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사람]박혜경 인천 연수구 무용협회장

“무용은 춤의 일부이고, 춤은 몸짓의 일부에요. 발레니, 현대무용이니, 벨리댄스니 따로 떼어 놓고 구분하지만, 모두 몸짓에 불과하죠.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어요”

박혜경 연수구 무용협회장(48ㆍ사진)의 이야기이다. 그는 연수문화공원(연수구 연수동)에서 17일 열리는 ‘토요문화마당-락&몸짓 라이프 스토리’와 24일 ‘연수 국제댄스페스티벌’ 공연에서 기획과 총안무를 맡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17일 공연에선 젊은 무용수들과 함께 직접 무대에 오르기도 한다. 오십이 다 된 나이에도 여전히 무대에서 춤을 추고 싶다는 그를 7일 남동구 구월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 박혜경 인천 연수구 무용협회장.
“합격자명단에 내 이름이 없다니”

“부모님이 ‘도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저럴까’ 하실 정도로 텔레비전에서 춤추는 장면만 나오면 따라 했어요. 아주 어렸을 때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던 것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보시면 돼요”

가늘고 긴 목, 보통 사람들보다 내려온 어깨가 만들어내는 선이 영락없는 무용수다. 그가 본격적으로 무용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전라남도 해남에서 자란 그는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광주로 왔다.

“친구들이 야간자율학습을 할 때 저는 학원에 갔어요. 거의 밤 11시까지 연습을 해야 했어요. 힘들긴 했지만 무용이 좋았고, 가고 싶은 대학도 있고, 친구들도 다 견디니까, 저도 그냥 열심히 했어요”

대학 입시는 그에게 첫 번째 좌절을 안겼다. 지원한 대학에서 낙방한 것이다. 학교 성적도, 무용 실력도 모자람 없이 합격할 거라 믿었던 그에겐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합격자 명단을 보러 갔는데, 제 이름이 없더라고요. 장학생 명단이 따로 붙어 있기에, ‘거기에 이름이 있겠구나’ 하고 확인하러 갔죠. 그곳에서도 제 이름을 찾을 수 없었어요” 그는 처음엔 자신이 떨어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곧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무용을 하려면 키나 신체 사이즈가 중요하더군요. 제 키는 155cm가 조금 안 돼요. 실력으로도 어찌 할 수 없는, 제 한계였던 거죠” 그는 결국 후기에서 서울예술전문대학에 입학했다.

토슈즈 벗으니 날아갈 것 같아

대학에서 그는 전공으로 발레를 선택했다.

“학원 선생님이 발레를 하라고 권하셨어요. 당시엔 키가 크면 현대무용, 작으면 발레를 선택해야 진학에 유리했거든요. 적성까지 따져볼 생각은 못했죠”

무용과 학생들은 전공 이외에 한국무용과 발레, 현대무용을 모두 이수해야한다. 대학에서 처음 현대무용 수업을 들은 그는 마치 신세계를 만난 듯했다. 테크닉 구현이 우선인 발레에 비해, 현대무용은 몸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둔다.

“발레는 정해진 동작을 완벽하게 했을 때 박수를 받아요. 턴(돌기)을 열 번 해야 한다면, 그걸 다 마쳐야 박수를 받죠. 그런데 현대무용은 몇 바퀴를 도느냐는 중요하지 않더군요. 감정과 상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요. ‘너 뭐해?’를 춤으로 표현할 때, 꼭 몇 바퀴를 돌아야 그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몸을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움직일 수 있는 점이 가장 좋았다. “토슈즈를 벗으니 몸이 날아갈 것 같았어요.(웃음) 현대무용은 맨발이잖아요. 바닥을 구르고, 엎드려 기고, 물건을 때려 부수고, 그 어떤 직설적인 표현을 해도 모두 수용되니 정말 살겠더라고요. 제 적성엔 현대무용이 잘 맞았던 거죠” 그는 전공을 현대무용으로 바꿨다.

현대무용단 생활에 행복

대학을 졸업하기 전, 그는 잠시 뮤지컬을 공부했다. 작은 키에 이어, 현대무용이라는 장르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국공립 무용단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당시엔 국공립 현대무용단은 하나도 없었어요. 지금도 시립무용단은 모두 ‘한국무용’단이잖아요. 갈 곳이 없다는 것에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그땐 무용수 이외에 어떤 길이 있는지, 제가 뭘 할 수 있는지 잘 몰랐거든요”

2년 동안 발성법을 배우고 서울시립가무단(현 서울시뮤지컬단)에 응시했다. 하지만 3차 면접에서 떨어졌다. 그는 졸업 후, 지인의 소개로 인천의 무용학원에서 강사를 시작했다.

인천에서 그는 사설 현대무용단이 있음을 알게 됐다. 당시 인천전문대학 교수가 운영하던 ‘인천현대무용단’이 그것이다. 무작정 그곳을 찾아가 간단한 오디션을 본 후 무용단 생활을 시작했다.

“현대무용단이 있다는 걸 알고 무척 기뻤어요. 강사 일보다는 무대에 서는 게 훨씬 좋았거든요”

그는 무용단 발표회에 처음으로 자신이 안무한 작품을 올리기도 했다.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다.
“이전엔 무용수로서의 삶만 생각했지 작품을 짜보겠다는 생각은 미처 못 했어요. 제가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드디어 찾았죠”

이후 그는 40여 개가 넘는 작품을 안무하며 2002년 인천무용제 대상ㆍ전국무용제 은상,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예술상 등을 수상했고, 2005년 3월엔 사단법인 한국무용협회 인천지회장으로 취임했다. 만 39세로 지회장에 오른 경우는 전국에서 처음이었다. 원로들이 이끌어가던 한국무용협회의 판도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어떤 몸짓이든 다 해보자”

그는 한국무용협회 인천지회장으로 취임한 후 무용의 지평을 보다 넓히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한국무용협회 회원이 되려면,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해야 해요. 이걸 제가 바꿀 순 없었어요. 한국무용과 발레, 현대무용, 이렇게 세 개 분야로만 나뉘어 있었는데, 당시 대학엔 비보이나 힙합, 벨리, 살사 전공도 있었어요. 그래서 이들과도 함께 하기 위해 인천지회에 ‘생활무용’ 분야를 따로 만들었어요”

그가 이런 결심을 한 데는, 1991년 한 해 동안 프랑스에서 무용을 배우고 온 경험이 컸다. 그곳에서 그는 새로운 무용의 세계에 눈을 떴다.

“그곳에선 탭댄스나 볼륨댄스도 정식 무용 과목에 포함돼있더군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똑같은 몸짓인데, 왜 그동안 힙합이나 재즈댄스 해볼 생각을 안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어요. 마임이나 방송댄스면 어때요? 그때 결심했죠. 앞으로 어떤 몸짓이든 다 해보겠다고요”

그가 만든 무용단 ‘코리아댄스컴퍼니(한국현대무용단의 영문이름)’를 ‘코리아액션댄스컴퍼니’로 개명한 이유도 다양한 장르의 춤을 추는 제자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였다.

“생활무용은 인천문화재단에서도 지원을 안해줘요. 그래도 제 무용단에 소속돼있으면 함께 작품을 할 수 있잖아요. 제가 훌륭한 사람은 아니지만, 춤을 사랑하는 후배들이 커나갈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관객 입장에서 이만한 공연 없을 것

그가 준비하고 있는 공연 두 개에서도 온갖 장르의 춤이 등장한다. 17일 오후 7시 30분 공연은 현대무용과 힙합, 벨리댄스, 아프리카 춤, 한국무용이 한 무대에서 어우러진다. 24일 오후 6시 30분 공연은 힙합과 벨리댄스가 사전 공연을 열고, 이어 독일과 일본, 기니에서 참가한 팀이 출연해 국제댄스페스티벌의 묘미를 선사한다.

“17일 공연은, 기존에 봐온 것처럼 장르마다 각각 다른 공연으로 무대에 올라가는 게 아니에요.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흐름에 맞는 적절한 춤이 등장해요. 아마 이만한 공연은 없을 거라 생각해요. 주위 분들과 함께 오셔서 춤이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는 걸 경험하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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