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람] 황안나 도보여행가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70세를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 줄여서 ‘종심’이라고 했다. 부평에서 20년 넘게 살고 있는 황안나(75ㆍ사진) 도보여행가를 부평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가슴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

▲ 황안나 도보여행가
“어제도 형제자매들이랑 근교에 있는 산에 다녀왔어요. 70대가 두 명, 60대가 네 명, 막내 동생이 58세예요. ‘이동 경로당’이죠(웃음)”

황씨는 1940년 황해도 개성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아래로 동생이 다섯이나 된다. 몇 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2년 8개월간 병석에 계셨는데 형제들이 손수 돌볼 만큼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두텁다고 했다.

“돌아가신 엄마가 저한테 형제끼리 우애 있게 지내라고 부탁했어요. 형제끼리 잘 지내는 게 당신한테 잘하는 거라고 늘 말씀하셨죠. 돌아가시기 전부터 형제들끼리 산을 다녔는데 올 가을엔 지리산을 종주하기로 했어요”

홍영녀. 그의 어머니 이름이다. ‘계집애는 공부를 안 시킨다’는 외할아버지의 고집으로 한글도 모르던 어머니가 ‘종심’의 나이에 한글을 배웠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손자가 공부하는 걸 어깨너머로 익힌 것이다. 맞춤법이 엉망이지만 어머니는 글을 익힌 후로 매일 일기를 썼고, 그 일기장을 어느 날 친정에서 황안나씨가 발견했다.

‘고무신을 닦아 햇볕에 내놓았다. 어디 가질 앉(않)으니 신어보지도 앉(않)고 또 닦게 된다’

“경기도 포천에서 혼자 지내셨는데, 뽀얗게 닦아서 햇볕에 내놓은 고무신을 어디 가질 않아 신질 못하니까 먼지가 끼어 또 닦게 되잖아요. 그걸 읽고 얼마나 울었는지. 아버지 돌아가시고 얼마나 외로우셨겠어요?”
황씨는 어머니의 일기 중 다른 문장 하나를 더 들려줬다.

‘창밖에 부는 바람, 죽음의 신음소리도 들었을 것이고 갓 태어난 아이의 울음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바람을 떠올리며 생과 사를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읽으며 황씨는 울었다고 한다. “엄마의 팔순잔치에 오시는 분들께 일기 열 권을 책 하나로 묶어서 드렸어요. 책 제목은 ‘가슴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정년을 앞두고 사직서를 내다
1998년, 초등학교 교사였던 황씨는 정년을 8년 남겨두고 느닷없이 ‘나 하고 싶은 걸 하자’는 생각을 하고 사직서를 냈다.

“뭘 하겠다는 계획보다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른 상태였는데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을 하고 싶었어요. 학교 그만두고 하고 싶은 걸 다해봤어요. 문화센터도 다녔는데 ‘라틴 댄스반’에 등록했죠. 후배 선생들한테 자이브ㆍ차차차ㆍ룸바도 춘다고 했더니 뒤로 자빠지는 거예요. 그만큼 저에게는 생뚱맞은 거였죠”

황안나씨의 본명은 황경화다. 안나는 세례명이자 필명이다. 광복되던 해 아버지를 따라 월남해 1959년 춘천사범학교 졸업 후 경기와 인천 지역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박봉으로 가정을 꾸려 나가는 아버지의 권유로 교사가 돼 동생들의 학비를 댔다. 23세에 결혼한 황씨는 남편의 사업이 잘되지 않아 빚 갚기에 바빴다. 이런 생활을 30년 가까이 했다.

그러다 사직서를 낸 후 도보여행가로 제2의 삶을 시작했다. 지리산ㆍ한라산 등 국내의 유명산 종주는 물론 몽골ㆍ바이칼ㆍ캄보디아ㆍ베트남ㆍ인도ㆍ네팔ㆍ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등을 도보로 여행했다. 65세 때 해남 땅끝마을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를 23일 동안 도보로 완주했고, 2년 뒤 동해~남해~서해까지 해안선을 따라 4000㎞를 홀로 걸었다.

여행에 대한 이야기, 삶의 철학을 녹여 그동안 ‘내 나이가 어때서’, ‘안나의 즐거운 인생비법’, ‘엄마 또 올게’ 등 책 세 권을 출간했다. 올해 책 두 권을 출간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그를 소개할 때, 도보여행가가 맞는지 작가가 맞는지를 물었다.

“옥천 시민회관에서 중ㆍ고등학생과 옥천군 직원을 대상으로 강연한 적이 있어요. 강연장 입구에 ‘황안나 작가님 초청강연회’라고 적혀 있는데, 민망했죠. 감히 작가라는 호칭은 남의 이름 빌려 쓰는 거 같아서 불편합니다. 등단작가의 길은 피눈물 나는 가시밭길인데, 겸손이 아니라 아무한테나 작가라는 호칭을 쓰면 안 됩니다. 저는 도보여행가라는 호칭만으로도 과분해요”

황씨는 학창시절 지독한 책벌레였다고 한다. “제가 학교 다닐 때는 전쟁 직후라 다들 어려울 때였죠. 학급에서 자신의 돈으로 책을 사는 사람이 없었어요. 누가 책 한 권을 갖고 오면 전 학급의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봤어요. 시험기간에는 회전이 멈췄는데, 그때는 모든 책이 내 차지였죠”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다고 말하는 황씨는 소화도 못시키면서 봤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좁은문’, ‘일리아드 오디세이’ 등을 제목으로만 기억하고 있다. ‘소녀경’, ‘금병매’ 등 중국 금서들도 읽었다고 한다.

상처를 주는 것도 치유하는 것도 사람

▲ 황안나 도보여행가
황씨는 본인의 성격을 소심하고 우유부단하다고 했다.
“여행은 다리 떨릴 때 가지 말고 가슴이 떨릴 때 떠나라는 말이 있잖아요. 제 경우엔 65세에 나 자신을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간절한 갈망이 있었어요. 그 전에는 가슴 떨릴 시간이 없었는데, 농축돼 잠자고 있었나 봐요. 땅끝마을이라는 지명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가보고 싶은 거예요. 한비야씨가 걸었다는 토말마을에서 고성 통일전망대까지를 똑같이 걷고 싶었어요. 왜 갔냐고 물어보는데, 이유가 뭐가 있어요. 그냥 가고 싶었지요. 한비야씨는 40일이 걸렸다는데, 그 정도 여행하려면 백수라야 가능하잖아요. 친구들한테 얘기하면 미쳤다는 말을 들을 게 뻔해 숫제 얘기를 안 했어요. 남편도 직장이 있으니까 안 되고요. 혼자 가려고 한 게 아니라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혼자 갔습니다”

그 전까지 친구나 동료, 가족 등 동행이 있는 여행만을 한 황씨는 계획을 세우고도 남편이 말려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두려웠다고 한다.

“산악회 사람들이 제가 혼자 여행을 갈지, 안 갈지 내기를 했다고 해요. 사람들한테는 제가 소심하고 겁이 많은 사람으로 알려졌거든요. 그리고 저 같은 길치가 없어요. 부평전통시장에 가면 다른 사람들이 절 데리고 다녀야할 정도로 길눈이 어두워요. 한번은 서울 교보문고 커피숍에서 <한겨레> 기자하고 인터뷰를 하다가 화장실 다녀와서 길을 잃은 적도 있고요”

그러나 길을 떠나면 세상은 따뜻하고 용기를 준다고 했다.
“상처를 주는 것도 사람이지만 그 상처를 치유하는 것도 사람이잖아요. 이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다는 걸 새삼 또 깨닫게 되더라고요. 길에서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았어요”

첫 국토종단은 23일 만에 끝냈다. 목적지인 통일전망대에 올라 하얀 포말을 만드는 파도를 보며 ‘만약 통일이 됐다면 여기서 멈췄을까? 신의주까지 올라갔겠지’라고 생각하며 조만간 다시 여기서 출발해 동해, 남해, 서해를 일주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저는 또 다른 길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우물 안 개구리였던 제가 미지의 땅에서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 가보지 못한 곳과 마주하며 호기심이 엄청 생겼어요. 할머니 혼자 동행자 없이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이렇게 해낼 수 있다는 성취감으로 행복했어요. 다시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죠”

길에서 길을 찾다

“길을 걷는다는 게 인생하고 똑같아요. 길을 걸으면서 얼마나 시행착오를 많이 했겠어요? 실패 안 하는 인생이 어디 있나요? 길을 잘못 찾아가면 두 배 이상의 고생을 하죠. 목표지점까지 못가면 일정에 차질이 생겨 시간 더 걸릴지 모르지만, 대신 좋은 사람을 만나 도움 받고 좋은 곳을 갔어요”

해안일주 할 때의 경험이었다. 한번은 길을 잘못 들어갔는데 혼자 사는 할머니를 만났다. 그 집에서 자고 먹고 편하게 지내다 다음날 떠나는데 밥까지 싸주었다. 또 한번은 이름도 모르는 포구에서 길을 헤매다가 마당까지 바닷물이 들어온 아름다운 곳에 이르렀다.

“인생에서도 100% 실패는 없어요. 거기에서도 얻는 게 있죠. 성공에 도달하지 못했을 뿐이지 실패도 좋은 밑거름이라는 걸 알았어요. 길은 스승이에요. 저는 길에서 길을 찾습니다”

인생은 갈등의 연속이라고 한다. 모든 순간, 선택을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스트레스를 받는다.
“눈만 뜨면 갈등의 연속이 아닐까요? 자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도 고민하고 갈등하잖아요. 저는 부부싸움하고 나서 속상하면 부평공원을 한 시간 정도 걸어요. 걷다보면 생각하고 나를 돌아봐요. 왜 싸웠지. 남편이 열 번 잘못하더라도 내가 전부 잘한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싸웠을 때의 감정도 수그러들고요”

황씨는 걷기와 자기성찰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했다. 결정을 못 내린 게 있거나 원고가 잘 안 써지면 걷는단다.

‘진정 위대한 모든 생각은 걷기로부터 나온다’라는 니체의 명언이 있다. “맞아요. 저도 걷다보면 생각이 흐르고 실마리가 풀려요. 길은 스승이고 인생과 정말 닮아 있어요. 걸으면 걸을수록 길에 빠져듭니다”

황씨는 1차 국토종단 때는 새와 꽃, 바람소리 등 자연과만 교감했고 낯선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진정한 여행은 사람을 만나는 여행이라고 강조한다.

“해외여행을 갈 때 유명한 건축물을 눈으로 보는 여행은 하지 말아요. 보는 것보다 느끼는 여행이 참 여행인 것 같아요. 제가 해안을 일주할 때 절경을 많이 봤는데 그건 기억이 별로 안 나고 길에서 만난 사람을 잊을 수 없더라고요. 이번에 준비하는 책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황씨는 7월 27일 오후 8시, <KBS> 1TV 강연 ‘백도C’에 출연한다. 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에서 주최하는 ‘2014 인천인문학 콘서트’ 5강의 강사로도 선다. 10월 16일 오후 7시 30분에 부평아트센터 호박홀에서 하는데, 메모해두었다가 찾아가 봐도 좋겠다. 참가비는 없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