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이 만난 사람] 허선규 인천경실련 해양위원장

서해5도(=백령ㆍ대청ㆍ소청ㆍ대연평ㆍ소연평도) 어민들이 중국어선 불법조업으로 인한 피해가 막심하다며 이를 적극적으로 막지 못한 정부를 상대로 2차 소송에 나서고 있다. 지난 2003년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민사소송이 고등법원에서 기각된 지 6년여만의 일이다.

1차 소송이 끝난 후 배를 팔고 떠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중에는 신용불량자가 된 사람도 여럿 있다. 이렇게 서해5도에서 조업을 하던 배는 300여척에서 120여척으로 ‘3분의 1’가량 줄었다. 하지만 척당 어획량은 오히려 10년 전에 비해 줄고 있다. 어민들의 정부에 대한 불신과 울분은 그만큼 커졌다. 이에 2차 소송을 위한 소송인단 구성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시민권익센터와 인천경실련,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이 공익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인천경실련에서 이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허선규(51) 해양위원장을 21일 오후 인천경실련 사무실(남동구 구월동)에서 만났다.

허 위원장은 인천 앞바다 섬 중 하나인 덕적도에서 태어났다. 국민(초등)학교 6학년 때 인천으로 나와 인천에서 중ㆍ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녔다. 대학 전공학과가 적성에 맞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군 제대 후 생활 여건이 어려워 복학하지 않고 결혼과 동시에 고향으로 들어갔다. 그는 선친이 운영해온 숙박업을 이었다.
그런 그가 다시 고향에서 나온 뒤 2년 전부터 인천경실련 해양위원장으로, 지금은 중국어선 불법조업으로 인한 어민 피해 문제에 관여하고 있다. 그동안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이야기는 오래 전으로 거슬러 간다.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투쟁 선두에서

▲ 허선규 인천경실련 해양위원장.
1994년 12월, 정부는 굴업도에 핵폐기장을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그 발표를 듣고 그는 섬으로 들어갔다. 굴업도는 그의 고향인 덕적도에서 8km 정도 떨어진 아름다운 섬이다.

“그날로 섬에 주저앉아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운동을 시작했죠. 주민들을 모아내는 데 초창기에는 고생 좀 했습니다. 섬이 워낙 고립돼있고, 모든 걸 행정이 이끌었어요. 면장, 이장도 큰 권력으로 인정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죠. 특히 군사독재정권시절부터 지금까지도 시민운동이나 데모는 ‘빨갱이’가 하는 식, 북한이 하는 식으로 주민들에게 주입돼있었습니다. 그래도 주민들을 설득하기 시작했죠. 핵폐기장이 어떤 것인지 토의하면서 주민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어요. 아무리 국가정책이라도 이건 막아야겠다고”

하지만 반대운동은 만만치 않았다.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마을 어른신들 중에서 위원장을 모시려고 했는데, 처음엔 그것도 권력인줄 알고 보수 쪽 사람들도 와서 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1995년 1월 초에 민주자유당인지, 신한국당인지 지금의 새누리당 시무식을 다녀와서 찬성 쪽으로 변하더라고요. 그게 오히려 조직(=대책위)이 갖춰지는 계기가 됐죠.

대책위원장을 뽑고, 제가 사무국장을 맡았어요. 그리고 주민대표단을 꾸려 옹진군청에 항의하러 갔어요. 묘하게도 대표단이 서른세 명이었어요. 독립운동도 아닌데.(웃음) 연안부두엘 도착했는데, 전투경찰이 몇 개 중대가 온 것 같았어요. 부두를 열 겹은 에워싼 것 같더라고요. 경찰은 타고 온 여객선을 다시 돌리게 할 테니 섬으로 다시 들어가라고 하더라고요. 거기서 전경과 싸우고 나자빠지고 했죠. 그 때 우리 힘만으론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핵폐기장 건설 반대 투쟁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주민 400명가량이 버스 10대를 대절해 서울중앙청사앞에서 집회를 열기도 했다.

“중앙청사 집회를 마칠 때쯤 제가 핸드마이크로 ‘인천에 내려가면 인천시청을 점령한다’고 말했어요. 인천의 전경들이 인천시청으로 다 몰렸죠. 거짓 정보를 흘린 거였어요. 저는 3호차를 탔는데, 1호차와 2호차 책임자에게만 비밀리에 알렸죠. 어느 시점에 가면 옹진군청으로 버스를 돌리라고. 그렇게 옹진군청을 점령하고 군수를 잡아뒀어요. 곧바로 전경들이 군청 쪽으로 출동한 바람에 주민들 중 반은 군청에 들어오고, 반은 못 들어온 상황이 됐어요. 그런데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전경과 대치하고 있던 어르신이 나중에 집에 돌아가자마자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돌아가시는 일이 발생했어요. 그날 굉장히 추웠거든요. 이대론 안 되겠다고 생각했죠”

그 후 그는 시민사회와 연대를 조직하는 데 적극 나서기로 했다. 그런데 난관이 생겼다. 3월에 경찰 수배가 떨어진 것. 그는 잠시 덕적도에 숨어 지내다 인천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중구 답동성당에 농성장을 차렸다. 그곳에서 시민사회단체, 대학생들과 접촉했고, 핵폐기장을 반대하는 세력을 늘려갔다. 그는 그해 5월 1일 구속됐고, 영등포구치소에서 지내다 정부가 굴업도 핵폐기장 지정을 철회하면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2월이었다.

부당한 섬 행정들과의 싸움

그는 고향 덕적도에 뿌리를 내리기로 마음먹고 선친이 운영하던 여인숙을 정비해 운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당한 행정은 그가 가만있게 놔두지 않았다.

“집 앞 서포리해수욕장 가는 길에 소나무 숲이 있어요. 어느 날 그곳에 철재빔을 막 내려놓더라고요. 그래서 뭐 하려는 것이냐고 물었죠. 산책로를 만들고 다리 같은 것도 설치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어이가 없었어요. ‘소나무 숲 보호ㆍ관리도 못하면서 철재를 설치하는 게 말이 되냐. 통나무면 몰라도’ 했더니, ‘예산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면 단계적으로 하면 되지 않느냐고 따졌죠. 그리고 중단시켰더니, 군청에서 난리가 난 거예요. 그런 일이 없었거든요.

하루는 군수가 군청 과장 열댓 명을 집으로 보냈더라고요. 가서 설득하라고. 계속 못살게 굴더라고요. 거기다 면장도 오고, 주변 사람 다 와서 압력 아닌 압력을 넣는 거예요. 그래서 ‘좋다. 기둥을 나무로 하고 철재 빔은 녹슬지 않게 방수페인트를 세 번 입히고 매해 칠하라’는 조건으로 허락했죠”

그가 부당한 행정에 맞선 일화는 더 있다.

“관에서 무슨 일을 하려면 공청회나 설명회를 하잖아요. 그런데 섬엔 그런 게 없었어요. 공무원 맘 대로였죠. 한번은 시멘트로 도로 포장공사를 했는데, 크랙(=균열)이 쭉쭉 발생한 거예요. 그래서 토목을 하는 지인들한테 물어봤죠. ‘부실하게 공사를 해서 그렇지,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하더라고요.

마침 이장을 맡고 있었는데, 이장한테 준공검사 승인을 받아야한다고 하대요. 그래서 못해준다고 했죠. 하청에 하청을 하다 보니 부실공사를 한 거예요. 균열 구간을 모조리 드러내고 다시 공사하라고 해, 결국 그렇게 했죠. 그런 일이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니 섬 공사를 하면서 돈을 얼마나 남겨먹었겠어요”

무분별한 모래 채취 반대 운동 “시가 나서서 협의기구 운영해야”

▲ 허선규 인천경실련 해양위원장.
2005년, 그는 인천 앞바다 선갑도와 울도 등지에서 무분별하게 벌어지던 모래 채취를 반대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인천녹색연합에서 일하던 한승우씨가 모래 채취의 폐해를 이야기하며 반대운동을 하자고 제안했고, 둘은 쉽게 의기투합했다.

그는 자월도 주민들과 함께 정부를 상대로 싸웠다. 그 바람에 1년 동안 모래 채취는 중지됐다.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돼 고건 총리가 권한을 대행하던 때였다. 고건 총리가 옹진군수에게 날마다 전화해 모래를 파게 해달라고 할 정도로 정부에서 난리가 난 일이다.

“엄청나게 큰 태풍이 지나간 뒤 서포리해수욕장을 갔는데, 해수욕장 모래 절반이 절단돼 없어지고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쓰러진 거예요. 그 원인이 인천 앞바다 모래 채취 때문이란 걸 알게 됐죠. 서포리해수욕장이 선갑도나 울도 등과 많이 떨어져 있지만, 30년 동안 모래를 거의 3억만 루베(㎥)를 퍼냈으니 아주 큰 웅덩이가 생긴 거고, 태풍이 불 때 섬 주위 모래가 그 웅덩이로 쓸려 들어간 거죠.

실제 선갑도 등의 예전 해도를 보면 수심이 7m 정도였는데, 그 때 실측했을 땐 40m나 됐어요. 또, 예전엔 풀등(=모래가 쌓이고 그 위에 풀이 수북하게 난 곳)이 문갑도와 굴업도 앞으로도 있었는데, 모조리 없어지고 대이작도에만 남아있어요. 이렇게 가면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는 생각에 반대운동에 나섰죠”

다급해진 정부가 그를 불러 회의도 했지만, 관계 공무원들은 실정을 몰랐다. 관계 공무원들은 그의 요구로 서포리해수욕장의 실태를 목격한 뒤에야 미안하다며 대책 마련에 나섰다. 정부는 모래 채취에 대한 옹진군의 세수입을 루베 당 800원에서 3600원으로 올리기로 했다. 그리고 그 세수입의 10%에 해당하는 금액을 채취업자들이 지역발전기금으로 내놓기로 했다. 그 후 5년간 3500만 루베를 채취했으니, 연간 평균 2000만 루베에서 700만 루베로 채취량이 크게 감소되는 성과를 냈다.

그는 “요즘은 다시 채취량이 늘고 있다”며 “보다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모래 채취를 무조건 반대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습니다. 옹진군으로써는 사실상 유일한 세수입원이고, 업자들에게 피해가 따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주민과 행정기관, 업체, 시민단체가 참여하는 협의체 구성이 필요해요. 인천이 관광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는 섬 자원이 없어지는 거거든요. 인천뿐 아니라 서울과 경기에서 사용하는 모래를 이곳 경기만(서해 중부에 위치한 해역)에서 충당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협의기구를 구성해 모래 부존량(=천부적으로 존재하는 양)과 분포, 채취량과 장소 등을 종합적으로 조사해 채취 계획을 장기적으로 세워야합니다. 정부는 수급만 하면 되니까, 관리하고 보전하는 일을 정부가 아닌 인천시에서 해야 합니다. 채취 장소 지정 고시 권한도 인천시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래 채취 반대운동을 하다 이른바 ‘별’을 하나 더 달았다. 당시 사법부로부터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여객선 요금 대중화로 숨통 틔어야

그는 오래 전 굴업도 핵폐기장 건설을 막아냈지만, 섬사람들이 너무 못살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굴업도를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이런 생각은, CJ그룹 계열사인 씨앤아이가 굴업도에 골프장과 리조트 등을 건설하는 ‘오션파크 관광단지’ 조성을 추진하고 있었고 이를 환경단체 등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그를 괴롭게 했다.

“주민들이 너무 못살고 힘들어하니 민간자본 유치든 공영 개발이든 굴업도를 개발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시민사회가 반대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아는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설득하려고도 했죠. 덕적면에 많이 살 때는 3만 5000명이 살았어요. 지금은 1200명밖에 안 돼요. 초등학교가 네 개에서 하나로 줄고, 섬이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에서 살길을 마련해야한다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연평도 포격사건 등으로 관광객의 발길은 더 떨어졌죠. 그때, 김송원 (인천경실련) 사무처장이 전화를 해서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섬사람들이 더 힘들 텐데, 인천시민사회가 무얼 해야 하냐고 묻더라고요”

그는 큰 안목에서 ‘연안여객선 요금 대중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게 되면 주민들의 숨통이 트고, 굴업도 개발에 목메는 게 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여객선 요금이 대중교통처럼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섬을 방문하고, 그러면 주민들이 먹고 살고, 젊은 사람들도 그걸 보고 섬으로 돌아오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 후 연안여객선 요금 대중화가 지역사회에 공론화됐고, 박상은 국회의원이 관련 법안을 발의해 현재 국회 해당 상임위원회에 올라가 있다.

섬이 섬답고, 경제생활이 가능했으면

그는 섬에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섬이 섬답게, 섬사람이 바다에 나가 일을 하고 조상이 물려준 자원들을 보전하고, 관광지로서 육지 사람들을 맞이할 수 있는 곳, 그래서 경제적 생활이 가능하고 육지와 서로 ‘윈-윈’할 수 있게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섬사람들과 자주 만날 기회가 있어요. 고향 선배의 친구가 연평도에서 어업을 크게 하다가 중국어선 불법조업 때문에 부도가 나고, 신용불량자가 되고, 집도 배도 경매로 넘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또, 수많은 사람들이 전철을 밟는다고 하니, 대책을 만들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했어요. 이걸 행정기관이나 정치인도 못하니 시민사회가 나서서 풀어줘야 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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