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강화 유적 세계유산 등재 가능성 제고 방안 ⑤ 이미 등재한 곳에서 배운다 - 남한산성

<편집자 주> 강화도는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릴 만큼 역사문화 유적이 많다. 인천시는 강화 유적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기본계획을 지난해 11월 수립했고, 올해 1월 태스크포스(T/F)팀을 꾸려 세부추진계획을 수립,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을 본격화하고 있다. 강화의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 대상은 관방유적(진ㆍ보ㆍ돈대 등)이다. 하지만 이러한 추진 상황을 인식하고 있는 인천시민은 많지 않다.

이에 <인천투데이>은 추진 상황은 물론 세계유산 등재의 목적과 의의, 세계유산 등재 기준과 절차 등을 보도해 시민 관심도를 높이고자 한다. 아울러 현재 국내에선 서울 한양도성 등도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이에 타 지역의 추진 사례를 취재해 강화와 비교해보고, 이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 등의 등재 추진과정과 등재 후 관리방안 등을 취재해 강화 유적의 세계유산 등재 가능성을 제고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동시에 등재 후 관리방안 등 향후과제도 살펴보고자 한다.

남한산성의 아우라, 편견을 넘다

[기획취재] 강화 유적 세계유산 등재
가능성 제고 방안

①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와 가치 재창조
② 강화 유적 세계유산 등재 추진, 어디쯤
③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역사ㆍ학술적 가치(상)
④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역사ㆍ학술적 가치(하)
⑤ 이미 등재한 곳에서 배운다 - 남한산성
‘남한산성’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아우라는 무엇보다 ‘병자호란’의 치욕적 패배의 상징 장소라는 기억이다. 1623년 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출하고 왕위에 오른 조선 12대 왕인 인조는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남한산성으로 급히 피신해 47일 동안이나 고립돼 항전한다.

그러나 믿었던 또 다른 조선왕실의 피란처였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매서운 추위와 식량부족 상황에서 인조는 결국 청나라에 항복할 것을 결정한다. 결국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남한산성 서문으로 송파나루 삼전도(지금의 잠실)까지 나아가 청나라 태종 앞에서 세 번 절하고 땅 바닥에 머리를 아홉 번 찧었다.

기록을 보면, 17세기부터 구한말까지 조선시대 남한산성 안에는 한 때 1000호의 주민(=약 4000명)이 살았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엄연한 ‘도시’ 수준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이후 남한산성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서서히 잊혀갔고, 남한산성 안에서 대대로 삶을 영위해온 주민들은 그 터전을 잃고 서울 등지로 떠나야만 했다.

그러다 1970년 이후 남한산성이 경기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서울과 경기권의 중ㆍ고등학생의 수학 여행지로, 또는 서울 근교 일반 나들이객이 늘어나면서 남한산성 내 음식점 집적지로 변해갔다. 점차 늘어나는 관광 식객을 상대로 산성리 주민이 가장 먼저 음식 메뉴로 개발한 건 ‘닭백숙’이었다.

당시 흔히 집에서 쉽게 키울 수 있고 가장 쉬운 요리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란다. 그 후로 남한산성은 전국에서 유명한 ‘닭백숙’의 명소로 통했다. 남녀노소 성곽을 따라 쉽게 일주할 수 있는 남한산성은 경기도에서 ‘에버랜드’ 다음으로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수도권 남부 최대의 등산코스로도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병자호란, 닭백숙, 등산의 명소와 같은 이미지를 넘어 남한산성은 어떻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을까?

간추린 세계유산 등재 5년 사(史)

▲ 남한산성 북쪽 성곽길.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출범으로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본격적인 발걸음이 시작됐다. 잠들어있던 남한산성의 역사를 발굴하는 한편, 남한산성을 문화재 탐방지로 알리기 위한 노력이 꾸준하게 이어졌다.

세계유산에 등재되기 위해서는 전 세계 국가들, 그리고 현재와 미래 세대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중요할 만큼의 특별한 문화적 또는 자연적 중요성의 가치가 있어야한다. 남한산성의 이러한 가치 도출을 위해 연구 주제별로 전문가들의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됐다. 남한산성의 숨겨진 역사와 가치를 정립하기 위한 학술 연구를 꾸준히 진행하고 연구총서를 발간하는 한편, 남한산성의 세계유산적 가치를 홍보하기 위한 전시회, 국제교류 등도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펼쳤다.

또한 남한산성 행궁을 정식 개방하고 시민들을 위한 다양한 역사문화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해 문화탐방지로 거듭났다. 세계 유산지인 안동하회마을 답사, 주민교양교육 ‘남한산성 비즈니스 잉글리쉬’와 같은 주민협력사업 또한 지속적으로 펼쳤다.

아울러 문화재 순찰반, 상시 보수반을 운영하고 목조 건축물 화재 대비 소방훈련을 실시했다. 이렇게 세계문화유산으로서 남한산성의 새로운 역사는 시작됐다.

남한산성은 2009년 2월 1일 잠정목록 등록 신청서를 제출해 2009년 6월 9일 우리나라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세계유산분과회의에서 잠정목록 후보로 결정됐다. 그 후 문화재청은 2009년 8월 31일 잠정목록 등록 신청서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에 제출했고, 이듬해 1월 11일 세계유산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잠정목록에 공식 등록됐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규정상 각 나라는 자국의 잠정목록 유산 가운데 매해 2건(자연유산 1건 포함)만을 선정해 세계유산 등재신청서를 제출해야한다. 2010년 당시 우리나라 잠정목록은 총13건이었다. 2011년 2월 8일, 문화재청은 이들 중 남한산성을 세계유산 우선 추진 대상지로 선정했다. 그로부터 세계유산 등재신청서를 작성하고 제출하기까지 2년이 걸렸다.

등재신청서는 해당 유산의 가치를 전달하기 위해 모든 근거 문서와 경계지도, 사료, 영상자료 등을 포함해야한다. 2013년 1월 25일, 남한산성 등재신청서는 문화재청과 외교통상부를 거쳐 프랑스 파리에 소재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에 제출됐다.

세계유산센터에 등재신청서를 제출한 각 국의 유산은 세계유산위원회가 지정한 유네스코 심사ㆍ자문기구에서 평가를 받는다. 남한산성은 서류심사와 별도로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전문가의 현지실사를 받았다. 2013년 4월부터 6월까지 두 차례 세계유산 전문가 초청 예비실사를 거쳐 보완한 뒤, 9월 1일부터 5일까지 ICOMOS 전문가 현지실사를 받았다. 실사는 남한산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나타내는 군사경관ㆍ통치경관ㆍ민속경관에 대한 설명회와 남한산성 종합상황실 등 유산의 보존관리 현황 전반에 대한 평가로 진행됐다.

이듬해인 2014년 4월 25일 ICOMOS는 남한산성의 세계유산 등재 여부에 대한 평가결과 보고서에서 ‘등재 권고’로 최종 평가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제출했다. 평가 결과를 보면, 남한산성은 동아시아에서 도시계획과 축성술이 상호 교류한 증거로서의 군사유산이라는 점, 지형을 이용한 축성술과 방어전술의 시대별 층위가 결집된 초대형 포곡식 산성이라는 점 등이 세계유산적 가치로 인정받았다. 또한 효과적인 법적 보호체계와 보존정책을 비롯해 현장에 상주하는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이라는 전문기관을 중심으로 한 체계적인 보존관리가 양호하다는 것도 좋은 점수를 받았다.

그해 6월 22일, 카타르 도하에서 낭보가 전해졌다. 38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남한산성의 세계유산 등재가 결정된 것이다.

▲ 남한산성 연주봉 옹성.

▲ 남한산성 남쪽 암문.

▲ 남한산성 수어장대.

▲ 남한산성 행궁.

▲ 남한산성 옛 지도와 네 개의 큰 문(원 표시).
남한산성은 서울 도성 밖 남쪽 한강을 자연 해자(垓字: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서 판 못)로 삼아 남한산 위에 세워졌다. 산꼭대기를 따라 쌓은 성곽은, 산 전체가 성벽구실을 했다. 해발 500m 높이에 세워진 성벽의 높이는 7.5m이고, 둘레가 11.76km에 이른다.

남한산성은 한강 이남을 방어하는 성곽 중 최고의 전략요충지다.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성벽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돼있다. 남한산성의 형태를 보면, 평지에 축성된 외국의 일반적인 성이나 선(線)의 형태로 축성된 중국의 만리장성과는 다르다. 또한 남한산성은 권력자나 주요 인물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유사 시 주변의 백성을 포용할 수 있게 설계ㆍ건축했다. 모든 백성이 왕과 함께 산성 안에서 적을 맞아 방어할 수 있게 시설을 갖춘 산상도시 개념인 것이다. 남한산성에는 남ㆍ서ㆍ북ㆍ동에 큰 문이 있다. 문마다 역할과 기능이 달랐다.

남한산성이 처음 축조된 것은 672년 신라 문무왕 때이다. 당시 신라는 중국 당나라와 국운을 건 싸움을 했다. 한강 유역을 방어하기 위해 이 성을 쌓았는데, 주장성(晝長城)이라 불렀다.

남한산성이 가장 큰 변화를 겪은 것은 1624년 조선 인조 때였다. 신라 시대 주장성의 성토를 따라 이뤄진 것으로 조선 시대 토목기술을 발현했다. 기존 성벽의 돌과 남아 있는 옛 돌을 재활용했다. 17세기 초 중국의 명ㆍ청 교체기에 청나라는 조선을 침략했고, 그 혹독했던 전장이 남한산성이다. 조선 시대 축성기술이 집약된, 더욱 견고하고 과학적인 성곽으로 완성됐다. 전쟁과정에서 노출된 각종 취약점이 보강되고 전혀 새로운 개념의 성곽 형태가 도입되기도 했다.

예를 보면, 성벽 위에 화포 공격에 효과적인 전돌(=높은 온도에서 구운 까만 벽돌)로 만든 여장(女牆: 몸을 숨긴 채 활이나 총으로 적을 공격할 수 있게 성 위에 낮게 덧쌓은 담)을 설치했다. 실전 경험을 토대로 비밀의 문도 16개 만들었다. 이를 ‘암문’이라 하는데, 병력과 물자의 비밀스런 이동을 위해 중축한 것이다. 수축(修築: 건축물을 고쳐 짓거나 쌓음)의 핵심은 옹성 신축과 포대 설치였다. 옹성(甕城)은 성문 밖에 반원형이나 삼각형으로 축성한 작은 성이다. 원래 성문을 보호하는 구조물인데, 남한산성의 옹성은 앞문을 내고 본 성 벽의 바깥쪽으로 길게 돌출시켜 벽을 쌓은 뒤 포대를 설치한 것이다.

성곽으로서 갖춰야할 군사업무를 위한 시설로는 장수들이 병사들의 훈련을 지휘하는 연무관이 설치됐다. 수어장대는 장대 다섯 곳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조선 시대 후기에는 남한산성을 둘러싸고 있는 봉우리마다 원거리 무기에 대응할 수 있게 성을 보강했다. 이로써 남한산성은 군사방어시설로서 국가의 위기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요새로 거듭난 것이다.

조선 시대 축성에서 주목할 점 또 하나는, 불교 승려들로 구성된 승병들이 축성을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축성과 수성을 담당했던 승병 사찰에서는 수륙제와 영산제 같은 불교의례가 지금도 전해온다.

남한산성에는 조선 시대 축성 때부터 주민 4000명이 거주했고, 그 역사는 300년이 넘는다. 그 특징은 군사와 행정을 수행하는 읍성과 도성의 기능을 함께 갖춘 점이다. 남한산성 안에는 행궁(行宮: 임금이 궁궐을 떠나 머물던 곳)이 있다. 인조 임금이 청나라의 침략으로 47일간이나 종묘사직(宗廟社稷: 왕실과 나라를 통틀어 이르는 말)을 지키며 항전을 거듭했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유사 시 종묘사직을 보관할 수 있는 왕궁으로서 기능이 부여된 것이다.

남한산성 사람들은 지금까지 옛 삶의 원형을 지키고 있다. 숭렬전에서는 백제 시조 온조왕과 조선 시대 축성 책임자 이서 장군에게 제향을 올리고 있다. 현절사는 청나라 침략 당시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했던 세 학자의 애국심을 기리기 위해 숙종 때 세운 사당인데, 이곳에서도 제향을 올린다. 민속신앙인 도당굿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청량당은 축성 당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을 위해 만든 것이다.

이렇듯 남한산성은 다양한 역사적 사료를 바탕으로 철저한 고증을 통해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참고자료·남한산성 |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 2014.12.29.> <사진출처·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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