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훈 교사가 전하는 ‘부모가 알아야 할 학습의 원리’⑧

세종대왕의 혁신, 글자 24개로 모든 소리를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세종대왕은 글을 모르는 백성을 안타깝게 생각해 문자를 쉽게 배울 수 있게 한글을 창제했다. 훈민정음에는 ‘어리석은 사람도 일주일이면 깨우치고 똑똑한 사람은 반나절이면 깨우친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글은 글자 24개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를 기록할 수 있게 고안됐다.

서당에 가서 몇 년을 공부해야 겨우 한문을 배우던 당시로서는 아주 혁신적인 발상이었다. 언어학적으로 한글은 소리와 철자의 투명도가 높다. 반면 상형문자인 한문은 의미 중심의 글자이다. 글을 익히기 위해서는 3000자 또는 5000자의 글자를 알아야 읽을 수 있다. 하지만 한글은 자음 14개와 모음 10개, 이렇게 글자 24개만 익히면 낱자와 소리를 연결해 글을 읽을 수 있다.

미국 초등학교에서 한글 가르치기

미국의 초등학교 교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담임교사는 나를 한국에서 온 초등학교 교사라고 소개하더니 즉석에서 수업을 해달라고 했다. 학생들은 10분 이상 엄청난 질문을 던졌다. 그중 한 학생이 ‘한국에서는 어떤 문자를 사용하느냐’고 질문했다.

그 자리에서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알려주고 학생들에게 읽어 보게 했다. 그런데 정말 놀라웠다. 미국 학생들이 한글을 천천히 읽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도 놀라웠지만 미국 학생들도 놀랐다. 낯선 문자를 읽는 방법을 바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그 수업을 계속하자고 졸랐다. 자신의 이름을 영어로 부르면 내가 한글로 쓰고, 다시 학생들이 한글을 읽었다. 그렇게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읽을 때마다 함성이 터져 나왔다. 실로 엄청난 집중과 흥분의 도가니였던 그 교실을 아직도 기억한다.

한글을 가르치는 방법 두 가지

아이들에게 문자를 가르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자ㆍ모음의 소리를 구체적으로 가르치기보다는, 아이들이 그림과 글자가 있는 낱말카드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익히는 ‘의미 중심’ 총체적 언어접근법(whole language approach)이다. 대체로 우리나라 한글 영유아 사교육에서 이 방법을 많이 쓴다.

둘째는 자음과 모음의 소리를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발음 중심’ 접근방법으로 영어교육에서의 파닉스 교수법(phonics instruction)에 해당된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효과적인 것일까? 이 문제를 두고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 언어학계는 지난 십 년 이상 엄청난 논쟁(great debate)을 벌였다. 얼마나 격렬했던지 이것을 두고 ‘언어 전쟁(language war)’라 불렀다. 이러한 논쟁의 최종 승자는 바로 ‘발음 중심’의 파닉스 교수법이었다.

현재 전 세계 언어학계는 파닉스 즉, 발음 중심 방법으로 정리하고 있다. 보통 수준의 언어발달을 가진 아이가 통글자 방식으로 한글을 익히는 기간은 대략 6개월 이상 걸릴 것이라 예상한다. 이에 반해 자음과 모음의 소리를 명확하게 가르치는 발음 중심의 방법으로 가르치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에 기록한 것과 같이 일주일 정도 기간에 받침이 없는 글자 즉, 가ㆍ나ㆍ다를 알기 시작한다.

근본적으로 한글은 소리와 철자를 연결하는 글자다. 그리고 한글 창제 원리에서부터 자음과 모음의 ‘소리 값’이 중요하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한글 특징상 발음 중심의 방법이 적절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창제자인 세종대왕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음이 먼저인가, 모음이 먼저인가?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칠 때 혹시 ‘자음을 먼저 가르칠 것인가?’ 아니면 ‘모음을 먼저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하는 부모가 있을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 ‘ㄱㆍㄴㆍㄷㆍㄹ…’ 이렇게 자음을 먼저 배웠다. 하지만 정답은 모음을 먼저 가르쳐야한다는 것이다.

왜 정답이 있냐면, 훈민정음 창제 원리에 모음을 먼저 가르치라고 돼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모음 ‘ㅏㆍㅑㆍㅓㆍㅕㆍㅗㆍㅛㆍㅜㆍㅠㆍㅡㆍㅣ’ 이렇게 순서대로 먼저 배운 다음 처음 자음 ‘ㄱ’(기역, 기윽)을 배우고 지금까지 알았던 모음과 연결하면 ‘ㄱ+ㅏ=가’ 이렇게 ‘가ㆍ갸ㆍ거ㆍ겨ㆍ겨ㆍ고ㆍ교ㆍ구ㆍ규ㆍ그ㆍ기’ 글자를 익힌다.

필요하다면 부모나 가르치는 사람이 소리 값을 구체적으로 가르쳐도 좋다. 예를 들어 ‘ㄱ’의 소리 값 [그]와 ‘ㅏ’의 소리 값 [아]를 연결해 소리로 천천히 [그-아, 가] 이렇게 가르치면 좋다. 그리고 그 다음 ‘ㄴ+ㅏ=나(나ㆍ냐ㆍ너ㆍ녀ㆍ노ㆍ뇨ㆍ누ㆍ뉴ㆍ느ㆍ니)를 학습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어느 정도 진행하면 아이들은 “아하! 이제 뭔지 알아요”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계속 모음이 반복되기 때문에 이제 자음의 소리만 알면 스스로 모음과 연결해 ‘발명적’으로 자음과 모음의 소리가 어떻게 글자로 조합되는지 알게 된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똑똑한 어른은 반나절 만에 익힌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아이들은 가장 중요한 받침이 없는 ‘민글자’를 익힌다. 이 글자를 알면 생활 속에서 글자를 보고 듣고, 또는 부모가 읽어주는 책을 듣고 보면서 받침 글자도 읽을 수 있게 된다.

한글의 놀라운 디테일

나는 지난 몇 년간 한글 읽기와 쓰기가 어려운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러면서 놀라운 한글의 비밀을 알았다. 난독증이나 한글 읽기ㆍ쓰기 부진 아이들은 유독 ‘자음의 소리 값’을 잘 모르거나 혼돈스러워한다. 그런데 이 아이들을 위한 세종대왕의 특별한 힌트가 자음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많은 아이가 ‘ㅈ’와 ‘ㅊ’, ‘ㄷ’ 와 ‘ㅌ’, ‘ㅁ’ 와 ‘ㅍ’, ‘ㅇ’와 ‘ㅎ’를 구분하기 힘들어한다. 그런데 잘 보면 이런 글자에는 ‘-’ 또는 ‘ㆍ’이 추가돼있다. 즉, 이 자음은 바람이 강하게 나온다는 공통점이 있다. 예를 들어 ‘ㄷ’보다 ‘-’ 추가된 ‘ㅌ’은 소리를 내면 [트]처럼 입에 손을 대면 바람이 강하게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ㅈ보다 ‘ㆍ’가 추가된 ‘ㅊ’ 역시 [츠]처럼 입에서 바람이 강하게 나온다. 알면 알수록 한글에는 놀라운 디테일이 숨어 있다.

한글 학습 어려움의 비밀은 바로 ‘받침’

▲ [그래프 1] 자음+모음+자음 못 읽는 아동
▲ [그래프 2] 자음+모음 못 읽는 아동
언어심리학자인 조증열 경남대 한글읽기과학연구단 교수는 광범위한 연구로 최근 한글 학습의 아킬레스를 찾아냈다. 한글 읽기ㆍ쓰기가 부진한 아이들의 특징이 바로 한글 받침에 있다는 것이다.

(위 그래프 참고)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해 1학기가 지나면 읽기 부진(좌측 ▲그래프 선) 아동과 보통 아동(좌측 ■ 그래프 선) 절대 다수는 자음과 모음으로 구성된 받침이 없는 글자인 민글자를 익힌다. 하지만 우측 그래프의 받침이 있는 글자에서 읽기 부진(우측 × 그래프 선)은 못 읽는 아동이 현저하게 줄어들지 않았다. 1학년 1학기가 지나도 76%나 모르고, 심지어 3학년이 되어도 17%는 받침 있는 글자를 명확하게 읽지 못했다.

따라서 한글을 어렵게 배우는 아이들은 반드시 자음의 받침을 명확하게 가르쳐야한다. 그리고 한글 읽기ㆍ쓰기가 부진한 아이들이 받침을 잘 알고 있는지 반드시 확인해야한다. 모든 일에는 디테일의 악마가 있다고 한다(The Devil is in the details). 한글에는 받침이 바로 악마가 있는 곳이다.

언어병리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이 점을 아주 주의깊게 주목한다. 왜냐하면 받침을 명확하게 모르면 일단 추측해서 읽고, 추측해서 읽기가 습관이 된 아이들은 책을 읽을 때 에너지를 많이 소모한다. 무엇보다 읽기가 자동화되지 않아 ‘읽기이해’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세종대왕도 이 점을 어느 정도 알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ㄱ’은 소리 값이 [그-윽] 또는 [기-역], ‘ㄴ’ 역시 소리 값이 [니-은] 또는 [느-은]처럼 모든 자음 이름에는 첫소리와 받침소리가 있다. 아이들이 한글을 읽게 되면 자음의 받침소리를 다시 크게 강조해서 가르칠 필요가 있다. 생각해보니 한글은 원래 ‘어리석은 백성이 쉽게 쓰게 만든’ 글자인 것이다. 한글은 알수록 놀랍다.

※김중훈 시민기자는 인천운서초등학교 교사이며, ‘좋은교사운동’ 정책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