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수의 걷기여행 (33) 강화 전등사에서 일박이일
인연의 끝은 어디일까? 지난여름 양산 ‘자연생활의 집’에서 만난 세 집 식구들이 9월 14일 강화에서 다시 만났다. 캐나다로 이민 갔다가 다시 들어온 백 선생 댁, 영국에 살다가 몸이 아파 한국으로 들어온 박 선생 댁 등, 몸이 아프지 않았다면 이승에서 절대 만날 수 없었던 인연들이다.
전등사에서 잘 예정이었기 때문에 차를 가지고 남문을 통해 절 안에까지 들어갔다. 죽림다원에서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박 선생 댁과 모과차를 한 잔 하고 있자니 수원에서 온 백 선생 댁도 도착했다. 전등사 경내 죽림다원 찻집은 차 맛도 좋지만 인테리어와 아웃테리어가 예사롭지 않다.
무설전, 법당과 갤러리를 합친 곳
시간을 내 석모도 보문사에 갔다 온 뒤 전등사의 무설전을 둘러봤다. 작년 10월에 개원법회를 했다고 한다. 전국 최초로 법당과 갤러리를 합친 곳이다. 법당과 예술작품의 만남, 주지스님의 문화적 안목이 놀랍고도 고맙다.
향로전에 들어가 주지스님과 대화를 나눴다. 박 선생이 영국에서 생활할 때 주지스님이 3년간 영국에 있는 한인 사찰에서 주석했다. 그런 인연으로 작년에 돌아가신 박 선생의 아버님을 전등사에 모셨다. 박 선생과 주지스님의 인연이 나에게까지 이어져 전등사에서 하룻밤 묵게 된 것이다.
향로전은 원래 법당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상궁이나 나인들이 기도하던 곳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지금은 주지스님 집무실로 쓰고 있다. 좌중을 휙 둘러보는 스님의 눈빛이 범상치 않다. 현재 동문 바깥에 전등각이라는 이름으로 한옥 여섯 채를 짓고 있는데 우리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공간으로 조성 중이라는 얘기, 내년이 ‘세계 책의 수도 인천’의 해라는데 정족사고를 빼고 무슨 ‘책의 해’ 얘기를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얘기 등, 인천과 인천 문화에 대한 애정 넘치는 열변을 토하셨다. 생각해보니 책과 관련한 중요한 콘텐츠가 이곳 전등사에 있었다. 스님의 얘기는 계속됐다.
“강화도는 섬 자체가 우리나라 역사의 축소판이다. 선사시대의 고인돌 유적부터 단군의 마니산, 고려 때의 대몽항쟁과 팔만대장경, 서양 세력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 이르기까지. 그래서 강화도는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린다. 그런데 지붕이 없으니 쉴 곳이 없다. 쉴 수 있는 지붕을 강화 이곳저곳에 만들어야한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래됐다.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에 창건됐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니 얼마나 오래 된 절인지 알 수 있다. 전등사를 처음 창건한 사람은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 화상이다. 그때 절 이름은 ‘진종사’였다. 아도 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82년(충렬왕 8년)에 왕비인 정화궁주가 경전과 옥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사찰 명칭을 ‘전등사’로 바꾸었다. ‘전등’이란 ‘불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으로, 법맥을 받아 잇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다.
주지스님과 대화를 마치고 동문으로 내려가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절로 올라가니 아무것도 안 보인다. 칠흑 같은 어둠이다. 방에 들어가 잠시 쉬다가 다시 무설전으로 갔다. 신도들이 모여서 주지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매달 두 번째 토요일에 이곳에 모여 금강경을 읽는 모임이다. ‘한문 금강경’을 일곱 번 읽는다. 주지스님이 힘차게 목탁을 치며 큰 소리로 독송을 이끈다.
나는 눈으로만 따라 가는데도 몇 번이나 놓쳤다. 독송이나 염불은, 물론 일차적으로 신앙적인 의미가 있지만 거기에서 발생하는 소리의 파동이 몸의 기운을 건강하게 바꿔준다고 한다. 세 번 읽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밖에 매달아놓은 스피커를 통해 신도들의 독경소리가 밤하늘로 퍼진다. 그 소리가 닿는 세상만큼은 아마도 깨끗해질 것이다.
대웅전 나부상에 얽힌 전설
새벽 4시 대웅전에서 들려오는 고요한 목탁소리가 고즈넉한 산사의 새벽을 깨웠다. 난생 처음 부처님에게 절을 했다. 옆 사람들 눈치를 대충 보면서 절했다가 일어났다가 앉았다가를 반복했다. 이 새벽 대웅전 안에서 내가 엎드려 무릎 꿇고 절하리라는 걸 부처님은 미리 알았을까? 내 삶 어느 굽이의 어떤 인연이 이 새벽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을까?
전등사는 광해군 때 화재로 인해 건물이 모두 소실됐는데 1621년(광해군 13) 옛 모습을 되찾았다. 건물의 건축적인 가치와 더불어 ‘나부상’으로 유명한 대웅전도 이때 중건됐다. 대웅전 내부의 기둥과 벽화에는 병인양요 당시 부처님의 가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병사들의 염원이 담긴 낙서의 흔적도 남아있다. 대웅전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대웅전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벌거벗은 여인에 대해 몹시 궁금해 한다.
부처님 모신 법당에 웬 벌거벗은 여인인가 하고. 어떤 사람들은 나부가 아니라 원숭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원숭이는 사자나 용처럼 불교를 수호하는 짐승으로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 사찰에서는 간혹 모셔지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부상과 관련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그 전설은 다음과 같다.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도편수는 주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그 주막으로 찾아가보니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며칠 전에 야반도주를 했수. 찾을 생각일랑 아예 마시우” 이웃집 여자가 말했다.
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배반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도편수는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
목수의 풍자도 재미있지만 그런 파격을 기꺼이 받아들인 당시 전등사 스님들의 너그러움이 더 놀랍다.
정족사고서 해마다 미술전시회를 열다
아침 공양을 하고 정족산으로 산책을 나섰다. 삼성각을 지나니 정족사고와 취향당이 나왔다. 삼성각은 산신, 나반존자, 칠성 등 삼성을 모신 건물이다. 본래 삼성은 중국의 도가사상과 관련이 있는 성인들인데 우리나라에서 불교사상과 융합됐다. 어떤 이들은 삼성각 등 민초들이 찾는 전각이 대웅전보다 더 좋은 곳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정족사고가 나왔다. 정족산 사고는 1931년 무렵 주춧돌과 계단석만 남긴 채 없어졌다. 사고에 걸려 있던 ‘장사각’과 ‘선원보각’이라는 현판만 전등사에 보존돼있었는데, 1999년 복원돼 원래의 모습을 찾았다.
사고란 고려나 조선시대에 나라의 역사 기록과 중요한 서적이나 문서를 보관한 전각을 일컫는 말이다. 조선 왕실에서는 실록을 네 부씩 만들어 궁궐 내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 등 네 군데의 사고에 보관하게 했다. 실록 등 국가의 귀중한 사서는 소실 등의 피해를 막기 위해 중앙과 지방에 분산해 보관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간신히 전주 사고만 무사했다. 임진왜란 후 전주 사고본을 네 부씩 옮겨 적게 하고 전주 사고본은 이곳 전등사로 옮겼다. 다른 실록은 봉화군 태백산, 영변 묘향산, 평창 오대산에 보관하게 했다. 그러다 1908년, 이곳 정족산 등 4대 사고의 장서들을 모두 규장각으로 옮겼다.
현재 정족사고에서는 해마다 미술전시회가 열린다. 역사적 건물과 미술작품의 만남. 그런 행사가 있는 줄 전혀 몰랐다. 작가들도 격려할 겸 전시한 작품 중 일부는 전등사에서 사들인다. 무설전이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생긴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정족사고 오른쪽 전각이 취향당이다. 1707년 강화 유수였던 황흠이 사고를 고쳐 지을 때 취향당이라는 별관도 지었다. 지금은 주지스님의 거처로 쓰고 있다.
정족산성으로 올라갔다. 삼랑성이라고도 하는데 단군의 세 아들인 부여ㆍ부우ㆍ부소가 쌓았다고 해서 삼랑성이다. 전등사를 둘러싸고 있는 삼랑성에는 동서남북 네 개의 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동문과 남문만 남았다. 이 가운데 문루가 있는 곳은 남문이 유일하다. 전등사에는 일주문이나 불이문이 없고, 대신 호국의 상징이었던 동문과 남문이 일주문 구실을 하고 있다. 동문 안쪽에는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가 세워져 있다.
정족산은 해발 222m다. 성 위로 올라가니 산들이 구름으로 뒤덮여 있다. 마니산은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풍수가들은 마니산을 할아버지 산으로, 이곳 정족산을 할머니 산으로 부르고 있다.
내려오는 길에 가궐터가 있었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받아 강화로 도읍을 옮겼을 때인 1259년에 세워진 궁궐터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 부처님의 가피로 왕실의 안녕을 꾀하고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임금의 임시 거주처를 마련하게 했고, 전등사 경내에 가궐을 세웠다. 개경으로 환도한 후 폐허로 변했고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마지막 한 개는 내 마음의 등
템플스테이를 하는 방으로 들어가 쉬었다. 내가 묵은 방 이름이 ‘이행’이다. 이로운 행동, 물론 남에게 이로운 행동이겠지. 이 세상 모두 남에게 이로운 행동만 하고 살아간다면 그게 바로 극락이요, 천당일 것이다.
그냥 떠나기 아쉬워 절을 천천히 다시 둘러봤다. 약사전은 보물 제179호다. 대웅보전 왼쪽에 있다. 약사전 옆은 명부전이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을 모셨다. 지장보살은 모든 중생이 극락을 가기 전까지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노라는 원을 세운 보살이다. 그래서 지장보살은 녹색의 머리를 깎고 지팡이를 짚은 채 지옥 문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명부전을 지장전으로 부르기도 한다. 주로 죽은 이들이 49재 때 저승에서 재판을 받을 때까지, 그들의 넋을 위해 치성을 드리는 곳이다.
범종은 보물 제393호다. 1097년 중국 하남성 숭명사에서 조성된 것으로 음통이 없다. 소리가 맑고 아름다운 게 특징이다. 이 종은 일제가 공출이란 명목으로 빼앗아가는 바람에 한때 전등사를 떠나기도 했는데 광복 이후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돼 다시 전등사로 옮겨왔다.
무설전에 또 들어갔다. 무설전 천장에 매달린 연등은 현대식 엘이디(LED) 조명등이다. 모두 999개다. 마지막 1개는 자신의 마음의 등이다.
석가모니불 앞으로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등 네 분을 모셨다. 위패가 놓인 벽면은 바퀴가 달린 이동식 무대로 변신이 가능하다. 공연이나 낭독회 등 다양한 문화 행사를 열 예정이다. 무설전은 함께 만들어가는 공간이다. 이 모든 것이 전등사 주지 범우스님의 예술적 안목과 뚝심에서 비롯되고 완성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아무리 좋아도 계속 머물 수는 없는 일. 초지대교를 건너 강화도를 빠져 나왔다. 강화도가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이라는데, 그것도 자랑스럽다. 대명리 약암온천에 들러 목욕을 했다. 세계에서 유일한 홍염온천이란다. 어쨌든 세계에서 유일한 게 내가 사는 인천에 있다니 그것도 자랑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 신현수씨는 부광고 국어교사이자 시인이며, 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신현수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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