은 한때 가난하다는 이유로 국가가 나서서 기지촌의 성(性) 상업화를 조장했다. 한국의 성 상업화는 일제강점기에 본격화됐다. 일제강점기에 설치된 성매매 업소(=유곽)는 일본 패망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확대됐다.
해방 이후 미군이 주둔한 부평엔 성매매 집결지가 형성됐다. 미군 4000여명이 주둔한 기지 앞 신촌(=부평3동)에는 성매매 여성 1000여명이 정착했다. 이 여성들은 미군에게 몸을 판 대가로 옷ㆍ담배ㆍ술ㆍ부식 등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많은 혼혈인이 태어났다.
입양특례법 개정 시급
박정희 정권은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하려하자, 기지촌 정화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한국 정부는 미군의 성병 예방을 위해 행정력을 동원했다. 강제적인 성병 검진과 치료로 기지촌 여성들이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했다. 이를 입증할 만한 자료는 많다. 심지어 혼혈아동을 모집하는 광고가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국외로 입양된 아동은 20만명을 넘는다. 입양 혼혈인은 4만명을 넘는다. 이들이 언어와 문화가 다른 타국에서 겪을 혼란과 고통을 한국은 외면했다.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게다가 한동안 감소했던 해외 입양아가 지난해 다시 늘었다. 2006년 1800여명이던 해외 입양아는 2013년 230여명으로 줄었다가 지난해 530여명으로 늘었다.
정부와 정치권이 출산을 장려하면서 해외입양을 수수방관하는 건 이율배반적이다. 국내 입양의 걸림돌이 되는 ‘입양특례법’ 개정이 시급하다.
타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성장한 입양인이 가족 찾기에 나선 사연을 언론에서 종종 접한다. 하지만 이 가족 찾기를 정부나 입양기관들이 적극적으로 돕지 않고 있다.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지원도 고민해야 한다. 가족 찾기에 나선 입양인들은 소통의 문제 등,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가난했던 나라가 품지 못했던 그들이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캠프마켓 반환 맞춰 다양한 접근 필요
부평구와 인천시는 2016년 이후 반환될 부평미군기지 토지 활용방안을 다양하게 모색하고 있다.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고려한 활용방안을 수립하고 있다.
여기서 빼놓지 말아야할 부분이 있는데, 바로 기지촌 문화다. 평화도시를 지향하는 파주는 미군이 떠난 기지에 입양혼혈인 등을 위한 동산 조성을 추진 중이다. 분단과 전쟁의 피해자인 해외 입양 혼혈인들에게 고향을 찾아주는 프로젝트로 ‘어머니의 품(Mother′s Army)’이란 동산을 조성하고, 그곳에 상징적으로 ‘어머니 동상’도 건립할 계획이다. 파주시는 당초 이 부지에 대학을 유치할 계획이었는데, 발상을 전환한 것이다.
부평미군기지에 친일역사박물관과 죽산 조봉암 동상 등을 건립하자는 제안도 나온다. 모두 유의미하다. 그런데 이곳에 기지촌의 역사와 거기서 잉태된 아픔의 역사를 함께 기록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 기자명 한만송 기자
- 입력 2015.12.07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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