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이 만난 사람] 이자순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할머니(하)

<편집자 주> 올해는 광복 70년이자 분단 70년인 해다. 조선을 식민통치한 일본으로부터, 1945년 3.8도선 분단에 합의한 당사자인 미국과 옛 소련으로부터, 어떤 책임 있는 말도 듣지 못했다. 아베 정권은 오히려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사람들에게 손해와 고통을 준 것을 반성하고 사과’한 ‘무라야마 담화’를 부정하고 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제국주의는 전쟁 물자가 부족해지자 군수품 생산을 위해 반강제적으로 조선의 어린 학생들을 끌고 가 혹독하게 일을 시켰다. 이 어린 학생들을 ‘근로정신대’라 하는데, 생존한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은 1992년부터 일본 군수회사를 상대로 일본에서 소송을 진행했지만 1·2차 모두 기각됐고, 현재는 한국에서 소송 중이다.

이 소송에 함께 하고 있는 이자순(83·사진) 할머니를 그가 살고 있는 계양구 작전동에서 만났다. 이 할머니는 현재 인천에서 유일하게 소송단에 참가해 태평양전쟁 피해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호에 이어 이번 호에 이자순 할머니의 인터뷰를 마무리한다.

해방 후 조선으로 돌아온 일본 거지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일제로부터 해방됐지만 근로정신대 소녀들은 후지코시 공장에서 계속 일했다. 일을 덜 시키긴 했지만 여전히 배고픔과 감시에 시달렸다.

이자순 할머니는 일본에서 병을 앓았다. 머리가 빠지고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가니 장티푸스라 했다. 그러나 격리하지 않아, 예전처럼 군산에서 온 사람들과 한 방에서 지냈다. 병에 걸려 몸이 아픈 것보다 더 참기 어려운 건 배고픔이었다.

1945년 10월, 군산에서 한 학부모가 일본에 왔다. 해방이 됐는데도 딸이 돌아오지 않자 데리러온 것이다. 귀국길은 그 학부모와 군산에서 근로정신대의 일본행을 안내한 오사다 선생이 앞장섰다.

“도야마에서 오사카로 갔어. 오사카에 도착해 노숙을 했지. 오사카에서 어느 항구로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배를 타고 부산으로 왔어. 부산에 도착하니 한복을 입은 부인회 엄마들이 울면서 우리를 맞이해주셨어. 주먹밥을 줬던 기억도 나네”

이 할머니는 다음날 부산에서 군산가는 기차를 탔다. 가족이 충남 두계로 이사를 가, 군산에 도착한 할머니는 언니 친구네서 잤다. 다음날 아버지를 따라 두계로 갔더니 식구들이 ‘일본 거지가 왔다’고 말할 정도였다.

70년 전 억울함 풀기 위해 나서다

▲ 이자순 할머니와 그의 남편 김보준 할아버지.
1946년, 아버지는 자녀들 교육을 위해 다시 군산으로 이사했다. 이 할머니는 군산여고를 다니면서 남편 김보준 할아버지를 만나 연애했다. 고교를 졸업하고 간호사로 사회활동을 조금 하다가 결혼했다. 미군부대 PX(면세점)에서 근무하는 남편을 따라 파주로 와 아들 넷을 길렀다. 1989년, 계양구 작전동으로 이사 해 26년째 살고 있다.

근로정신대로 강제 동원된 피해자들은 귀국 후 결혼생활이 순탄하지 않았다. ‘정신대’를 ‘위안부’와 동일시하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이 할머니는 불행 중 다행이었다.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데, 대동아전쟁 피해자 배상을 해준다는 광고를 보고 신청하러 계양구청에 갔지. 신청서를 썼더니 접수증을 주더라고. 그리고 얼마 있다가 춘천에 산다는 어떤 이가 내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를 했더라고”

연락한 이는 후지코시를 상대로 소송을 낸 이복실 할머니였다. 이복실 할머니는 근로정신대로 강제 동원됐던 29명을 대표해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했다. 이 소송이 계기가 돼 이자순 할머니는 일본을 몇 차례 가기도 했고, 주한 일본대사관이나 법원을 다녔다. 다리가 아픈 이 할머니를 대신해 남편 김보준 할아버지가 참가하기도 했다. 70년 전의 억울함을 뒤늦게나마 풀기 위한 걸음이었다.

후지코시 주주총회에 참가하기도

“일본에서 기자회견도 많이 했어. 일본인이 김치를 좋아하는데 우리가 담가 가기도 하고, 일본에는 굵은 소금이 없어 두 가마니나 비행기에 싣고 가 일본에서 김치를 담그기도 했지. 그걸 일본인한테 팔아 기금을 마련했어. 후지코시 주주총회에도 참석했는데, 총회에서 근로정신대 얘기하지 말라고 해, 내가 손들고 말했어. ‘후지코시가 이렇게 큰 데는 근로정신대가 있어서 가능한게 아니냐? 사장에게 열세 살 딸이 있다면 근로정신대로 보낼 거냐?’고 물었더니, ‘그런 얘기 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고”

지난해 2월 19일, 후지코시 정기 주주총회에서 의장인 혼마 사장에게 후지코시 소송의 원고와 소송지원단 주주가 항의하자, 앞줄에 앉아있던 일본인 주주는 ‘조선으로 돌아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원고와 소송지원단은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어 ‘헤이트 스피치(=혐오 발언)’를 규탄하고 다음날 후지코시 정문 앞에서 항의집회를 열기도 했다.

“내가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을까 싶어. 일본도 혼자 가고, 주주총회에서 손들고 얘기도 하고. 그때는 진짜 용기가 있었지”

199엔 던져준 일본정부, 강제동원 시인한 셈

1992년 9월,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강제동원 피해자 세 명은 후지코시를 상대로 일본에서 소송을 청구했다. 일본 법원은 1심과 2심에서 기각 결정했다. 그러나 2000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선 피해자들에게 합의금을 지급했다. 작은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피해 할머니들이 조금씩 용기를 내기 시작했고, 2003년 4월엔 할머니 23명이 미지급 임금 등 손해배상 청구 2차 소송을 진행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일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상실됐다’는 이유로 최고재판소에서도 기각됐다.

2013년 2월, 피해자 13명과 유가족 18명은 서울중앙지방법원에 후지코시를 상대로 총17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해 10월 30일, ‘피해자 1인당 8000만원 내지 1억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피고가 거짓말로 나이 어린 여학생들을 속여 근로정신대에 지원하게 하거나 강제 징용해 위험한 노동에 종사하게 한 것은 일본의 불법 식민 지배와 침략전쟁 수행과 직결된 반인도적 불법행위”라며 “이로 인해 원고들이 받았을 고통을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후지코시는 이를 불복해 항소했으며, 현재 2심이 진행 중이다.

올해 2월 4일, 일본연금기구는 1944년 5월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로 동원된 근로정신대 피해자 할머니 세 명에게 후생연금 탈퇴수당으로 199엔(한화 1854원)씩을 지급했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은 일본의 후생연금이 1944년 10월 1일부터 의무화된 것으로 보고, 이 피해자들이 1945년 10월 21일까지 1년 이상 근무해 지급 규정을 충족한 것으로 판단해 후생연금 탈퇴수당을 신청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70여년이 지난 지금의 화폐 가치를 반영하지 않았다. ‘시민모임’은 “일제의 혹독한 식민 지배를 받았던 한국 강제동원 피해자의 처지를 깡그리 무시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기만적인 후생연금 지급 결정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일본 쪽이 그동안 부인했던 강제동원 사실을 우회적으로 인정한 셈이 됐다. 후생연금 탈퇴수당 지급은 피해자들이 근로정신대로 강제 노역을 했다는 것을 일본 정부가 객관적으로 시인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둘째, 일본 정부가 부정한 개인청구권의 유효성을 스스로 인정한 꼴이다. 탈퇴수당 지급으로 개인청구권은 법적 근거를 확보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라는 게 있느냐는 질문에, 이자순 할머니는 “지금 재판하고 있는 게 원만하게 끝났으면 좋겠어. 우리가 고생한 만큼 배상을 받으면 좋지. 다른 지역은 조례를 만들어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하는데, 인천은 나 혼자라 못하고 있어. 내가 구청에 신청할 때 다른 사람이 신청하는 걸 봤어. 인천에도 분명히 피해자가 있을 텐데, 사람을 찾고 싶어”라고 말했다.

현재 광주ㆍ전남ㆍ서울ㆍ경기는 ‘일제강점기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지원 조례’를 제정해 매달 생활보조금과 진료비 일부를 지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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