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책] 필링의 인문학 | 유범상 지음 | 논형 펴냄

 
“인문학은 나와 내가 사는 공동체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상식ㆍ지식ㆍ질서ㆍ진리ㆍ권력을 벗겨내 그 이면을 문제 삼는 것이다. 고달픈 현실을 힐링(healing)하며 더 높은 생산성을 위해 영감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현실을 필링(peeling)하는 등에(=쇠파리)가 돼 새로운 상상의 산파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힐링보다는 필링이 인문학의 본래 정신이라고 본다”(13쪽)

“그러나 권력관계와 구조를 그대로 둔 채 개인의 힐링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진정한 힐링은 필링을 통해 새로운 것을 상상하며 실천할 때 가능하다고 본다. 우리나라에서 절망의 인문학이라고 진단받는 힐링의 인문학이 필링의 인문학으로 보완되어야한다”(14쪽)

노동운동의 이념과 역사를 연구하던 중 사회정책의 필요성을 느껴 고민하다가 지역의 중요성에 눈뜨면서 인천에서 학습ㆍ토론하는 소통의 공간인 ‘마중물(waterforchang.or.kr)’을 만들고,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는 유범상 교수가 힐링을 넘어선 필링의 인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책으로 내놨다. 책 ‘필링의 인문학’이 그것이다. 유 교수는 인천에서 진보의 싱크탱크로 통하는 '마중물'을 이끌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 성찰적 자아를 찾아 나선다. 섹션1에선 ‘나는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생각당한다면 생각당하는 배경과 생각하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고 문제의식을 던졌다.

섹션2에선 사회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나를 성찰한다. 그 속에서 현재의 나는 왜 행복하지 못한지, 그 현상과 원인을 찾는다. 섹션3에서는 생각당하는 나, 행복하지 못한 내가 어떻게 희망을 찾을 수 있는지, 그 해법을 제시한다.

저자는 현재 불고 있는 인문학 열풍은 자본에는 희망이지만, 노동자에게는 절망인지도 모른다며 인문학은 중립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힐링은 지친 나를 단순히 위로하는 것이지만, 필링은 지치게 만든 본질 즉, 사회적 관계를 찾아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행위로 구별해 규정했다.

저자는 말을 타고 질주하던 인디언의 태도에서 서로 다른 인문학을 유추할 수 있다고 소개한다.

“첫 번째 인디언이 말을 타고 달리다 갑자기 멈췄다. 빨리 달려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영혼이 너무 지친 것을 알게 된 이 인디언은 잠시 멈춰 서서 영혼을 돌아보기로 결심한다. 이 지친 영혼은 성찰을 의미하고, 여기서 성찰은 쉬면서 자신을 살펴보며 충전하는 것이다. 두 번째 인디언도 마차가지로 질주하다가 말에서 내린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말을 본다. 경주마는 모두 눈가리개를 하는데, 이 눈가리개는 앞만 보게 만든다. 초식동물은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피는 습성이 있으니 눈가리개가 없으면 멈추기도 하고 옆으로 가기도 하고 달리기도 할 것이다. 이 인디언은 또 말의 엉덩이를 본다. 오른쪽 엉덩이는 딱딱하게 굳은살이 박혀있다. 승자가 되려는 기수가 오른쪽 엉덩이에 채찍질을 했기 때문이라며, 눈가리개를 확 벗겨 내던졌다”

저자는, 첫 번째 인디언은 ‘지친 영혼’의 성찰을 의미하고, 여기서 성찰은 쉬면서 자신을 살피며 충전하는 것이라며, 이것을 최근 유행하는 힐링이라고 했다. 두 번째 인디언이야말로 권력관계와 구조를 깨는 진정한 힐링을 한다고 봤다. 생각당하는 존재에서 스스로 생각하는 성찰적 주체가 돼야한다고 주문한다.

또한 저자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흑인 인권운동을 상징했던 로자 파크스의 일화를 소개하며 자각한 시민, 조직된 시민, 조직하는 시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로자 파크스는 1952년 12월 1일 미국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 백화점 점원으로 일하던 흑인 여성으로 퇴근길에 인종차별을 당했다. 당시 미국에선 인종 분리정책에 따라 흑인은 뒷자리에 있는 유색인종 자리에, 백인은 앞자리에 앉았다. 버스가 만원이 되자 버스기사가 유색인종 좌석표지를 뒤로 밀고 파크스에게 자리를 백인에게 양보하라고 했다. 파크스는 이를 거절했고, 버스기사는 결국 경찰을 불렀다. 파크스는 경찰에 체포돼 벌금형을 받았다.

흑인 동료뿐 아니라, 미국의 깨어있는 시민들은 이 사실을 알고 버스 보이콧을 선언하고 인종차별에 맞서 싸웠다. 마틴 루터 킹과 함께 4만여 명이 버스 탑승을 381일 동안 거부했고, 마침내 인종분리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았다.

“시민 파크스의 이런 용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 이면에는 하일랜더 시민대학이 있다. 1932년 교육을 통해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목표로 마일스 호튼이 만든 것으로 40년 동안 제도권 밖의 시민교육에 힘써, 문해교육을 통해 1957년 1월부터 1961년까지 4000명이 넘는 학생을 시민학교 프로그램으로 교육했고, 이 기간 동안 하일랜더 지역의 선거권자는 무려 300% 이상 증가했다”(344쪽)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근거를 만든다’고 주장한다.

“필링의 인문학은 지친 나에게 일시적으로 쉼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지친 나의 본질을 찾아 모든 상식ㆍ권력ㆍ구조ㆍ관계를 문제 삼는 것이며, 모든 권력을 비판과 토론에 맡기는 것이다. 근거 없는 낙관주의를 갖고 이 필링의 실천이 도처에서 생겨날 때 필링의 인문학은 ‘마중물’과 만나 나와 내 공동체의 성찰과 희망의 근거를 만들 것이다. 필링의 인문학을 무기로 내가 내 공간에서 나답게 실천하는 수많은 ‘마중물’을 도처에서 만날 생각에 벌써부터 설렌다”(3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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