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때 남자 집부터 가는 게 뭐가 당연한 거냐? 그런 건 누가 정해 놓았냐?”
KBS2 주말 연속극 ‘소문난 칠공주’의 셋째딸 미칠의 대사다.

철딱서니 없고 허영에 가득한 미칠의 입에서 오래간만에 옳은 소리가 나오니 귀가 솔깃하긴 한데, 기분이 영 찜찜하다.

‘여자가 잘 들어와야 집안이 산다’ ‘여자 하나 잘못 들어오면 집안 망한다’ ‘시집온 지 얼마나 됐다고 친정을 드나드냐’ ‘시집가면 남이다’ ‘요즘 여자들 시어머니 귀한 줄 모른다’ ‘하늘같은 남편이 어디서 그냥 떨어졌느냐’ 줄줄이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구시대적인 대사로 방송 시간을 채우는 드라마에서, 그것도 가장 철딱서니 없는 이기주의자로 그려지는 미칠의 입을 통해 이 대사가 나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드라마의 작가는 이 땅의 며느리들이 하고 싶었던 말을, 가장 설득력 떨어지는 캐릭터 미칠의 입을 통해 내뱉음으로써, 며느리들이 명절 때면 한번쯤 해보는 상상 ‘친정부터 가도 되지 않을까?’를 일거에 ‘생각 없는 말, 속아지 없는 말’로 단정짓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래서 미칠의 대사를 들으며 ‘그래, 그래’ 끄덕이기보다는 마치 내가 비웃음을 당하는 듯, 찜찜한 기분이 먼저 들었을 것이다.

이번 추석은 국군의 날에 개천절까지 더해져 징검다리 연휴라고, 길게는 열흘씩 쉰다고 신문방송이 떠들어댔지만, 맞벌이를 하는 우리 부부는 까만 날짜에는 다 출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여느 명절 연휴보다 짧은 추석연휴였다.

연휴의 앞이 짧다 보니 한번 가려면 기본 대여섯시간, 오래 걸릴 때는 열시간도 넘게 걸리는 시댁 가는 길이 만만치가 않았다. 추석 몇 주 전 시어머니께 사정을 말씀 드렸더니 어머님이 이번 추석은 그냥 쉬라고 하셨다. 대신 가까운 친정에 가서 오랜만에 효도나 하고 오라는 말씀을 덧붙이시며.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번 연휴 초반 서해대교 교통사고 뉴스를 보셨는지 시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것 봐라. 안 내려오길 얼마나 다행이니. 큰일 날 뻔했다”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렇게 시어머니의 따뜻한 배려로 이번 추석은 친정에서 보냈다. 오랜만에 오빠와 언니들을 만나 회포를 풀며 어느 해 명절보다도 즐겁게 보냈다.

대신 다음 설에는 친정에 가지 못하더라도 길게 시댁에 있을 생각이다. 시어머니 말벗도 해드리며 진심으로 잘 지내다 오고 싶다. 설사 친정에 못 들르더라도 전혀 서운하지 않을 것 같다.

명절의 가장 큰 의미는 세상살이로 바빠서 소원해진 가족친지들의 만남일 것이다. 오로지 시댁만, 시댁 먼저, 라는 구시대적 강요보다는 사정에 맞게 진심 어린 만남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현명한 것 아닐까? 그래야 며느리도 기쁘게 시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임은숙(산곡3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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