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한국 산업화의 역사, 부평ㆍ주안 혁신 산단의 방향은 ⑤
대한민국 1호 수출현장, 구로공단(하)

<편집자 주> 지방자치제도 시행 이후 인천엔 산업정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가 계속 나오기 시작했다. 최기선 전 인천시장 때부터 추진한 인천경제자유구역 개발만 잘 되면 지역 산업의 경쟁력이 높아지고 지역 경제도 활성화될 것처럼 위정자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지금으로 보면 정의당을 빼고 여야 모두 그랬다.

물론 미래를 위한 투자는 필요하다. 하지만 경제자유구역 중심의 경제정책은 큰 문제점을 안고 있다. 지금까지 인천 경제를 이끌어온 산업은 뿌리산업이다. 그 뿌리산업이 가지고 있는 고용효과와 경쟁력은 절대 낮지 않다. 그럼에도 인천의 위정자들은 ITㆍBT와 금융업이 향후 인천의 먹거리라고 십수년간 목소리를 높여왔다.

대기업을 인천에 유치해도 고용효과는 얼마 되지 않는다. 반면, 갈수록 활동하기 힘든 기업체들은 다른 지역으로, 심지어 외국으로 이전하고 있다. 그 자리를 고층 아파트나 주상복합건물이 차지한다. 일자리가 없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는 인천을 자립형 도시가 아닌 다른 지역에 의존하는 도시로 만든다.

한국 수출산업의 일번지로 출발해 국내 최고의 도심형 첨단산업단지로 도약을 꿈꾸는 부평국가산업단지가 지정된 지 올해로 50년 됐다. 이에 <인천투데이>은 ‘한국 산업화의 역사, 부평ㆍ주안 혁신 산단의 방향’이란 주제를 가지고 10회에 걸쳐 보도한다.

[기획취재] 한국 산업화의 역사, 부평ㆍ주안 혁신 산단의 방향은

① 인천경제의 뿌리 부평·주안산단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상)
② 인천경제의 뿌리 부평·주안산단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하)
③ 전자산업의 요람, 구미
④ 대한민국 1호 수출현장, 구로공단(상)
⑤ 대한민국 1호 수출현장, 구로공단(하)
구로공단은 대한민국의 수출1번지다. 1970~80년대 저임금에 기초해 산업화를 견인하며 수출 전진 기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섬유ㆍ봉제ㆍ전자제품 조립 등, 경공업 수출 기업 중심으로 입주기업이 늘어났다. 섬유ㆍ봉제는 1단지 준공 후 12년간 공단 수출액의 44.4%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았다.

1단지가 발전하자, 박정희 정권은 이를 홍보하기 위해 1968년 9월 9일 한국무역박람회를 열었다. 1993년 대전 엑스포를 국내에서 열린 첫 국제박람회로 알지만, 이보다 25년 빠르게 국제박람회가 열린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를 비롯해 정부 기관과 경제 기관을 총망라해 국가적 행사로 치렀다.

구로공단은 1977년 대한민국이 수출 100억불을 돌파할 당시 국가 수출의 10% 이상을 담당할 정도였다. 1970년대 후반 가발 산업이 쇠퇴하자, 전기ㆍ전자 업종이 섬유ㆍ봉제에 이어 공단의 2위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1985년 전기ㆍ전자 분야가 구로공단 수출 1위 업종으로 부상했다. 구로공단은 1980년대 중반까지 국가 수출의 10% 이상을 차지했다. 이는 부평과 주안공단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젊은 여성노동자들을 비롯한 노동자들의 땀과 희생으로 구로공단은 계속 성장했다. 1970년대 구로공단에 취업한 노동자는 11만명에 달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구로공단

▲ 구로공단 여성 노동자들이 일하는 모습.<사진제공·한국산업단지공단 서울본부>
하지만 구로공단에도 위기가 닥쳤다. 저임금 장기간 노동만으로 버티기엔 힘든 조건이 된 것이다. 여기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국제 유가 파동에 따른 수출 침체와 임금 인상이 맞물리면서 경쟁력을 잃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저임금 노동집약적 섬유ㆍ전자제품 조립 업체들이 경쟁력을 잃으면서, 해외와 국내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공단의 공동화 현상이 나타났다.

1990년 40억 8800만 불이던 수출 규모는 IMF 직후 21억 500만 불로 반 토막 났다. 고용 인원도 1990년 5만 5694명에서 1998년 2만 5126명으로 대폭 줄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대우ㆍ한일합성ㆍ진도ㆍ세계물산 등, 공단 내 대표적 기업들도 잇달아 도산했다. 여기다 저임금 노동력에 기반해 공장을 운영했던 일본ㆍ미국 등의 다국적 기업들도 구로공단에서 철수했다.

김영삼 정부 말기 ‘구로단지 첨단화 계획’을 수립했다. 이를 이어 받은 김대중 정부는 2000년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선포식을 기점으로 단지 전환의 획기적 변화를 모색했다. IT 등, 지식산업 중심으로 공단의 업종을 전환하고, 지식산업센터를 공장총량제 적용에서 제외했다. 입주 기업에 세제와 금융 지원도 했다. 2000년 12월 14일 구로공단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구로공단역도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변경했다.

구로공단은 이후 상전벽해처럼 변했다. 굴뚝 산업단지에서 첨단 IT벤처밸리로 재탄생한 것이다. 기술혁신형 벤처기업 육성과 산학연 연계지원을 위한 키콕스벤처센터가 건립됐다. 기업 환경이 잘 갖춰진 지식산업센터도 급격히 늘었다. 이에 동반해 강남지역 IT 기업이 대거 입주했다. 전기ㆍ전자 공장의 생산직 노동자들은 청년벤처기업인으로 대체되고, 공장지대는 휴게기능이 갖춰진 오피스형 공간으로 외형적 변화도 가속화했다. 2010년 10월,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입주 기업이 1만개를 돌파했다.

구로공단의 상전벽해, 어떻게 가능했나?

이런 변화를 초래한 지식산업센터의 건립 현황을 보면, 1997년 2개소에 불과했던 것이 2007년 80개소로 늘고, 2013년엔 107개소로 증가했다. 1997년 442개에 불과하던 입주 기업도 2007년 7387개, 2013년 1만 1911개로 많이 늘었다. 이에 따른 고용도 증가했다. 19 97년 3만 1987명에서 2013년 16만 2032명으로 늘었다. 생산액은 2013년 17조 2120억원에 달했고, 수출도 33억 달러를 초과했다.

상전벽해와 같은 이런 변화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구로공단이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데 김대중 정부의 정책적 결정과 그에 따른 지원이 한몫 했다.

먼저 구로공단은 규제 완화와 낮은 비용으로 제조업 중심에서 지식기반 산업으로 입주 업종을 확대했다. 지식산업센터를 공장총량제 적용에서 제외하고, 건설사의 지식산업센터 공급을 대폭 늘게 했다. 여기다 낮은임대료도 한몫 했다. 강남보다 10~20% 낮은 임대료는 젊은 벤처기업인들을 구로공단으로 모여들게 했다.

구로공단이 가지고 있는 입지적 비교우위도 이들을 모이게 했고, 이들은 자연스럽게 네트워크를 구성했다. 동종 또는 연관 업체가 모이면서 협력과 인력 확보가 쉬워지고, 벤처와 기존 제조업 간 기능 분담으로 시너지효과를 창출했다. 집적화로 양질의 기술과 시장 정보를 얻을 기회도 늘어나 새로운 사업 기회를 쉽게 찾을 수 있게 됐다.

서울시와 한국산업단지공단 서울본부는 공단 노동자들을 위해 직장어린이집 등의 편의시설을 확충하고 있다. 현재 직장어린이집 10곳을 운영 중인데, 2곳을 더 신설하기로 했다. 인천 소재 국가산업단지와 일반산업단지에 직장어린이집 하나 변변히 없는 것을 감안하면, 격세지감이다.

마지막으로 구로공단은 서울 등 수도권의 우수한 비즈니스 환경(인력ㆍ기술ㆍ지식ㆍ자본 등)을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교통 요충지로서 사람ㆍ물자ㆍ정보 접근이 용이하다는 강점이 있는데, 이를 잘 살린 것이다.

구로공단은 아직 배가 고프다

▲ 서울디지털단지의 모습(2010).<사진제공·한국산업단지공단 서울본부>
이런 변화ㆍ발전에도 불구, 한국산업단지공단 서울본부 관계자는 “구로공단은 아직 배가 고프다. 꾸준한 변화ㆍ발전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산업단지공단 서울본부와 서울시는 동종 업종 간 집적화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 중이다. 게임과 애니메이션 등, 새로운 산업 환경에 따른 집적화 추진과 함께, 의료기기 업체가 증가하자 고려대 구로병원과 연계한 기술 개발도 추진 중이다. 구로공단 소재 기업인들도 “다른 제조업체와 다르게 서로 정보 교류 등이 활발하다”고 귀띔해줬다.

한국산업단지공단 서울본부 관계자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최대 이점은 서울이 가진 장점을 누리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지역 산업단지 입주 기업들에 인천이 가진 장점, 즉 항만ㆍ공항ㆍ수도권 배후도시와 인접 등을 살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인천 정책 입안자들과 정치권이 해야 할 몫은 아닐까?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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