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이 만난 사람] 이자순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할머니(상편)

<편집자 주> 올해는 광복 70년이자 분단 70년인 해다. 조선을 식민통치한 일본으로부터, 1945년 3.8도선 분단에 합의한 당사자인 미국과 옛 소련으로부터, 어떤 책임 있는 말도 듣지 못했다. 아베 정권은 오히려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사람들에게 손해와 고통을 준 것을 반성하고 사과’한 ‘무라야마 담화’를 부정하고 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제국주의는 전쟁 물자가 부족해지자 군수품 생산을 위해 반강제적으로 조선의 어린 학생들을 끌고 가 혹독하게 일을 시켰다. 이 어린 학생들을 ‘근로정신대’라 하는데, 생존한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은 1992년부터 일본 군수회사를 상대로 일본에서 소송을 진행했지만 1·2차 모두 기각됐고, 현재는 한국에서 소송 중이다.

이 소송에 함께 하고 있는 이자순(83·사진) 할머니를 그가 살고 있는 계양구 작전동에서 만났다. 이 할머니는 현재 인천에서 유일하게 소송단에 참가해 태평양전쟁 피해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이 할머니의 인터뷰를 정리해 두 차례에 나눠 싣는다.

감언이설에 속아 근로정신대 지원

▲ 근로정신대로 동원돼 일본 후지코시 군수공장에서 일했던 이자순 할머니.
“5~6년 전인가? 신문에서 태평양전쟁 피해자를 배상한다는 것을 보고 계양구청에 가서 신청했지. 그때 나 말고도 누군가 신청한 기억이 나는데, 인천에서 활동하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어”

충남 논산이 고향인 이자순 할머니는 1남 5녀의 둘째로 태어났다. 자식들을 교육시키겠다는 의지가 강한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군산으로 갔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 할머니는 고등과에 진학했다. 고등과란 중등과정인 여학교에 입학하기 전의 2년제 과정이다. 고등과 1년인 1945년 2월, 일제는 근로정신대를 대대적으로 모집했다.

“일제강점기엔 일곱 살에 학교를 들어갔으니까 내 나이 열세 살이었지. 우리 학년과 6학년 후배들을 합해 군산에서 50명을 모집했어. 전북 차원으로는 200명이 일본에 갔지. 고등과 1학년 학생들을 강당에 모아놓고 근로정신대 홍보영화를 보여줬는데, 우리를 꼬시려고 얼마나 화려하게 만들었겠어? 우리 친정아버지가 당시 군수공장을 운영해 우리는 먹고 살기 어렵지 않았어. 그런데 일본인 교장이 근로정신대로 가면 거기서 공부하고 꽃꽂이도 배울 수 있다고 얘기했어. 어린 학생들이 홀딱 반할만할 정도로 화려하게 만든 홍보영화를 보고 나도 지원했어”

이를 안 친정아버지는 딸이 혼자 결정한 것을 혼내고 학교에 찾아가 취소하려했다. 그러나 교장은 한번 신청하면 돌이킬 수 없다고 했다.

열세 살 소녀, 현해탄을 건너다

고등과 1학년 담임인 일본인 오사다 선생이 군산 소녀 50명을 일본으로 데려갔다. 오사다 선생은 키가 작은, 전형적인 일본인 외모의 소유자였다. 이 할머니는 그의 이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이 할머니는 군산역에서 대대적인 환송식을 한 걸로 기억한다.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고, 부산에 도착한 날은 정월대보름이었다.

“날짜를 기억하는 건 보름 전날에 군산에서 떠났고, 하루 걸려 부산에 도착한 날이 보름이었어. 그때 일본 가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부산으로 모였어. 부산에서 또 하루를 자고 다음날 연락선을 탔지. 배를 타려고 발 아래 바닷물을 보는데, 굉장히 무서웠어. 배를 타고 가는 중에도 방공훈련을 계속 했어. 지하 칸에 타고 있는 사람이나 3층 객실에 타고 있는 사람이나 모두 난간으로 나왔지. 배 위로 비행기가 뜨면 난간에 엎드리곤 했는데, 멀미한 동료들은 아무것도 못 먹었지”

그렇게 또 배에서 하루를 보내고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했다. 또 기차를 탔다. 닷새 만에 도착한 곳이 도야마에 있는 후지코시 군수공장이었다.

‘나치-후지코시’ 군수공장, 기업 이름에 전쟁 일으킨 장본인의 흔적이

▲ 이자순 할머니와 남편 김보준 할아버지.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4년 8월, ‘여자정신대근로령’이 시행되면서 10대 초ㆍ중반의 여학생들에게 일본인 교장과 담임교사가 지원을 종용했다.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으며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고 ‘사기’치면서.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동원된 곳이 한반도와 일본의 군수공장인데, 한반도는 대표적으로 평양 조병창과 가네가후치 방적공장이다. 일본은 도쿄아사이토 방적, 미쓰비시 중공업, 후지코시 공장이다. 도쿄아사이토와 미쓰비시는 각각 300여명, 후지코시는 1000명이 넘는 어린 여학생이 동원된 것으로 확인됐다.

후지코시는 1928년 도야마시에서 창업했다. 처음엔 기계공구 제조사였지만 나중에 항공기나 군함 등의 부품을 생산하면서 군수공장으로 변했다. 전쟁 말기, 일본제국주의 입장에서 전황이 악화되면서 후지코시는 부족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의 소녀들을 징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군부에 로비했다. 조선인 여자 징용노동자 수로는 전국 최대 규모였다.

후지코시 상표인 ‘NACHI(나치)’는 쇼와 일왕이 타고 다닌 배 이름이다. 현재도 기업 로고보다 나치라는 상표가 더 강조돼, 회사 이름이 ‘나치-후지코시’라 불린다. 기업 이름에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다.

배고픔이 가장 서러웠다

한 사람당 다다미 한 장을 배당받은 숙소에서는 한 방에 군산에서 온 50명이 함께 생활했다. 저녁이면 모두 고향 쪽을 바라보고 부모님을 생각하며 고개 숙여 ‘안녕히 주무시라’ 인사했다.

도야마에 도착하고 한 달간은 매일 군사훈련만 했다. 오전 7시에 일어나 군복을 입고 체조나 제식훈련만을 했다.

“한 달 훈련이 끝나고 나는 체구가 작아 베어링 연마 부서에 배속됐어. 동그란 다마(=베어링)를 빼빠(=사포)로 힘주어 눌러 반짝이게 깎는 일이었지. 키가 큰 여학생은 기계를 깎는 일인 남자들 부서에서 고생이 많았지. 공습경보가 하루에도 부지기수로 울려. 일하다가도 도망을 가야해. 저녁에 잘 때도 옷을 다 입고 배낭을 옆에 두고 잤어. 언제 공습경보가 날지 모르니까 말이야. 한번은 경보가 울리는 것도 모르고 내가 곯아떨어졌나봐. 동료가 깨우긴 했다는데, 급하니까 그냥 나를 놔두고 나갔지. 용케 폭격을 안 당해 살았지. 일하면서도 수시로 폭격소리가 났어. 후지코시 군수공장을 폭격한다는 게 시내를 폭격해, 시내가 다 불에 타는 걸 본 적도 있어. 우리는 경보가 울리면 도야마 시골로 무조건 뛰어가. 오이나 감자밭에 숨어 있다가 배고파 오이를 따 먹기도 했지”

공습경보보다 더 무서운 게 배고픔이었다. 아침은 된장국에 단무지와 한 공기도 안 되는 밥이 나왔다. 점심으로는 삼각빵 세 개를 줬다. 아침밥도 부족한 상태라 빵을 아침에 다 먹었다. 같이 일한 일본 여학생들이 불쌍하다며 가끔 음식을 주기도 했다. 어린 소녀들은 모여 앉아 울었다. 고향에 편지를 썼다. 보고 싶다는 말보다 미숫가루를 보내달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어린 학생들은 배가 고파, 고향에서 가져간 옷을 팔기도 했다. 전쟁 때라 옷이 귀했다. 도야마 시골 사람들에게 옷을 주면 노란 콩을 줬다. 그걸 볶아먹으며 주린 배를 채웠다. 그래도 배가 부를 리 만무했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떨어진 감을 주워 먹었는데, 먹다 걸리면 혼났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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