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한국 산업화의 역사, 부평ㆍ주안 혁신 산단의 방향은 ④
대한민국 1호 수출현장, 구로공단(상)

<편집자 주> 지방자치제도 시행 이후 인천엔 산업정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가 계속 나오기 시작했다. 최기선 전 인천시장 때부터 추진한 인천경제자유구역 개발만 잘 되면 지역 산업의 경쟁력이 높아지고 지역 경제도 활성화될 것처럼 위정자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지금으로 보면 정의당을 빼고 여야 모두 그랬다.

물론 미래를 위한 투자는 필요하다. 하지만 경제자유구역 중심의 경제정책은 큰 문제점을 안고 있다. 지금까지 인천 경제를 이끌어온 산업은 뿌리산업이다. 그 뿌리산업이 가지고 있는 고용효과와 경쟁력은 절대 낮지 않다. 그럼에도 인천의 위정자들은 ITㆍBT와 금융업이 향후 인천의 먹거리라고 십수년간 목소리를 높여왔다.

대기업을 인천에 유치해도 고용효과는 얼마 되지 않는다. 반면, 갈수록 활동하기 힘든 기업체들은 다른 지역으로, 심지어 외국으로 이전하고 있다. 그 자리를 고층 아파트나 주상복합건물이 차지한다. 일자리가 없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는 인천을 자립형 도시가 아닌 다른 지역에 의존하는 도시로 만든다.

한국 수출산업의 일번지로 출발해 국내 최고의 도심형 첨단산업단지로 도약을 꿈꾸는 부평국가산업단지가 지정된 지 올해로 50년 됐다. 이에 <인천투데이>은 ‘한국 산업화의 역사, 부평ㆍ주안 혁신 산단의 방향’이란 주제를 가지고 10회에 걸쳐 보도한다.

[기획취재] 한국 산업화의 역사,
부평ㆍ주안 혁신 산단의 방향은

① 인천경제의 뿌리 부평·주안산단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상)
② 인천경제의 뿌리 부평·주안산단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하)
③ 전자산업의 요람, 구미
④ 대한민국 1호 수출현장, 구로공단(상)
1960년대 초반까지 대한민국 국민을 먹여 살릴 산업은 턱없이 부족했다. 노동인구의 25% 가량이 실업 상태였고,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100달러 미만이었다. 전국적으로 주둔해 있던 미군기지 주변이나 농경지가 상대적으로 많은 호남 지역을 제외하고는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았다. 다만 주요 도시인 서울과 부산, 대구와 인천 정도에 크고 작은 공장들이 밀집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울산에 첫 번째로 산업단지를 지정해 육성하려했다. 첫 삽을 뜬 곳은 울산이었지만,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먼저 올라온 곳은 서울 구로였다. 당시 정부 정책은 수출 드라이브를 거는 것이었다. 고품질의 노동력을 기반으로 하는 저가의 경공업 물품을 생산해 수출하는 것을 육성할 계획을 수립했다. 또한 정유ㆍ비료ㆍ종합제철 등, 국가기간산업을 육성하는 정책도 동시에 폈다.

그 일환으로 정부는 수출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한다.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을 근거로 해 1965년부터 1974년까지 국내 최초의 수출국가산업단지를 조성했다. 바로 구로공단이다. 그 뒤를 인천 부평과 주안이 이었다.

구로공단이 들어선 곳은 서울에서도 변두리 지역으로 논과 밭, 야산이 전부였다. 한강과 가까워 공업용수 확보가 쉬웠고, 경부선 영등포역과의 거리가 5km에 불과해 교통이 편리했다. 인천항과도 가까운 편이라 항만으로 수출 물동량을 빼내기가 용이했다.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 생산한 구로공단

구로공단을 조성하려했지만, 당시 한국은 자본과 기술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정부는 재일교포의 자본을 유치하려했다. 당시 재일교포들은 행정적 지원을 담당할 창구로서 관리공단의 신설과 보세 가공이 가능한 공업단지 조성을 정부에 요구했다.

이것이 구로공단 탄생 계기가 됐다.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티브이(TV)를 생산하는 동남전기공업이 가장 먼저 입주해 시운전과 동시에 공장을 가동했다. 국내 기업 10개와 싸니전자를 비롯한 재일교포 기업 20여개가 자리를 잡았다. 미국 기업 1개도 입주했다.

이렇게 시작한 구로공단은 섬유ㆍ봉제 등 경공업을 중심으로 기반을 닦아나갔다. 구로공단에서 생산한 의류ㆍ가발ㆍ신발ㆍ인형 등 봉제품과 합판 등의 제품은 전 세계 시장으로 팔려 나갔다. 중국이 개혁ㆍ개방 후 저임금 노동으로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을 전 세계에 수출했듯이, 구로공단에서 생산한 제품들은 주로 해외 기업체의 주문에 의한 OEM 생산이므로 주문 회사의 상표가 붙었지만, 제품 한 귀퉁이에 ‘메이드 인 코리아’ 태그가 붙었다.

당시 구로공단에서 생산의 주역은 시골에서 성장한 소년·소녀들이 담당했다. 열악한 환경과 사회적 멸시 속에서도 멈추지 않은 그들의 노동이 현재의 대한민국을 탄생하게 했다.

1964년 11월 30일 연간 수출액 누계가 사상 처음으로 1억 달러를 돌파했고, 그로부터 31년 후인 1995년 수출액은 1000억 달러로 불어났다.

여공들의 애환이 서린 수출현장

시골에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가난한 집안의 입을 하나 덜면서 오빠나 남동생의 공부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취업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이른바 ‘벌집’이라 불리는 자취방에서 기거하며 사회적으론 ‘공순이’라는 멸시를 받으며 일했다.

“서른일곱 개의 방이 있던 그 집, 미로 속에 놓인 방들, 계단을 타고 구불구불 들어가 이젠 더 어쩔 수 없을 거 같은 곳에 작은 부엌이 딸린 방이 또 있던 3층 붉은 벽돌집…”

신경숙씨의 자전적 소설 ‘외딴 방’에서 묘사한 쪽방이다. 어린 여공들은 하루 12시간 이상의 장기 노동 후 지친 몸을 간신히 눕힐 수 있는 이런 공간에서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여공들의 삶을 무시할 수 없었던 박정희 정권은 구로공단이 조성된 지 10년이 되던 1974년, 동상 하나를 세웠다.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한 잔 다르크처럼 오른손에 횃불을 들고 왼손으로는 지구를 거머쥔 ‘수출의 여인상’이다. 그들은 노동 착취 속에서도 성실히 일하며 적은 급여지만 저축도 열심히 했다. 그리고 형제들의 공부도 책임지는 어린 가장으로 자신의 삶을 바쳤다.

어린 나이에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을 위해 당시 정부는 산업체에 특별 학급을 신설하게 했다. 정규 졸업장도 받을 수 있게 했다. 이와 관련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화가 산업단지 관련 언론 보도나 책자 등에 수차례 소개됐다. 대표적 일화를 보면, 산업단지를 방문한 박정희에게 한 여공이 “저도 친구들처럼 교복 한번 입어보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이를 계기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산업체 특별 학급이 신설됐다. 당시 교육당국은 이들에게 정규 졸업장을 줄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가 박정희의 진노를 사기도 했다.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으로 섬유와 봉제 공장 등을 운영해 막대한 이익을 보기 시작한 구로공단 소재 기업들도 물가 상승과 오일 쇼크, 임금 상승, 토지비용 상승 등으로 경쟁력이 저하됐다. 1990년 이후엔 중국 등 해외로 이전하는 기업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주력 업종이 정보기술(IT)로 변했다.

※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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