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누군가 내게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주저함 없이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라고 대답할 것이다. 현재로선 이보다 더 간절한 대답이 없다.

결혼한 지 두 달 만에 덜컥 아기가 생겼다. 유난하다 싶을 만큼 피곤이 쏟아지더니 검사 결과 임신이었다. 임신 6주 쯤 되자 슬슬 입덧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속이 미식미식 매스껍고 두통도 따랐다. 나보다 먼저 입덧을 겪은 친구는 입덧의 괴로움을 “하루 종일 멀미를 하는데, 그 와중에 배가 고파 억지로 음식을 먹어야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기가 막히게 적절한 비유다.

어쩜 그렇게 음식이란 음식은 죄다 먹기가 싫고 맛도 없고 냄새도 맡기 싫은지. 생양파와 파김치와 술을 제외하곤 거의 모든 음식을 가리지 않고 좋아하던, 정말이지 탁월한 식성을 가진 임신 전의 나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요즘은 끼니때마다 조금이라도 덜 역겨운 음식을 생각해내느라 골머리를 앓는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이전의 왕성한 식욕, 잃어버린 입맛을 되찾는 일이다.

그런데 식사의 괴로움을 토로하는 이들이 임신부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장금이가 미각을 잃은 것처럼, 맛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음식은 물컹물컹하고 질깃질깃하고 축축한 느낌의 불쾌한 물질일 뿐, 원래의 맛은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이들은 어쩌다 ‘맛’을 잃어버린 것일까?

우리가 맛을 느끼려면 여러 가지 과정이 따라야한다. 우선 마른 오징어나 쥐포처럼 건조한 음식물이 입에 들어오면 그것이 침과 섞여 액체가 될 때까지 꼭꼭 씹어줘야 한다. 혀 속에 있는 미뢰에는 미각세포가 대거 분포해있는데, 미각세포는 액체 상태로 녹은 분자나 이온에만 반응한다. 액체상태 물질이 미뢰에 닿으면 미각세포는 이 자극을 전기신호로 만들어 뇌신경을 따라 대뇌로 전달한다. 이 가운데 어느 한 과정에라도 문제가 생기면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게 된다.

특이한 점은, 미각을 잃은 이들은 미각만이 아니라 후각까지도 잃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각만 단독으로 잃은 경우보다, 후각에 문제가 생겨 맛까지 느끼지 못하게 된 경우가 훨씬 많다고 한다. 입 안과 코 안이 연결돼있기 때문이다.

흔히 혀가 구별할 수 있는 맛으로 단맛ㆍ쓴맛ㆍ신맛ㆍ짠맛 네 가지를 드는데, 이에 비해 후각은 1만 가지 냄새를 구별해낼 수 있다. 우리가 음식에서 그토록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미각과 예민한 후각이 협력한 결과다. 따라서 냄새를 맡지 못하면 그 어떤 맛도 느끼지 못한다. 한마디로, 밥 먹기가 ‘죽을 맛’이 되는 것이다.

미각과 후각을 잃는 원인으로는 항암제 등 약물 부작용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고로 뇌를 다친 경우에도 그렇다. 사고로 미각과 후각을 담당하는 뇌 회로에 이상이 생기면 냄새를 못 맡고 맛을 못 느끼거나, 때론 실제와 다른 엉뚱한 냄새와 맛을 느끼기도 한다.

‘대장금’에서 장금이는 벌의 독을 이용한 봉침요법으로 미각을 되찾았다. 하지만 실제로 치료는 쉽지 않다고 한다. 물론, 사고를 당하지 않더라도 나이가 들면서 미각은 둔해지기 마련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맛에 대한 기억이다. 맛은 학습에 의해 강화되고 뇌에 깊게 새겨지는데, 평소 맛을 깊고 정확하게 느끼는 습관이 미각을 좀 더 예민하게 만들어준다.

입맛을 잃고 나서야 특별한 반찬 없이도 맛있게 밥 한 그릇을 먹어치우는, 그 행복을 알겠다. 만일, 나이가 들어 감각기관들이 무뎌질 수밖에 없다면, 부디 미각만큼은 맨 마지막까지 남아있어주면 좋겠다. 좀 흐릿하게 보여도, 좀 어렴풋하게 들려도, 어쨌든 먹어야 제 명까지 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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