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강화 유적 세계유산 등재 가능성 제고 방안③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역사ㆍ학술적 가치(상편)

<편집자 주> 강화도는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릴 만큼 역사문화 유적이 많다. 인천시는 강화의 역사문화 유적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기본계획을 지난해 11월 수립했고, 올해 1월 태스크포스(T/F)팀을 꾸려 세부추진계획을 수립,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을 본격화하고 있다. 강화의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 등재 대상은 관방유적(진ㆍ보ㆍ돈대 등)이다. 하지만 이러한 추진 상황을 인식하고 있는 인천시민은 많지 않다. 이에 <인천투데이>은 추진 상황은 물론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목적과 의의, 세계문화유산 선정 기준과 절차 등을 보도해 시민 관심도를 높이고자 한다.

아울러 현재 국내에선 서울 한양도성, 충남 공주ㆍ부여와 전북 익산의 백제역사유적지구 등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이에 타 지역의 추진 사례를 취재해 강화와 비교해보고, 이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 등의 등재 추진과정과 등재 후 관리방안 등을 취재해 강화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가능성을 제고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동시에 등재 후 관리방안 등 향후과제도 살펴보고자 한다.

[기획취재] 강화 유적 세계유산 등재
가능성 제고 방안

①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와 가치 재창조
② 강화 유적 세계유산 등재 추진, 어디까지 왔나
③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역사ㆍ학술적 가치(상편)
유정복 인천시장은 지난해 10월 시정 목표 실현을 위한 10대 핵심 추진과제 중 하나로 ‘강화도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을 제시했다. 그 이후 인천시는 두 차례의 학술회의 등을 거쳐 강화 유적 중 세계유산 등재 대상으로 사실상 해양관방유적(=진ㆍ보ㆍ돈대)을 결정했다. ‘강화도 해안 전체를 감싸는 성벽과 중요한 포대, 요새시설은 역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관방시설로 세계유산 등재 기준에 적합하고, 등재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면 강화의 해양관방유적은 어떠한 역사적ㆍ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먼저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자.

강화도는 고대 이래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해 관방시설이 구축됐고, 고려가 몽골과 전쟁하는 기간에는 임시 수도로서 역할을 했다. 이후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다양한 관방시설이 구축됐다. 특히 16세기 후반 이후 후금ㆍ청과 대외적 긴장관계 속에서 성곽과 진보(鎭堡), 돈대(墩臺) 등 다양한 관방시설을 갖췄다.

이근호 명지대학교 교수는 관방시설의 구축과 정비는 당시 방위전략의 변화와 관련 있고, 강화도의 해양관방시설은 16세기 후반 이후 조선의 방위전략 변모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물이라고 했다.

임진왜란과 강화도 보장처론

▲ 월곶돈대 안에 있는 연미정.
이근호 교수가 정리한 내용을 보면, 조선 건국 직후부터 강화도는 교동과 함께 나라의 문호(門戶)로 인식됐다. 예를 들어 1409년(태종 9년) 1월 경기수군절도사 최용화는 “강화ㆍ교동은 나라의 문호가 되므로[爲國門戶] 해구(海寇)가 기전(畿甸)을 넘본다면 반드시 이곳을 경유할 것”이라며 강화도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임을 지적했다. 세종대 후반 양성지(梁誠之)는 ‘비변십책(備邊十策)’에서 경기 지역 중 군사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경성과 개성부, 양주, 광주, 수원, 원평과 함께 강화도를 거론했다. 양성지가 강화도를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포함한 이유는 수로가 험한 지역적 입지에 주목한 것이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강화도는 다시 주목받았다. 전란에 직면한 조선 당국자들 사이에서 강화도는 요해처로 인식되며 방비 강화를 위한 대책이 제기됐다. 대표적 인물이 류성룡과 김응남이다.

류성룡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초기에 이미 강화도를 주목하고 세자를 강화도로 옮기자고 주장한 바 있다. 그는 고려의 역사적 경험을 거론하며 “남방의 군사와 의병들이 이곳에 집결했고, 또 충청과 경상, 전라와 경기 지역의 소식이 이곳으로 통한다”고 했다.

좌의정 김응남 또한 “강화는 하늘이 내려준 요새[天府之地 要害之處]”라며 대책 강구를 요구하면서 강화를 버리면 경성을 버리는 것이 될 것이라 했다. 왜군과의 전쟁 상황에서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다시 강조한 것이다. 이런 인식의 결과, 임진왜란 이후에 도성 수비를 위해 강화도 방비를 강화하기 위한 대책이 강구됐고, 강화도는 도성 수비를 위한 보장처(保障處)로서 위상을 갖게 됐다.

보장처란 동양의 고전적 병법 가운데 하나인 ‘퇴전(退戰)’을 위한 대비책이다. 퇴전이란 아군의 병력이 열세해 적과 대적할 수 없을 때 후퇴해 병력을 온전하게 보전하기 위한 전략이다.

보장처 강화론과 관방시설 구축

▲ 덕진진.
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선은 새롭게 성장하는 후금(나중에 청)으로부터 군사적 압력을 받았고, 이에 대한 대비책 마련이 필요했다. 화기 제작이라든지 성곽의 정비 등을 추진하는 한편 새로운 방위전략을 모색했는데, 그것이 수도권 중심 방위체제 구축이었다. 17세기 전반기 수도권 중심 방위체제는 일단 수도 외곽 지역인 보장처의 강화로 나타났다. 당시 보장처로 남한산성과 함께 주로 거론된 곳이 강화도이다. 강화도는 ‘급하고 어려울 때 병화를 피할만한 곳[爲急難避兵之所]’으로 거론됐다. 실제로 정묘호란 때 인조가 강화도에 상주하기도 했다.

광해군때 이후 방위전략이 수도로 집중되며 강화도의 보장처 강화는 힘을 받아 추진됐고, 이때 관방시설에 대한 대책도 강구됐다. 1614년(광해군 6) 7월 강화부사 이정표는 국왕에게 ‘강화도는 하삼도의 통행 선박과 상선의 왕래가 끊이지 않고 있으며 어느 곳에나 정박한다’며, 이를 관리하기 위해 선박이 정박하는 곳에 목책(木柵)을 세울 것과 병선의 준비를 건의함과 동시에 덕진진(德津鎭) 복설과 승천부(升天府, 昇天府)와 고암(羔巖), 갑곶진(甲串津) 등에 진(鎭)을 설치할 것을 건의했다.

덕진진은 강화도 남쪽에 위치한 진보로, 유근이 경기 감사에 재직할 때 설치했다고 한다. 즉 임진왜란 기간에 설치됐다가 이후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이정표가 복설을 주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승천부는 강화도의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고려조에 이미 군영이 설치됐던 곳이다. 하지만 이정표 건의가 당국에서 논의되긴 했으나, 진을 설치하지는 않았다.

강화도의 관방시설 정비는 인조때 이후 다시 거론됐다. 특히 1631년(인조 9) 강화도의 관방시설 정비 논의가 집중됐다. 조선과 후금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면서 조선 당국은 대비책 마련이 절실했다. 당국은 1631년(인조 9) 7월 강화읍성과 갑곶성을 개축해 만전에 대비하라고 지시했고, 같은 해 8월 3일 강화유수 이시백과 이서, 김자점 등이 국왕과 같이한 자리에서 강화도의 식량과 군기(軍器) 등을 점검하는 한편 갑곶에 축성하는 문제와 연미정(燕尾亭)에 보루를 쌓는 문제를 논의했다. 인조는 강화도의 사방을 둘러 보루(堡壘)를 쌓고 곡식을 비축하자는 안을 제시했고, 이는 후일 돈대의 설치로 완성됐다.

보장처 강화 차원에서 이뤄진 강화도 관방시설 정비 중 주목되는 것은 진보(鎭堡)이다. 진보의 정비는 주로 효종과 현종때에 이뤄졌다. 이 시기 진보의 정비는 북벌이념 구현을 위한 현실적 대책이라는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 초지진.
효종 이후 진보 정비의 방향은 다른 지역의 진을 강화도로 이설하거나 신설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월곶진 설치 등을 시작으로 1706년(숙종 32) 선두보(船頭堡 또는 船頭浦堡)를 설치함으로써 모두 ‘13진보(鎭堡)체제’를 갖췄다. 강화도의 진보체제는 ‘12진보체제’로 명명됐다. 2000년에 간행된 강화군과 육사박물관 공동 조사보고서인 ‘강화도의 국방유적’에서는 12진보, 54돈대, 8포대라 했다. 12진보체제로 규정한 것이다. 12진보라 한 이유는 문수진(文殊鎭)을 생략했기 때문인데, 문수진은 현재의 김포에 위치했기에 김포의 관방시설로 분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후기 강화도의 진보를 정리한 ‘여지도서’나 ‘강화부지’ 등에서는 문수진을 포함해 13진보체제로 설명하고 있다. ‘대동지지’에서는 문수진을 제외했고, ‘영조실록’에서는 13진보라 했다.

진보 설치와 함께 주목되는 것이 숙종 초의 돈대(墩臺) 설치이다. 돈대는 적을 경계하고 방비하기 위해 행성(行城)이나 해변 등에 설치한 소규모 방어시설이다. 돈대는 성곽에 부수적으로 설치된 포루와 치성 등에 비해서 성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 성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축조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또한 돈대는 돈대 사이에 거리가 멀지 않아 유사시 인근 돈대와 연락이 용이하며 인접 돈대와 교차 사격이 가능하게 포를 배치해 접근하는 적선을 제압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숙종 초 돈대의 설치는 당시의 불안한 대외 정세에 기인한 바 크다. 당시 청은 국내 저항 세력의 평정에 주력했고, 조선에 병력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조선에서는 명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우며 형세를 관망하자는 의견이 주류를 이뤘다. 그러면서 자강(自强) 대책으로 북한산의 축성과 강화도 관방시설 축조를 논의했다. 대외적인 불안정성을 해소하기 위한 차원에서 돈대를 축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돈대는 적에 대한 사전 경보를 목적으로 해변에 일정한 거리마다 설치한 독립된 경보 시설의 하나였다. 조선에서 돈대는 1638년(인조 16) 남한산성의 옹성을 증축할 때 적용하기도 했다. 이것이 숙종 초 강화도 관방시설을 강화하면서 그대로 적용돼 돈대 약 48개가 설치됐다. 당시 조성된 돈대의 반이 넘은 27개소가 설치된 방향은 강화도의 동북 지역인 염하(鹽河)와 조강(祖江) 연안으로, 돈대 축조의 목적이 육지로부터 강을 건너오는 외적 방어에 주목적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17세기 이래 진보의 신설 혹은 이설과 돈대의 축조 등으로 강화도의 해양 관방시설 정비는 일단락됐다.

▲ 광성보.

▲ 미루지돈대.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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