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람] 영종도에 사는 만화 고수 한창기씨

음악ㆍ영화ㆍ문학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을 만났다. 갑자기 만화가를 만나고 싶은 생각에 포털 사이트에 ‘인천 만화가’를 입력해 검색해봤다.

5월 중순 <SBS> ‘세상에 이런 일이’에 영종도에 살고 있는 한창기(51ㆍ사진)씨가 소개된 후라 그 소식이 많이 올라왔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보안요원으로 근무 중이며 휴일에는 인천공항 북측 유수지공원에서 부인과 매점을 운영하며 만화를 그리고 있는 그의 사연은 군침을 돌게 하기에 충분했다.

5월 31일, 그의 매점에서 그를 만나 인터뷰했다. 부인 이경애(52)씨가 타 준 냉커피가 무척 맛났다.

그림이 좋아 극장 간판그림 배워

▲ 만화 고수 한창기씨
충남 당진이 고향인 한씨는 당진에서 초ㆍ중ㆍ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사생대회에 나가 입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집안 살림이 어려워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다. 직장을 구하러 서울에 온 그는 용산극장에 걸린 간판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요즘에야 디지털과 인쇄기술이 만든 홍보물이 간판그림을 대신하지만, 1990년대 후반까지는 극장마다 간판그림이 나붙었다.

“용산극장 간판을 보는데 충격이었죠. 정말 좋았어요. 시골에도 간판그림이 있었지만 너무 달라서 저걸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죠. 극장 미술실장이 그리신 건데, 뭐랄까 부드럽고 안정된 느낌이었어요. 다른 극장은 거칠고 어색했는데, 그 분의 작품은 예술 같았죠”

용산극장 외에도 두세 개 극장의 간판을 더 그렸다는 미술실장은 의뢰가 들어오는 유화를 그려 팔기도 했다. 그의 그림이 좋았지만, 당시에도 한씨는 유화보다는 여백이 있고 고전적이며 유머와 풍자가 있는 동양화가 더 끌렸다.

그 길로 극장에 들어가 그림을 배웠지만, 엉뚱한 짓을 하고 있다고 판단한 아버지의 반대로 극장을 나와야만 했다. 그 후 충무로에 있는 인쇄소에 취직했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미련은 계속 남았다.

그는 충무로에서 원색을 분해해 색을 교정하는 일을 했다. 사진을 인쇄하기 직전에 색을 보정하는 일이었는 데, 잉크로 색을 맞추고 섞는 일이었다. 인쇄업이 육체적으로 힘들어 이직율이 높지만, 한씨는 20년 가까이 그 일을 했다. 색을 다루는 일이 적성에 맞았다.

“제가 눈썰미와 감각이 있어서 금방 배웠어요. 재미도 있었고요. 광고 책자는 고급 수입지로 인쇄하는데 어떤 느낌을 요구하는지 빨리 잡아내서 선배들한테 인정을 받았죠”

그곳에 있으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주야간 계속되는 일에 체력적 한계를 느끼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시기에 인쇄소 일감이 줄어들기 시작해 일을 그만뒀다.

영종도에 둥지를 틀다

서울에서 인천 주안으로 온 한씨는 지인의 소개로 영종도에 온지 10년 정도 됐다. 인천공항 외각 경비업무를 3교대로 하며 주말이나 비번일 때는 낚시용품과 음료수를 파는 부인을 도와주고 있다.

그는 밤마다 하루 일과를 그림으로 그린다. 그림일기인 셈이다. 그걸 재미삼아 가게에 붙여 놓은 게 사람들에게는 신기하고 재밌었던지 입소문이 나기 시작해 작년에는 인천시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신문과 <OBS>에서 촬영해 가기도 했다. <SBS> ‘세상에 이런 일이’에 소개된 후에는 다른 지역에서도 그와 그의 그림을 보기 위해 오는 손님이 많다.

“멀리서 오신 분들은 정말 감사하죠. 티브이를 보고 공항 주변을 헤매다 물어물어 여기에 왔는데 제가 근무 중일 경우도 많았어요. 아내가 그 분들을 사진으로 찍어두면 제가 그림으로 그려 두죠. 다음에 오시면 찾아가라고 준비해둬요”

병원에서 환자복을 입고 온 사람도 있다는데, 정성이 고마워 그들을 그린 그림을 액자에 담아 둔 것을 몇 개 보여줬다.

얽매이지 않고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파

한씨는 그림이나 만화를 정식으로 배워본 적 없다. 대신 궁금하거나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책을 사서 본다. 책에서 그림 그리는 방식의 유형을 참조할 뿐이다.

“남의 것을 흉내 내기보다 나만의 것을 찾고 싶어요. 똑같은 만화지만 선을 하나 긋더라도 고급스럽게 하고 싶어요. 하지만 내용은 평범한 일상생활을 담는 거죠”

그의 작품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다. 부인과 막걸리 마시며 나누는 장면을, 혼자 소주를 마시며 여유 있게 행복을 누리는 장면을, 반바지 잠옷 차림의 주인공이 소소하게 보내는 일상을 풍자와 해학을 담아 그렸다.

“지금 돌이켜보면, 미대에 들어가 기초지식부터 단계적으로 공부했다면 좋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내가 표현하고 싶은 방식, 그림체, 도구와 다양한 재료로 그려보고 시도해보고 생긴 나만의 것이 좋습니다. 하고 싶은 걸 시도하고 얽매이고 억압받지 않고 하니 더 좋지요”

그는 외부 요청으로 연재를 하거나 마감 기한이 있으면 중압감이 대단할 것 같아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조금씩 소문이 나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다시 와서 새로운 그림을 찾는 것에 압박감을 느끼기도 한다는 그는 진정한 자유인 같아 보였다.

“저는 이런 걸 남한테 알려서 유명해지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내가 좋아하니까 내 방식대로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표현한 건데, 관심을 가져주니까 고마운 거죠. 거창하게 얘기하면 이것도 창작인 거예요. 한 장을 그려서 글을 써서 붙여 놓는다는 게 쉬워 보이지만 콘티도 짜고 이러저러하게 그려보면서 스스로 발전하는 게 행복하고 기분이 좋습니다”

작품 소재는 일상생활에 널려있어

▲ 한창기씨의 작품.
한씨의 그림 소재는 다양하지만 결코 멀리 있거나 특별하지 않다. 특히 노인들이 얘기하고 있는 데 가서 귀동냥을 하면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했다.

“오래 산 사람들의 지혜가 삶 속에 녹아있죠. 말 한마디가 속담이고 경구라 마음에 와 닿아요. 느끼고 배울 게 많아요. 메모했다가 거기에 맞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서 가게에 붙여 놓는데, 사람들이 좋아해주시죠”

애착이 가는 그림을 물으니, ‘행복이 별거냐?’ ‘늙는다는 것은 하늘과 통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는 그림 몇 개를 뽑았다. 철학적 깊이가 느껴지는 문구를 어떻게 찾았느냐는 질문에, 노인들이 하는 소리를 메모하거나 책을 읽다가 조금씩 변형한다고 했다.

“‘행복이 별거냐?’는 집에서 혼자 소주 한잔 마시는데 행복을 느껴서 그린 거예요. 그림의 주인공은 제 모습이고요. 집에서는 보통 저 차림새와 자세로 있죠. 술이요? 엄청 좋아해요”

예사로 지나치지 않고 세밀하게 관찰한다는 한씨를 보면서 예술가는 흘러가는 것도 잡아내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정곡’이라는 호를 받다

그림과 함께 쓰여 있는 글씨체도 보통이 아닌 것 같아, 어디에서 배웠는지 물었다.

“충무로에서 일할 때 최 선생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글씨체가 정말 좋았어요. 서예를 하시는데, 가르쳐달라고 해서 그 분이 쓰신 걸 따라 쓰면서 배웠죠. 그 분이 저한테 ‘재주가 있으니 열심히 하면 좋은 글씨가 나올 것 같다’며 ‘틈나는 대로 쓰라’고 했어요”

최 선생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더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때 글씨체를 인정받아 당시 일본에서 운영하는 협회에서 3급을 받기도 했대요. 그 분의 글을 간직하고 싶어 하나 써달라고 했더니 ‘노인네 글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며 한사코 거부하시더라고요. 그 분의 글씨는 섬뜩해요. 날카롭고 힘이 넘쳐요. 그 분이 저에게 ‘정곡’이라는 호를 줬어요. 낙관을 만들어 그림에 찍어봤는데 내가 한 게 아닌 것 같아 아직 잘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내공을 쌓아 제대로 그리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매점에 들러 한마디씩 던지고 간다. 그림을 팔아라, 전시회를 해라,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라….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은, 복사용지에 그리는 이런 그림이 아니라 한지에 좀 더 깊은 느낌이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한지는 선이 전혀 다르게 표현돼요. 내 방식대로 글귀와 함께 잘 그려 액자에 보관하고 싶어요. 지금이야 직장도 있고 그림 그릴 장소도 별도로 없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돼 생활이 안정되면 내 작업실을 갖고 좀 더 집중하고 싶습니다.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때가 되면 그림도 성숙할 테고 세상 보는 눈도 더 깊어지겠죠?”

그는 “오늘은 기자를 만난 특별한 날이니까, 저녁에 집에 가서 이 내용을 그림일기에 그리겠다”고 덧붙였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선 한창기씨를 ‘숨어있는 고수’라고 했다. 그는 내공이 만만찮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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