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⑩

노라노|김성희 감독|2013년 개봉

 
지난 주말 박문칠 감독의 ‘마이 플레이스’를 끝으로 9회 인천여성영화제가 끝났다. 만원사례(?)를 보내주신 개ㆍ폐막작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관객들이 선택한 영화, 상영 이후 관객과의 대화까지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영화를 꼽자면, 단연 ‘노라노’다.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낯설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울고 웃으며 영화에 반응했다. 그만큼 ‘노라노’는 대중의 감성을 건드리는 ‘무언가’를 품은, 꽤나 대중적인 다큐멘터리이다.

영화 제목 ‘노라노’는 이 영화의 주인공 이름이다. 성은 노, 이름은 노라. 현재 나이 85세 할머니다. 하지만 80대 호호할머니로 보이지 않는다. 영화가 끝난 뒤 어느 관객이 말했듯 손짓 하나 눈길 하나에 멋이 뚝뚝 흘러넘친다. 어디 멋뿐이랴, 그의 인생에는 열정과 패기가 넘친다. 85세 노인이 된 지금까지도.

노라노는 한국에서 최초의 패션쇼를 연 대한민국 1세대 패션디자이너다. 시대를 읽는 아이콘이 된 윤복희의 미니스커트와 펄시스터즈의 판탈롱 노라노의 작품이다. 최은희ㆍ엄앵란ㆍ최지희 등 우리네 부모세대가 열광했고 따라했던 한국영화 여배우들의 스타일, 이것도 노라노의 손에서 나왔다.

지금이야 어지간히 특별한 옷이 아닌 이상 매장에서 기성복을 사 입지만, 예전에는 집에서 직접 만들든지 양품점에서 맞춰야만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원하는 디자인에 자신에게 맞는 치수를 골라 사 입는 기성복이 가능하게 했던 이 역시 노라노다.

노라노의 활약은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세계적이었다. 그 옛날 유명한 패션잡지인 ‘보그(Vouge)’ 미국판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고, 미국의 유명 백화점 1층 디스플레이를 모두 휩쓸기도 했다. 그야말로 한국 패션계의 살아 있는 신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노라노를 모른다. 나 역시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그의 존재를 몰랐다. 지금 패션계에 종사하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외국의 유명한 디자이너들, 스타일리스트들은 줄줄 꿰지만 한국 패션의 처음을 열었고 지금까지도 정정하게 작업하고 있는 노라노는 잘 모른다.

이 영화를 통해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노라노가 그 시절의 금기와 낙인을 뚫고 패션디자이너로 우뚝 서기까지, 용기와 열정에 감동을 받는다. ‘옷은 보여주기 위한 예술이 아니라 입을 사람을 위한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옷을 입는 여성들의 삶이 그 옷을 통해 당당해지길 바란다’는 그의 패션철학에 깊이 공감한다. 감동이 클수록, 공감의 끄덕임이 많을수록 머릿속엔 질문 하나가 맴돈다. ‘우리는 이제껏 노라노를 왜 몰랐을까’

얼마 전 작고한 앙드레김은 패션계의 어르신으로 대접받았다. 패션에 문외한인 사람들도 다 알 정도로 앙드레김은 국민디자이너였다. 그러나 비슷한 연배,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노라노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패션사에 남긴 업적을 보자면 결코 만만치 않은데, 도대체 무엇이 노라노를 세상에 드러날 수 없게 했던 것일까?

그의 삶을 보면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말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으려 학업을 중단하고 열일곱 나이로 결혼했다. 결혼하자마자 남편은 학도병으로 징집됐고 층층시하 시집살이가 시작됐다. 실종돼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돌아왔지만, 더 이상 시집살이에 자신의 청춘을 바칠 수 없었다.

이미 가본 길(시집살이)을 갈 것인가, 가보지 않은 길을 갈 것인가, 고민하던 노라노는 ‘가지 않은 길’을 택했다. 그리고 패션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때 이름을 명자에서 노라로 바꾸었다. 그래, 맞다.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에 나오는 바로 그 ‘노라’다. 집 나온 여자 노라.

노라노는 이 사회에 순응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의 패션철학은 현대 상업주의와도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노라노는 삶으로 패션으로 시대와 싸워온 투사였다. 그것도 아주 멋스럽게 싸운 투사. 그런 이를 주류 질서가 반갑게 환영할 리 만무하고, 그러니 우리는 앙드레김만 기억할 수밖에. 어디 노라노뿐이겠는가? 수많은 여자들이, 시대와 불화한 수많은 소수자들이, 패션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그렇게 ‘없던 존재’인 양 잊히고 있겠지.

고맙게도 ‘노라노’가 가을이면 극장에서 개봉할 예정이다. 물론 극장계를 점령한 CGV 같은 멀티플렉스 상영관에서는 개봉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지만, 조금 더 품을 들여 꼭 보시길 권한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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