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송희 만화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 >

예쁘지 않은 주인공들, 과장 없이 단순한 펜선, 그래서 더욱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그림체. 정송희의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이라는 만화책은 겉보기에는 참으로 단조로워 보인다. 그러나 이토록 담백한 그림체로 그리는 이야기는 독자를 얼얼한 충격에 휩싸이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1막 ‘가로막힘’, 2막 ‘이야기하기’, 3막 ‘봄’ 등 총 3막 9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책은 짧은 단편 하나하나가 담고 있는 에피소드가 가히 충격적이다. 지금껏 알지 못했던 사건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혹은 현실과는 전혀 다른 판타지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내가 겪었고 또 네가 알고 있는, 누구나 당연히 겪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충격적이다.

누구나 겪고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래서 충격인 이야기란 어떤 이야기일까?
1막 가로막힘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을 보자. 첫 장면, 공원 벤치에서 젊은 남녀가 부둥켜안고 키스를 나누고 있다. 남자의 손은 자연스럽게 여자의 허리에서 가슴으로 이동한다. 여자는 “거기까지는 안 된다”며 단호히 남자의 손을 뿌리친다. 남자는 화가 나서 말한다. “넌 날 사랑하지 않는구나”

여자는 남자를 달래듯 자신의 어린 시절 끔찍했던 기억을 이야기한다. 그녀가 왜 가슴 만지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는지, 역사가 밝혀진다. 이 부분을 읽는데 등골이 서늘하다. 성추행이 뭔지도 잘 모르는 어린 시절, 학교에서 교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경험은 여자라면 거의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사실이 알려지지 않길 원했기 때문에, 설혹 알려진다 하더라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감춰졌던 이야기다.

여자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남자는 그제서야 여자를 이해한다. 그리고 여자처럼 자기고백을 한다. 단, 여자처럼 입 밖으로 하지 못하고 어린 시절 가해의 경험을 속으로 고백한다.

작가 정송희는 유년의 기억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몸에 대한 숱한 경험들, 분명히 몸이 겪었고, 그래서 몸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기억에서 지워냈던 이야기들을 단순하지만 명쾌한 그림체로 독자에게 드러낸다.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은밀함은 관계 맺은 사람들 간의 진솔한 대화로 교류되어야 한다. ‘당신들이 그렇게 숨기려던 것, 사실은 별 것 아닌 것들이다’.” 책에 실린 작가와의 대화에서 드러나듯 정송희는 ‘그렇게 숨기려 했지만, 사실은 별 것 아닌 은밀함’을 끄집어내어 ‘진솔한 대화’를 시도한다.

이 책이 주는 충격은 ‘그렇게 숨기려 했던 것들이 사실은 누구나 다 겪었던, 별 것 아닌 일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별 것 아닌 것들이 숨어 있느냐, 드러나느냐에 따라 피해자의 상처는 회복되기도 하고 가해자는 용서를 받기도 한다.
지금 우리는 별 것 아닌 일상을 드러내 대화를 시도할 때이다. 그러지 않고는 더 이상의 관계도, 더 이상의 변화도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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