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기지촌 출신 혼혈인의 삶과 희망 ⑥ 부평 신촌에서 평택으로 간 기지촌 여성들의 삶

<편집자 주> 인천투데이은 한국과 인천의 형성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부평미군기지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기지촌 출신 혼혈인들의 삶과 그들의 절규를 담아내고자 기획취재를 진행한다. 이와 관련한 기사를 몇 차례 연재한다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와 캠프험프리스

[기획취재] 기지촌 출신 혼혈인의 삶과 희망

① 한국인과 캠프타운 2015 컨퍼런스(상)
② 한국인과 캠프타운 2015 컨퍼런스(하)
③ 한국인과 캠프타운 2015 컨퍼런스(보강)
④ 입양기관의 서류 관리 부실 많아
⑤ 파주시 ‘어머니의 품’ 동산 조성 추진
⑥ 부평 신촌에서 평택으로 간 기지촌 여성들의 삶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는 주한미군기지촌으로 국내에서 꽤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는 미군기지 캠프험프리스(K-6)가 자리하고 있다.

안정리는 1942년 일본의 병참 기지를 만드는 일을 담당한 일본 해군 시설대 302부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대다수 주한미군기지가 그랬던 것처럼 캠프험프리스 역시 일제가 만든 군사 시설이었다. 비행장 시설을 만들던 이곳을 일제가 패망한 뒤 미군이 점령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주변에 기지촌이 형성됐다. 초가집 일곱 채가 있던 작은 마을 안정리에 주한미군기지가 들어서면서 이른바 ‘양공주’로 불리는 여성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국내 최초의 기지촌이라 할 수 있는 부평 신촌과 마찬가지로 안정리에 주한미군이 주둔한 뒤 판잣집들이 늘어났다.

특히 1970년대 부 평의 애스컴시티(Ascom City)가 해체되고 보급부대와 정보부대가 안정리로 이전, 안정리의 기지촌은 더욱 커졌다. 이곳에서 미군 등을 상대했던 여성이 한 때는 2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주한미군의 계속적인 감축에도 불구, 1984년에도 보건소 등에 기록된 기지촌 여성은 603명에 달했다. 이곳엔 카투사(주한미군에 파견돼 근무하는 한국 육군의 군인) 훈련소도 위치하고 있고, 1976년엔 팀스피리트 훈련 전진기지로도 활용돼, 미군은 물론 카투사들도 자주 찾았다.

평택 ‘사창가’의 역사도 제법 된다. 그 뿌리는 일제강점기부터이고, 주한미군이 주둔하면서 활개를 쳤다. 경기도 남부의 중심도시인 평택은 아픈 근현대사와 함께 성장했다. 1894년 청일전쟁 때 격전지 중 하나였던 평택은 일본군이 주둔하고,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비약적 발전을 했다. 일본인들은 경부선을 부설하면서 사통팔달 지역인 안성 대신 평택에 역을 신설했다. 이로 인해 평택에 일본인을 상대하는 유곽이 들어섰고, 이어 한국인을 상대하는 사창가도 들어섰다.

한국전쟁 이후 주한미군이 주둔한 뒤로는 대규모 기지촌이 형성됐다. 주한미군의 단계적 감축으로 다른 지역 기지촌의 규모가 줄어들었던 것과 다르게 평택과 양주에 있던 기지촌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1978년 평택(송탄 포함)에 등록된 성매매 여성은 2024명, 검진 대상 여성은 연인원 10만 2176명에 달했다. 양주(동두천 포함)도 각각 3115명과 12만 5424명이었다.

주한미군 주둔으로 기지촌 규모 커진 평택

캠프험프리스가 자리한 안정리의 풍경은 그냥 보기엔 여느 한적한 동네와 비슷하다. 종종 지나가는 헬리콥터와 군용차량의 소리, 이국적 분위기를 연출하는 영어간판 등을 제외하면 말이다.

낮 시간에 찾은 안정리는 이곳이 기지촌일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로 한적했다. 하지만 해가 떨어지자, 서서히 기지촌 모습을 드러냈다. 미군들이 삼삼오오 모습을 나타냈고, 이들을 상대하는 여성들이 나타났다. 이런 유흥가 주변엔 지어진 지 오래된 허름한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이곳은 조만간 사라진다. 용산미군기지와 미2사단 등이 이전할 대규모 평택미군기지가 조성되기 때문이다. 도로를 넓히는 등, 평택미군기지 조성 공사가 한창이다. 안정리엔 문화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다.

1960~70년대 안정리로 흘러 들어온 여성들은 이제 이곳에서 쫓겨날 위기에 놓였다. 월세 10만~20만원을 내고 살고 있는, 이제 할머니가 된 기지촌 여성들이 갈 곳이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이들은 안정리 기지촌 여성들을 돌보는 햇살사회복지회 등의 도움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2008년 ‘경기도 기지촌 여성노인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 133명 중 90명이 월세로 살고 있고, 집을 소유한 여성은 5명 뿐이었다. 지속적인 치료가 요구되는 질병을 가진 사람이 113명이나 됐지만, 지속적인 치료를 받고 있지 못했다.

부평에서 평택으로 간 사람들, 지금은

▲ 1960~61년 부평 애스컴시티 앞 기지촌 풍경. <ME&KOREA 제공>
애스컴시티 해체 후 많은 미군이 평택 등으로 가자, 부평 신촌지역에 있던 기지촌 여성들도 그들을 따라갔다. 1934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1960년대 중반부터 1979년까지 부평 신촌 인근에서 미군을 상대했던 K 할머니는 현재 평택의 작은 단칸방에서 홀로 산다.

그는 그 어려웠던 시절에 서울S상업고등학교를 나와 간호사로 4년이나 일했던 인텔리 여성이었다. 하지만 여러 우여 곡절 끝에 기지촌인 부평 신촌으로 흘러들어왔다. 신촌에서 미군과 생활하다가 1979년 평택으로 갔다. 1년 정도만 더 돈을 모아 부평으로 다시 이사 올 계획이었다.

“내려왔을 때는 여기서 1년만 더 고생하고 다시 부평으로 가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때 부평은 나의 고향 같은 곳이었다. 부평에 올라가고 싶어 자주 울었다. 그땐 부평에서 평택으로 내려온 여성들이 꽤 있었다”

고향이 목포인 J할머니도 부평 기지촌에서 생활하다가 평택으로 와 살고 있다. 그는 여덟 살 때 해방을 맞이했고, 열세 살 때 전쟁을 겪었다. 집안이 아주 가난해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그는 부평에서 기지촌 생활을 먼저 한 친구 때문에 기지촌 여성으로 살았다. 부평 백마장에서 기지촌 생활을 했는데, 다행히 좋은 이웃들과 미군을 만나 무난하게 생활했다.

그는 재혼한 엄마와 동생들의 생활을 책임졌다. 돈을 벌어 엄마의 재혼으로 헤어졌던 남동생을 3년 만에 찾아왔다. 엄마가 재혼해 낳은 동생들과 남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게 물질적 도움을 줬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던 것이다.

결혼하기로 한 미군이 갑자기 병으로 죽는 바람에 결국 평택으로 갔다. 나이 마흔에 혼혈인 아들을 낳기도 했다. 사회적 편견을 버티지 못한 아들은 중학교 1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그는 홀로 평택에서 생활하고 있다.

애스컴시티가 해체되면서 기지촌 여성들 말고도 신촌에서 생활했던 ‘포주’와 미용실 원장들도 평택 등으로 생활터전을 옮겼다. 부평3동 S미용실 원장은 1970년대 평택으로 가 미용실을 운영하다가 다시 신촌으로 와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1968년 신촌에서 미용실을 개업했다.

그는 “신촌이 양공주 때문에 장사가 하도 잘 된다고 소문이 돌아 서울에서 개업하지 않고 신촌까지 와서 일하고 살다 보니 지금까지 여기서 살고 있다”며 “하루에 수십 명이 미용실을 찾았다. 돈은 포주가 계산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역시 신촌에서 C미용실을 운영했던 할머니도 당시 주한미군에 의한 달러 경기가 좋았다고 말했다.

“하루 종일 일을 하면 큰 금고에 돈이 가득 찼는데, 그렇게 돈을 벌면 시어머니가 그 돈을 다 가져갔다. 그때는 돈을 엄청 벌었다”

<도움ㆍ부평역사박물관>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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