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이 만난 사람] 임정수 계양봉사단 단장

‘서부천(=서부간선수로) 생태하천 만들기 주민운동본부’ 본부장, 사회적기업 ‘함께 사는 마을’ 대표이사, 그리고 계양봉사단 단장. 임정수(63·사진)씨는 하는 일이 참 많다. 그를 8월 30일 오후 계양구 작전1동 ‘함께 사는 마을’ 본점에서 만났다.

‘함께 사는 마을’ 본점은 네 개 공간으로 구분돼있었다. ‘함께 사는 마을’과 계양봉사단 사무 공간, 중고 의류 등을 진열해 놓은 매장, 의류를 수선하거나 다림질하는 공간.

우선, ‘함께 사는 마을’을 만든 배경부터 물었다. 하지만 그는 계양봉사단 이야기부터 들려줬다. 그것도 1999년 광주 망월동 5.18묘역을 갔다 온 이야기부터.

5.18정신인 자치와 참여, 나눔과 배려를 계양구에

▲ 임정수 계양봉사단 단장.
“1999년 5월, 친구(정갑수씨)를 따라 광주 망월동 묘역을 갔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갔는데, 묘비에 가슴에 와 닿는 글들이 많더라고요.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거나, 누구를 아프게 하는 글들이 아닌…. 네 명이 함께 갔는데, 돌아오면서 우리가 저분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뜻을 모았어요. 그리고 다음(DAUM)에 카페를 만들었어요. 5.18민주화운동후원회라고. 그 후 5.18 부상자 가족을 돕는 일을 했습니다. 다섯 가정을 4년 정도 후원했죠.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고 탄핵을 받아요. 촛불시위가 일어났죠. 한참 뒤 우리도 가보기로 하고 버스를 한 대 빌려 ‘청해뷔페’ 있는 데서 출발하려고 하는데, 송(영길) 시장 부부가 탔어요. 총선이 시작될 무렵이었고, 송 시장이 국회의원이었을 때라 부담스럽더라고요. 그래서 송 시장에게 ‘차비 만원씩 내서 가는데, 좀 그렇다’고 했더니, ‘우리도 낼게요’ 하며 2만원을 내더라고요. 송 시장은 당시 방송국 토론회에 참석하러 간다고 했어요. 그런데 다음날 난리가 난 거예요. 조(선)ㆍ중(앙)ㆍ동(아)에 현직 여당 국회의원이 5.18단체를 동원해 촛불집회를 주도하고 있다는 보도가 났지 뭐예요. 신문사에 정정 보도를 요청하고, 인천시민사회에 성명서를 내달라고 했는데, 그게(=정정 보도) 돼요”

그 후 ‘5.18민주화운동후원회’라는 카페 명칭을 게양봉사단으로 바꿨다. 잘못하면 5.18 민주화운동을 훼손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쉽게 정한 이름이 계양봉사단이에요. 단원들이 매해 5월이면 망월동 묘역을 다녀오는데, 5.18정신이 자치와 참여, 나눔과 배려잖아요. 그 모토로 계양구에서 활동을 시작한 거죠”

그의 이야기는 사회적기업 ‘함께 사는 마을’로 이어졌다.

쌀과 부식이 아닌 일자리로 자립 지원

“2001년부터 취약계층 15세대에 매달 쌀과 부식, 반찬을 지원하다가 실제 생활이 어떤지 조사를 했어요. 그런데 지원을 받지 않아도 될 분들이 받고 있더라고요. 그건 자립을 방해하는 것이지 도와주는 게 아니지 않느냐는 뜻에서, 차라리 일자리를 만들어 월급을 주기로 했어요. 그래서 사회적기업을 만들었죠”

임씨는 사회적기업 ‘함께 사는 마을’을 만들면서 단원들과 몇 가지 약속을 했다. 법인 설립 기금 5000만원 중 4000만원은 본인이 출연하고, 나머지는 단원들이 출연한다. 이익금이 생겨도 주주 배당은 없다. 직원들의 평균 연봉이 2400만원이 될 때까지 대표이사는 급여를 받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2010년 8월 1일 창업했다. ‘함께 사는 마을’은 현재 매장 여섯 개를 운영하고 있다. 매장이 위치한 지역 특성을 감안해 중고의류 전문, 신상품 전문, 중고와 신상품 통합 매장을 운영한다. 노인요양복지사업도 겸하고 있다. 종사자는 총38명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사회적기업이 자립하진 못했다. 그는 사회적기업 지원금을 제외하고 손익분기점에 거의 다다랐다고 말했다. ‘함께 사는 마을’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면에는 드러나지 않은 임씨의 지출이 있다. 3년간 운영적자 약 1억원은 법인에서 담보 대출을 받았고, 매장 임차보증금과 권리금 약 1억원은 사비로 냈다.

매장이 여섯 개나 되는 사회적기업을 운영하기도 벅찰 텐데, 그는 서부천 생태하천 만들기엔 왜 그리 열심일까. 이야기는 2005년 무렵으로 거슬러 간다.

서부천을 생태하천으로
가수 박유천 팬카페도 동참

“삼산동 농수로(=서부간선수로) 살리기 대책위원장인 이매리씨가 찾아왔어요. 우리(=계양봉사단)가 서부천을 정기적으로 청소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나 봐요. 부평구와 계양구민들이 힘을 합해 서부천을 생태하천으로 만들어보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뿐 아니라 주변 시민단체들과 함께 활동을 시작했죠. 그런데 갑자기 이매리씨가 일 때문에 해외로 나갔어요. 그 일을 계양봉사단이 이끌기 시작한 거죠”

그 후 ‘서부천 생태하천 만들기 주민운동본부’를 만들었고, 인천시장과 농어촌공사 사장, 지역 국회의원 등이 직접 참여하는 민관협의회도 만들었다. 그 힘으로 서부천 정비 공사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태하천 만들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삼산동에서 굴포천까지 물길을 연결하는 게 가장 큰 문제였어요. 택지를 조성하면서 굴포천이 단절됐는데, 지하에 관을 묻어 서부천 물이 굴포천으로 흐르게 하자고 했죠. 문제는 예산이었어요. 한정된 예산(80억원)으로 공사를 하다 보니 수변 조경공사 예산은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주민들이 나무를 심겠다고 했죠. 토론 끝에 삼산동에서 아라뱃길까지 7.5km에 5m 간격으로 왕벚꽃나무 2000그루를 2015년까지 심기로 했어요”

문제는 그 비용을 어떻게 마련하는가에 있었다. 특히 인천아시안게임 개최에 맞춰 최소 6년산 이상 나무를 심기로 하면서 돈이 많이 들었다. 찾으면 길은 생기기 마련, 비용의 절반을 계양봉사단에서 책임지고, 절반은 후원을 받기로 했다. 한마디로 ‘매칭’하는 방식이다.

“열 그루를 기본으로, 후원자들이 원하는 벚꽃길 이름을 달아주기로 했어요. 가수 박유천 팬카페에서 35그루를 후원해 ‘박유천 벚꽃길’로 하기로 했고, 인천 노사모에서 60그루를 후원해 ‘노무현 대통령 벚꽃길’로 하기로 하는 등, 지금까지 벚꽃길 25개가 정해졌어요”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룹 JYJ의 박유천 팬카페와는 어떻게 연이 닿았을까?

“네이버에서 ‘콩’ 기부 시합을 한 적이 있는데, 박유천 팬카페가 1위를, 우리가 2위를 했어요. 1위 상금이 400만원, 2위가 250만원이었는데, 1, 2위를 다툴 때 그분들(=박유천 팬카페) 글(500건 정도)에 제가 일일이 ‘아름다운’ 댓글을 달아줬어요. 마음이 통했는지, 우리 활동이 더 절실한 것 같다며 ‘콩’ 150만원어치를 주더라고요. 그게 계기가 돼 3년 전부터 교류하기 시작했죠. 그 후 헌옷을 한 달에 1톤씩 보내요. 그래서 헌옷 1kg당 500원씩 쳐서 벚꽃나무를 후원하는 것으로 하기로 했어요. 그게 서른다섯 그루가 된 거죠”

지난해부터 현재까지 서부천에 심은 왕벚꽃나무는 532그루다. 올 가을에 70그루를 더 심을 예정이다. 계양봉사단이 준비한 기금보다 후원금이 더 많아질 정도로 주변의 관심과 참여가 늘고 있다. 이에 계양봉사단은 오는 13일부터 15일까지 기금 마련을 위한 바자회를 열 예정이다.

“계양봉사단이 온라인(‘다음’ 희망해) 모금운동으로 250만원을 모아 서부천 다리 12곳과 토끼굴 2곳에 벽화도 그려나가고 있어요. 다리 7개만 남았죠. 빠르다, 느리다는 중요하지 않아요. 변화를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이 필요한데, 동력은 주민 참여에요. 주민들이 힘을 합치면 변하게 돼있어요. 서부천을 그렇게 만들고 싶어요. 우리의 생명줄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거죠. 계산천과 서부천, 굴포천이 생태하천으로 하나로 어우러져 진짜 명소가 되지 않을까요?”

열일곱 살 그리고 국화빵기계

▲ 사회적기업 '함께사는 마을' 작업장 앞에선 임정수 계양봉사단 단장.
임씨는 ‘함께 사는 마을’을 창업하면서 계양봉사단 단원들에게 약속한 것이 한 가지 더 있다고 했다. ‘내 소유의 주유소와 식당 등 부동산을 정리해 20억원을 내놓겠다. 그것으로 복지재단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는 4년 전쯤 가족회의에서 이를 동의 받았다고 했다. 부동산을 처분해야하는데, 경기가 좋지 않아 아직 팔리지 않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임씨가 이런 삶을 살고자 한 결정적 계기가 있었을 것 같았다. 그는 두 번의 간청 뒤에야 말문을 열었다.

“부모님이 황해도 출신인데 한국전쟁때 피난나오셨어요. 제 생년월일이 1951년 3월 1일이니, 전쟁통에 태어난 거죠. 아버지는 제가 열한 살 때 돌아가셨고, 당시 시흥군 시화에 정착했다가 열다섯 살 무렵 동구 송현동으로 이사 왔어요. 어머니는 현대시장 뒤에서 구멍가게를 하셨는데, 1년 만에 접었죠. 그리고 검단에 사는 노인들이 푸성귀를 가지고 현대시장에 와 팔았는데, 어머니가 그걸 넘겨받아 팔았어요.

겨울에는 서흥초등학교 뒤에서 국화빵 장사를 했어요. 우리가 4남매인데, 만날 밀가루 국수에 김치를 끓여 먹었을 때에요. 막내 동생은 보리밥 좀 먹었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불렀죠. 그런데 어느 날 집에 갔더니 보리밥이 있는 거예요. 오늘 어머니 장사가 좀 잘 됐나 보다, 생각했죠. 밥을 먹고 알아보니 막내가 하도 보채 국화빵 기계를 팔아 보리쌀 두 대박을 사 오신 거였어요.

기계를 어디에 팔았냐고 어머니께 여쭙고 부엌칼을 품에 숨기고 그 집으로 갔죠. 주인에게 사정을 이야기했어요. 안 들어주면 사단을 낼 생각이었죠. 국화빵을 팔아 이 겨울을 견뎌야하는데, 기계를 돌려주면 쉬는 날 와서 일을 도와드리겠다고 했죠. 놀랍게도 보리쌀을 보태 국화빵 기계를 돌려주시더라고요. 엉엉 울었어요. 그 때가 열일곱 살이었어요.

그 후 그분을 따라 5년을 일요일이면 송도 영락원, 학익동에 있던 인천보육원 등에 봉사하러 다녔어요. 계속 하다 보니 길들여진 것 같아요. 직장을 다니고 사업을 하면서도 봉사모임을 만들어 활동했죠. 어떤 일을 오랫동안 하다보면 다른 일을 못해요. 돈을 벌고, 번만큼 거기에 쓰자고 다짐했죠. 그리고 나이 육십이 되면 일에서 손을 뗀 뒤, 복지재단을 만들어 ‘함께 사는 마을’을 만들겠다고 결심했어요”

임정수씨는 자신의 나이가 마흔여섯이라고 했다. 열일곱 살에 새로운 꿈을 갖고 다시 태어났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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