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이 만난 사람] 부평아트센터 떠나는 조경환 초대관장

“구청을 방문해 초대관장으로서 역할을 끝내겠다고 말하고 오니 홀가분했습니다. 제 역할인 ‘창업’은 끝났고, 이제 ‘수성’ 역할이 필요한 때입니다. 초대관장으로서 이렇게 마무리하게 돼 기쁩니다”

조경환(52) 부평아트센터 관장이 오는 24일, 임기 4년을 마감한다. 그는 초대관장으로서 2년, 그리고 연임한 2년 동안 부평아트센터의 기반을 닦고 틀을 만들었다. 지난 9일 오전 부평아트센터에서 그를 만나 ‘고별’ 인터뷰를 했다.

“최고는 아니지만, 주어진 여건에서 선방은 했구나”

▲ 조경환 부평아트센터 초대관장.
조 관장은 부평아트센터 개관(2010년 4월)을 앞둔 2009년 8월 초대관장으로 임명됐다. 그 이전부터 1년 가까이 부평아트센터 개관 자문위원으로 참여했으니, 실제는 5년 동안 부평아트센터를 위해 일한 셈이다.

부평아트센터는 민간이 지은 공공시설을 정부나 지자체가 임대해 사용하며 건립비용을 갚아나가는, 이른바 비티엘(BTL:Build Transfer Lease) 방식으로 지었다.

조 관장은 “초대관장에 응모할 때만 해도 될 것이라 생각은 안 했어요. ‘BTL이라 어렵다. 제대로 운영해야한다. 구 여건상 어려운 게 상당히 많은데, 이걸 실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관장이 필요하다’는 의지가 부평구에서 굉장히 강했던 것 같습니다”라고 회상했다.

그는 이어, “연강홀(현 두산아트센터) 극장장, 국립중앙극장 공연기획팀장, 안산문화예술의전당 공연기획팀장에 이어 부평아트센터 관장까지, 23년 동안 주어진 이 역할을 운명처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개관의 어려움 알고 있었지만, 자문위원을 하면서 책임감이 생긴 것 같아요”라고 덧붙였다.

기초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극장은 대기업이 운영하는 극장이나 국립극장과 아무래도 달랐다. 운영 예산이 적고, BTL이라는 중압감도 따랐다.

“초기엔 막막했어요. 그런데 직원들의 도움으로 최고는 아니지만, 주어진 여건에서 선방은 했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또, 공무원들이 지원을 잘해줬어요. 밖에서 보면 아쉬움이 있겠지만, 행정과 직원들이 혼연일체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극장 안은 문화상품, 극장 밖은 문화 복지서비스”

조 관장은 재임 중 많은 성과를 냈다. 어린이연극학교는 지원자가 줄을 설 정도로 계속 성공을 거두고 있다. 무료 행사인 로비음악회, 거리야놀자, 피크닉콘서트도 호응을 얻어 부평아트센터를 대표하는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프로그램은 그가 내세운 ‘아트 포 에브리 원(Art for every one)’ 즉, ‘모두 함께 하는 예술’에 녹아 있다.

“안산 거리극 축제, 국립극장 열대야 페스티벌, 오페라 등 다양한 제작 공연을 해봤어요. 가장 중요한 건 시간이 없어서, 경비가 부담돼서 극장에 못 오는 분들을 올 수 있게 하는 것이죠. 단순하게 극장을 극장 안(=공연 등 프로그램)으로만 보면 안 돼요. 극장 안은 문화상품으로 보고, 극장 밖은 문화 복지서비스로 봐야 해요. 무료 행사를 많이 열어 많은 분들에게 문화 향유의 기회를 줬다는 게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2년을 하든, 4년을 하든 지역에서 승부를 내보자. 진심이면 통한다’는 생각으로 관장직에 임했다고 들려줬다. 길어야 4년 임기가 보장된, 계약직인 그가 경기도 평촌에서 부평 십정동으로 가족과 함께 이사 온 것은 그의 그런 의지를 보여줬다.

“아버님(88)이 마음에 걸렸어요. 국가유공자(상이군인)이시거든요. 평촌 살 때 바로 집 앞에 지정 병원이 있어 치료 받기 편하셨는데, 아버님을 설득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지역의 극장인 만큼 지역에 살면서 지역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서울 산동네서 문화예술경영자 꿈 싹터

그의 직업은 문화예술 기획자 또는 문화예술 경영자다. 그는 어떻게 23년 동안 이 길을 걷게 됐을까?

“경상북도 문경 점촌에서 태어났지만, 저는 고향을 서울 사당동 산동네로 여겨요. 사당동이 옛날에는 범죄도시, 못사는 동네로 유명했어요. 국민(초등)학교 2학년 때 ‘성난 송아지라’는 영화를 봤어요. 사당동에서 순회상영을 했는데, 감동적이었어요. 그 때 결심했던 것 같아요. ‘나도 저 영화처럼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일을 만들어야겠다.’ 그 후로 계속 이것만 생각하고 공부도 이것만 했죠”

그는 1985년 대학을 졸업했다. 하지만, 당시는 극장이 별로 없었고, 자리도 없었다. 극장에서 일하는 사람을 사회낙오자처럼 여기던 때였다. 그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귀국해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두산 동아출판사 공채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두산에서 극장(=연강홀)을 설립한 것. 그리고 그룹 안에서 극장장을 뽑는데, 당시 두산그룹 기획조정실장이 그를 추천했다.

“운명처럼 시작됐죠. 뛸 듯이 기뻤어요. 대기업 차장 월급 받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거잖아요. 아! 운명이다, 이게 운명이다, 생각했죠”

국립중앙극장 공연기획팀장으로 갈 때도 그랬다. 국립중앙극장에서 ‘향후 나아갈 길’을 주제로 한 세미나가 열렸는데, 그가 발제할 기회를 얻었다. 세미나 다음 날 당시 국립중앙극장 관장이 전화해 식사를 하자고 했다. 나가 보니 그가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해왔다.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고 했는데, 다음 날 문화관광부 총무과에서 빨리 응시하라고 전화를 했다. 그 때도 그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운명적으로 타고 났구나’라고 생각했다.

관객이 기절할 때까지 몰입, 또 몰입

▲ 조경환 부평아트센터 초대관장.
그는 주변에서 ‘일벌레’ 또는 ‘일중독자’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일중독자는 아니고, 몰입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참 답답한 게, 소비자들은 아무리 감동을 받아도 표현을 잘 안 해요. 그래서 더 많은 몰입이 필요해요. 기업에서 ‘고객이 오케이(OK)할 때까지’라는 표현을 쓰는데, 우리는 고객이 기절할 때까지 해야 한다고 하거든요. 그래서 이 일이 힘든 것 같아요. 새로운 통계수법이나 마케팅기법으로 가능한 게 아니거든요. 극장이 깨끗해야하고, 공연도 좋고, 직원이 친절하다는 소문이 돌아야 해요” 그의 말은 더 이어졌다.

“매진되면 기분이 정말 좋아요. 합리적 운영, 경영 성과, 공공성이 극장이 추구하는 목표라 할 수 있는데, 지역의 감정지수를 높여 지역민이 이 지역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게 하는 일도 중요해요. BTL이라 경영이 어려운건 운명이지만, 아트센터는 부평주민들에게 필요한 기관이거든요. 지역주민이 문화 소비를 잘 하는 것과 더불어 가족음악회처럼 지역 연계프로그램을 만들어 극장의 주인공이 돼서 잘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죠. 대기업에 있을 땐 오너가 급여를 주죠. 그런데 지자체의 극장장은 세금으로 월급을 받아요. 월급 이상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중요하죠. 그러지 않았으면 여기에 이사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는 지역과 함께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상정초등학교 운영위원으로 4년째, 부평도서관 운영위원으로 3년째 활동하기도 한다. 그는 학교에서 창의적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는 오케스트라나 연극 등 예술교육이 필요하다고 제안했고, 이를 상정초등학교 교장이 동감해, 상정 앙상블(오케스트라)이 만들어졌다.

그는 사적인 모임에도 가지 않았다고 했다. 이유는 ‘기(氣)가 빠질까봐’였다. “사적인 모임에 일체 안 갔습니다. 기가 손상될까 봐요. 모임에 나가면 내가 처한 어려운 상황을 떠벌릴 수 있고, 여기에 몰입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그는 “올해 처음으로 월요일마다 연차를 내고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문화콘텐츠 강의를 했어요. 이게 관장 이외의 활동의 전부”라고 덧붙였다.

이야기는 그가 부평아트센터 초대관장으로 오면서 내세운 ‘모두 함께 하는 예술’ 이야기로 돌아왔다.

“클래식에 ‘1% 통계학의 신화’라는 게 있거든요. 상위 1%를 대상으로 한다고. 조수미나, 김연아나, 이름이 알려진 사람으로 기획하긴 쉬어요. 하지만 극장을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극장을 만드는 데 돈이 많이 들어가는 이유로 고급 예술로 지역의 삶의 가치를 높이자는 부분도 있어요.

부평아트센터를 개관하고 보니 여기 십정동, 인천이라는 지역에 문화 혜택을 보지 못하는 분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서 저녁에, 야외에서, 무료로 양질의 공연을 제공하자고 생각했어요. 그러면 ‘아트센터가 무서운 곳이 아니구나’ 하고 여기게 되거든요. 오페라는 어렵고, 뮤지컬은 비싸고, 연극은 왠지 재미없을 것 같고, 가격 부담과 심리적 두려움이 있어요. 심리적으로 극장을 가깝게 느끼는게 중용해요. 그게 초기에 중요한 해결 과제였습니다”

“문화재단과 아트센터의 역할 구분해야”

화제를 부평아트센터와 지역 예술인들과의 관계로 돌렸다. 그는 극장과 문화재단의 역할을 구분해야 한다고 했다.

“(부평아트센터) 상주단체 중심으로 관계를 맺고 지원했어요, 지역 예술단체들과는 ‘포커스 인 부평’ 등을 통해 연계하려고 노력은 많이 했는데, 우린 재단이 아니거든요. 재단은 예산 등을 지원해주고, 극장은 예술단체들의 자생력을 길러줘야 해요. 그런데 극장을 재단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공연 제작에 예산을 지원하는 건 재단의 역할이고, 우리 역할은 상주단체처럼, 가장 좋은 기간에 기간을 늘려 공연하게 해주는 것이죠. 재단의 지원을 받아 극장과 예술단체가 공동으로 공연을 기획하는 건 가능하죠. 그래서 마케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경쟁력을 키워주는 것이거든요”

그의 이야기는 정부의 문화예술정책으로 확장됐다.
“과거 예술가 지원정책에서 지금은 문화예술 향유자 지원정책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지원금을 제작에 투여하기 보단, 예술가 빚 갚는 데 상당 부분 쓰이고, 인건비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데, 예술이 발전 하겠느냐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됐죠. 예술은 노동집약적이에요. 옛날에 한 사람이 자동차를 열 대 만들었다면 지금은 칠십대 만들어요. 하지만 도예가는 아무리 만들어도 다섯 개밖에 못 만들거든요. 월급은 열 배나 차이가 나죠. 그래서 국가가 개입해 인간문화재 등을 지정합니다. 그게 예술가 상생력이죠.

유럽은, 프랑스는 중앙과 지방정부가 (월급의) 50%를 지원하고, 나머지는 예술가가 공연수입으로 충당합니다. 예술가들이 자격증을 따서 런던시청 앞이나 템즈강 등지에서 버스킹을 해요. 길 가던 사람들이 돈을 줘요. 하트 머니라고, 마음으로 주는 돈이거든요. 일본도 300명 정도가 그렇게 하고 있어요. 안산 거리극 축제 만들 때 안산을 그렇게 만들려고 했어요. 예술가들이 평생 예술을 할 수 있는 놀이터, 공터를 만들어줘야 하거든요. 예술가들에게 그런 기회를 주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한류 레벌 업, 문화예술공동체 만드는 데 기여할 것”

▲ 부평아트센터를 뒤에 두고 기념촬영한 조경환 초대관장.
조경환 관장이 떠난 뒤 부평아트센터는 어떤 길을 걸을까? 그는 부평아트센터가 도약할 수 있는 내부 힘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울러 정치가 지나치게 개입하고 관여하는 걸 경계했다.

“관객은 극장을 기다려주지 않아요. 한번 망가진 극장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오더라도 회복되기가 힘들죠. 지자체가 운영하는 극장인 이상, 극장을 운영하는 전문가와 행정이 조화를 잘 이뤄야 해요. 전문가는 정치가와 의회를 설득해야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왜’와 ‘무엇을’이라는 전문성이 필요하죠. 어떤 공연을 왜 하는지, 설득해야한다는 겁니다. 행정은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를 고민하면 돼요. 행정은 공정하고 균형 있게 할 수 있거든요”

그는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좋은 문화를 세계적으로 ‘레벨 업’하고 싶어요. 기획자로서 ‘한류’의 더 큰 그림을 그려보자는 거죠. 국악과 한국무용에 관심이 많아요.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라 클래식이나 대중음악에 기획자가 몰려요. 그런데 클래식은 재현하는 거예요.

베르디, 푸치니, 바흐…. 그것은 창작이 아니고, 연습해 숙련도를 높이는 거죠. 우리의 문화예술은 창작이 많아요. 영화가 한류 1.0이고, 드라마와 케이-팝(K-POP)이 2.0, 전통문화가 3.0이라고 합니다. 케이-팝 가수가 나라의 문화 이미지를 바꾸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기획자를 양성하는 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는 은퇴 후 하고 싶은 일도 들려줬다. “귀촌이라도 해서 문화학교를 하고 싶어요. 23년 동안 도움을 받았는데, 경험을 살려 지역에서 문화예술공동체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그는 어느 때를 은퇴시기라고 생각하는 걸까? 예상보다 빠른 56세에서 58세 사이라고 했다. 너무 이른 것 아니냐고 묻자, “육십, 칠십 대에 들어서면 열정도 힘도 빠지지 않겠어요. 열정과 힘이 남아 있을 때 기여하고 봉사해야죠”라고 했다.

참고로 그는 부평아트센터 관장직을 그만둬도 이사 가지 않고 십정동에서 살 것이라고 했다. 부평의 주민으로, 이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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