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학생이 직접 손으로 써 학교 게시판에 붙인 대자보 한 장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안녕들 하십니까?’라며 당돌하게 질문 투로 던지는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대자보의 내용인즉, 하루 파업했다는 이유로 노동자 4000여명이 직위해제 당하고, 시골마을에 고압 송전탑이 들어서 주민들이 음독자살을 하고, 엄연히 법적으로 대통령 사퇴를 요구할 수 있는 국회의원이 ‘사퇴하라’고 말 한마디 한 죄로 제명이 운운되는 지금, 이를 묵시한 채 모두 안녕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을 적은 대자보 수십 개가 줄을 이어 붙고 있다고 한다.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이 모여 서울 시내를 행진하며 세상을 향한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내가 대학을 다닌 199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대자보는 여러 소식을 알리는 데 유용하게 쓰였다. 3월이면 동아리 신입회원을 모집한다는 게시물이 경쟁하듯 붙었고, 여름방학을 앞두고는 농촌봉사활동에 함께 하자는 대자보가, 때론 지역 향우회나 고등학교 동문회 개최 소식을 알리는 내용도 있었다. 그리고 학교 내 비리는 물론 사회 문제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내용도 제법 많았다. 교문에서부터 강의실까지 걷는 동안 이 대자보들을 읽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대자보로 도배된 게시판은 온전히 학생들의 것이었다.

대자보(大字報)는 직역하면 ‘큰 글자로 알림’이다. 사전에서는 대학생들이 학내에서 사용하는 게시물이라 해석하면서 순화된 표현으로 ‘벽보’를 들고 있지만, 나는 이것이 괜히 마뜩잖다. ‘벽보’라는 단어에서는 ‘대자보’가 갖고 있는, 젊고 비판적이고 새롭고 독특한 성격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대자보’에서 기능을 설명하는 글자는 바로 ‘報’(알릴 보)이다. 報는 幸(다행 행)과 卩(병부절), 又(또 우)로 이뤄져 있다.

幸은 辛(매울 신)에 한 획을 더한 것인데, 辛은 죄인에게 벌을 줄 때 사용하던 끝이 뾰족한 칼 모양을 나타낸다. 쓰라린 형벌의 고통이 ‘맵다’는 뜻으로 변형됐다. 幸(행) 역시 죄인의 목에 채우던 칼의 모양을 본떴다. 한자에 등장하는 죄인이란 단순한 절도범이나 강도범이 아니다. 대역죄를 저지른 이나 적군을 의미한다.

이런 죄인을 거둬들여 칼을 채울 수 있는 이는 누구일까? 바로 전쟁에서 승리한 자, 그리고 권력을 쥔 자이다. 그래서 幸은 권력을 가진 이의 상태, 즉 행복하고 다행한 상태를 나타내는 글자로 뜻이 바뀌었다. 卩은 무릎을 꿇리고 앉아 있는 사람의 모습이고 又는 오른손을 나타낸다. 죄인을 손으로 눌러 굴복 시킨 모습이 報에 담겨 있다. 어떤 이에게 죄가 있음을 ‘알린다’는 뜻에서, ‘보고서’ ‘보도’ 등에 쓰인다.

그런데 報는 ‘갚다’는 뜻으로 더 많이 사용한다. 죄인으로선 벌을 받음으로써 지은 죄를 ‘갚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상’ ‘보복’ ‘보은’이 그 예이다. 뭔가를 갚는 심정으로 형벌을 기꺼이 받아들일 죄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다. 여기에서 보듯, 문자 또는 언어는 철저히 권력자의 입장과 당시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동시에 그들을 대변한다. 반대로 말하면, 문자나 언어를 선점하는 자가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대자보는 그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의 일상과 생각을 글로 드러내는 창구였다. 아무리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가 발달했다 하더라도, 어떤 이가 복잡하고도 다양한 심경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써 나간 대자보를 대학이라는 생생하고 현실적인 공간에서 잠시 걸음을 멈춰선 다른 이들과 함께 실물로 접하는 것과, 스마트폰이라는 감정이 차단된 기기를 통해 접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학게시판은 해외유학이나 외국어시험 광고에 자리를 내준 지 이미 오래이다. 이번 안부인사의 파장을 계기로 대학을 넘어 곳곳마다 대자보가 넘실대길 바라는 마음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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