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노동운동의 메카, 인천의 노동자 교육을 혁신하다 7
평등사회노동교육원의 학습소모임 확대재생산 실험

<편집자 주> 대한민국의 노동자 1500만명과 그들의 가족을 단순합산하면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 이상이 노동자와 직ㆍ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노동조건과 노동자의 삶의 질이 대다수 국민에게 끼치는 영향은 실로 크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전국적으로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면서 노동조건 향상이 경제의 선순환으로 내수경제 활성화에 기여했다. 노조 설립과 운영의 동력은 다양한 형태의 학습 소모임을 기본으로 하는 노동자 교육이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시대 이후 노동운동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고, 이와 함께 노동자의 삶은 황폐화되고 있다. 노조 활동의 위축과 노동교육의 부재로 인해 경제의 선순환 고리가 끊긴지 오래됐으며, 비정규직 양산과 실업률 상승으로 전체 세대가 고통 받고 있다.

<인천투데이>은 ‘노동자교육기관’과 함께 현 노동자 교육을 진단하고 21세기에 맞는 노동자 교육의 대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이번 호에선 평등사회노동교육원의 노동자 교육 사례를 취재했다.

노동운동의 도약을 위하여

[기획취재] 노동운동의 메카, 인천의 노동자 교육을 혁신하다

1. 인천지역 노동자 조직 현황
2. 인천지역 노동자 교육의 현주소
3.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의 교육사업 현황과 전망
4.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충북지역본부의 교육사업 모범사례
5.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부산지역일반노동조합 교육사업
6. 민주노총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한국지엠지부 교육위원회
7. 평등사회노동교육원의 학습소모임 확대재생산 실험
‘1987년 이후 노동운동을 뒷받침해온 동력이 멈추어버린 지금, 노동운동은 중대한 위기를 맞고 있다. 20년 동안 우리 노동운동은 후배세대 활동가집단을 양성하지 않은 채 1세대 활동가집단의 역량을 고갈시키면서 지속됐다. 노동운동의 새로운 전진을 위해 다시 힘을 모아야한다. 허물어진 1987년 노동체제를 딛고 일어서서 자주적, 민주적, 변혁적 노동운동의 정신을 살려야한다. 우리는 이 일이 노동자교육운동의 대대적인 활성화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설립 제안서 내용의 일부다. 박장현 평등사회노동교육원(이하 교육원) 원장을 지난 23일 서울 은평구 불광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교육원에서 시도하고 있는 실험의 과정과 고민을 들어봤다.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자는 생각이다. 특히 정규직, 대기업 노동조합 간부가 아닌 여성이나 비정규직 노동자 등, 새로운 노동자집단을 대변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려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법론이 필요하다”

이런 고민을 함께한 사람들이 2009년 12월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 위원장이자 국회의원을 지낸 단병호 교육원 이사장이 제안한 ‘노동교육기관 설립’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2010년 3월, 제안자모임 대표로 단 이사장을 뽑았다. 제안자 100여명은 100만원 이상씩을 기금으로 내놓았다. 제안자모임에서는 지역ㆍ업종ㆍ단체와 간담회를 하면서 전국적으로 발기인을 모집해 초기자금을 마련했다. 준비위원회로 전환해 활동하면서는 ‘활동가 기초과정’ 프로그램과 교재 개발을 마치고 시험적으로 충남ㆍ창원ㆍ울산에서 교육을 진행해보기도 했다. 반응이 좋았다. 제안자 208명, 발기인 329명, 회원 240여명으로 마침내 2011년 6월 교육원을 창립했다.

노동자들을 ‘교육의 대상’이 아닌 ‘학습의 주체로’

▲ 박장현 원장.
“지금까지의 노동교육을 성찰하고 점검하고 반성하면서 새로운 방법을 시도할 수 있었다. 노조에서 하는 교육에는 한계가 많다. 활동가를 양성한다는 계획보다는 주로 실무적인 교육을 한다. 노동자들에게 투쟁방침을 주입하고 갖가지 행사에 동원할 대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노동자를 주체로 세우고 성장하게 하는 건 약하다”

박 원장은 지금까지의 교육이 ‘훌륭하고 유식한 선생’이 ‘무식한 노동자’를 가르치는 식이였다면, 교육원에서 하려는 교육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학습모임을 만들고 세포분열식으로 확장해 활동가집단을 재생산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세포분열식이라는 게 뭘까.

“노동교육이 ‘도구주의’에 빠졌다. 교육을 선전과 구분하지 못하고 단기 성과에만 매몰돼 ‘당면 사업을 돌파하기 위한 도구’로만 생각했다. 교육도 유명 강사들에게만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 교육으로 활동가집단을 양성했던 과거의 재생산 통로가 막혔다”

이것이 교육원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었으며 노동운동의 미래를 짊어질 활동가집단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방법론을 개발하는 데 주력했다. 노동자들을 ‘교육의 대상’이 아닌 ‘학습의 주체’로 세워내는 것이 그 방법이며, 이 과정으로 ‘주체’들이 세포분열을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첫째, 노동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 수 있는 토론과 실천을 겸비한 학습 프로그램이 있어야하고 둘째, 학습모임을 조직하고 운영할 수 있는 노동자 안내강사가 있어야한다. 교육원에서 프로그램과 교재ㆍ교안을 제공하고 노동자 안내강사를 양성하지만, 교육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는다”

10~15명의 소단위 교육에는 안내강사와 보조강사가 있다. ‘활동가 기초과정’은 노동자와 노조, 한국사회 현실, 한국 노동운동사 등, 기초적인 지식과 시각 교정의 내용을 총12강으로 3개월간 운영한다. 일반 노동교육에 매번 다른 강사를 배치하는 것과 다르게 총12강을 노동자 안내강사 한 명이 맡는다.

안내강사는 현장에서 함께 활동한 노동자이기에 수강생들이 ‘유식하고 잘난’ 강사에게 느끼는 괴리감이 있을 리 없고, 밀도 높은 소통으로 학습참가자들은 자신도 안내강사를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도 있다. 모임별로 안내강사와 함께 반드시 보조강사를 둔다. 보조강사는 일정기간 훈련을 거쳐 안내강사로서 독립적으로 학습모임을 진행하게 된다. 이것이 세포분열이며 노동자가 주체로 나서는 교육 방법이다.

스스로 학습하는 노동자로 성장하기까지

▲ 박장현 원장은 노동자 안내강사와 보조강사가 학습의 주체로 거듭 세포분열을 일으킬 때 노동운동의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활동가 기초과정을 마친 노동자 중 자발적으로 중급과정을 신청하는 노동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3개월 과정의 기초과정도 쉽지 않으련만, 중급과정은 6개월에서 8개월 코스다.

“중급과정은 본인의 자발성이 없으면 진도를 따라가기 힘들다. 학습 내용은 노동운동을 한다는 사람이면 알아야할 정치ㆍ경제 정세, 대안사회, 노동조합운동, 정치세력화운동 등 크게 네 가지로 구분했다. 모든 학습은 동영상을 보고, 교재 본문을 읽고 실습이나 실천을 한 후 안내강사의 설명을 듣는 식으로 진행하며 2시간 정도 걸린다. 다른 교육의 경우 교재는 준비하지만 사용하는 경우가 흔치 않은데 우리 교육은 한 회에 30쪽 정도 분량의 교재를 모두 읽고 토론하게 구성했다”

기초와 중급과정은 있지만 상급과정은 없냐고 물었더니, 박 원장은 “기초가 뿌리라면 중급은 줄기다. 줄기에 가지가 달리는 건 주제별 학습이다. 가령, 환경문제ㆍ협동조합ㆍ사회적경제 등인데 안내강사로는 한계가 있고 외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운영한다”고 했다.

또한 박 원장은 “기초과정은 공부에 관심 없지만 옆에서 가자고 해서 오는 사람도 할 수 있는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 노동자의식으로 시각을 교정하는 과정이라면, 중급과정은 체계적인 인식을 갖춰나가는 과정이다. 노동자들이 교육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은 잔업특근을 해서 부족한 임금을 채우려는 것만큼 일주일에 몇 시간씩이라도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의지를 내는 것 아닐까? 이 정도면 특별한 프로그램도 필요 없이 책을 읽고 모여서 토론할 수 있다. 그런 능력과 의지를 만들어주는 게 교육이다”라고 강조했다.

노조와 협력 사업 시도

▲ 평등사회노동교육원 활동가 기초과정 학습모임 성원들이 협동으로 모형을 만들고 있다.<사진·평등사회노동교육원>
교육원은 전국지역일반노조협의회(이하 일반노협)와 지난 2014년 양해각서(MOU)를 체결해 일반노협 실정에 맞는 교재를 개발했다. 처음으로 노조와 협력 사업을 시도한 것이다. 일반노조의 성격에 맞춰 맞춤형 교안을 만들고 안내강사 훈련을 시켜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최근에는 공공노조 의료연대와 금속노조 등과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박 원장은 노조가 교육 사업을 잘 하면 외부 교육단체는 필요 없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예전에 노조가 정부로부터 탄압받을 때는 외부 노동단체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노조가 인력과 재정을 다 갖고 있다. 그러나 교육을 소홀히 하고 있다. 요즘 어느 노조를 가나 대의원과 간부를 세우기 힘들다고 한다. 간부가 없는 노조는 유지될 수 없다. 그럼 어떻게 간부를 세울 것인가? 학습으로 간부를 결의하게 해야 한다. 1980년대는 학습모임을 한 노동자들이 노조의 핵심간부들이 됐다. 노동교육이 조직화와 맞물렸다. 지금도 비정규직 운동을 하는 곳은 그런 기풍이 남아있지만, 노조가 합법화되고 규모가 큰 노조들은 조직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 조직화와 학습운동이 분리됐다. 더 이상 노조에서 학습하는 풍조가 사라지니 젊은 활동가가 나오지 않고 간부를 하지 않으려한다. 학습운동이 죽었다. 그래서 노동운동의 위기가 만들어진 측면이 있다. 그런데 노조에서 교육 사업에 투자하지 않는다. 매번 사업평가를 할 때마다 교육 사업이 부족했고 교육 사업을 강화하겠다고 하지만, 말뿐이고 예산을 편성하지 않는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내년이면 창립 5주년을 맞는 교육원은 지금까지의 활동을 살펴보고 미래 비전을 모색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 ‘교육원을 지역마다 건설해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어 노동교육운동을 활성화한다’는 처음 목표에 턱없이 모자라다고 말하는 박 원장은 교육원의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들하고는 모두 협력해 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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