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람] 영화감독 겸 배우 이란희씨

2009년 개봉한 영화 ‘낮술’(감독 노영석)은 전국 관객 2만 4000명을 넘어서며 독립영화로는 이례적인 성공을 거뒀다. 이 영화에서, 살면서 한 번이라도 만날까 두려운, 못 생기고 욕 잘 하는 여자 ‘란희 누나’ 역할로 관객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긴 이가 있다. 영화배우이자 연출가 이란희(42·사진)씨다.

그가 11일 개막하는 9회 인천여성영화제 트레일러 필름(홍보 영상)에 등장했다. 원피스를 입은 그는 ‘낮술’의 그와 사뭇 다르다. 카메라는 그의 몸 구석구석을 관찰하듯 훑고, 이런 카메라의 시선을 못 견디겠다는 듯, 그가 갑자기 뒤를 돌아 카메라를 밀쳐낸다. 오랜 만에 ‘스크린’에 등장한 그를 4일 남동구 간석동에 있는 카페에서 만났다. 그에게 영화와 ‘여배우’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가수 되고 싶어 대학 진학해

▲ 영화감독 겸 배우 이란희씨
이란희는 그의 본명이다. 주민등록증에는 ‘이난희’라고 돼있다. “이름 때문에 짓궂은 친구들이 ‘난이 난이 못난이’라고 놀렸는데, 그게 너무 싫더라고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제 이름이 ‘란희’도 되고 ‘난희’도 된다는 걸 알았어요. 중학교에 올라가면 ‘란희’란 이름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는 이후부터 쭉 란희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그의 연기 본능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드러났다. 동네 친구들을 모아 소꿉놀이를 하듯 연극놀이를 했던 것. “학교 끝나면 동네 아이들과 모여서 노는 게 일상이었어요. 제가 연극을 하자고 했죠. 아이들마다 역할을 정하고, 공연할 날짜도 잡았어요. 장소는 동네 ‘목욕탕 앞’이었죠. 관객으로 부모님을 초청했는데, 아무도 보러 오지 않아서 그냥 우리끼리 했어요. 놀이 삼아 한 것이지만 지금도 기억에 남아요”

중ㆍ고등학교를 다닌 6년 동안 그는 오락부장을 도맡았다. “소풍가서 사회도 보고, 어떻게 하면 재밌게 놀지를 고민하는, 명랑하고 활동적인 성격이었어요. 외모가 중성적인 데다, 노래도 곧잘 해서인지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좀 있었어요”

고등학교 2학년 여름, 텔레비전에 등장한 한 사람이 그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담다디’로 강변가요제 대상을 수상한 한양대 대학생 이상은이다. “당시 대학생들은 가요제를 통해 가수로 데뷔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저는 이상은 같은 가수가 되고 싶었죠. 가수가 되기 위해서라도 대학에 꼭 가야했어요” 그는 명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만일 가수가 안 되면 영어교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극단에서 배운 것으로 지금껏 먹고 살아

대학에서 그는 공교롭게도 연극동아리에 가입했다. 학기 초 같은 과 친구가 교내 연극동아리의 공연 입장권을 그에게 건넸다. “공연 날이 마침 우리 과 전체 선후배가 한 자리에 모이기로 한 날이었어요. 괜히 가기 싫던 차에 ‘연극이나 보자’ 싶어 500원을 주고 입장권을 샀죠”

공연장에서 그는 역시 과 모임에 가지 않은 선배를 만났다. 선배는 그를 연극반으로 안내했고, 연극반 선배들은 그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그들의 관심이 좋았다. 이것을 계기로 그는 연극반에 들어갔다.

당시 대학은 지금과 달리, 취업보다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훨씬 많았다. 연극동아리는 현실 비판적이고 사회참여적인 성격이 짙었다. 동아리 활동으로 그의 성적표는 낙제 투성이었다. 6년 만에 어렵게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극단 ‘한강’에 들어갔다.

극단 ‘한강’은 공연 기획과 대본 내용 등을 배우와 제작진이 함께 완성하는 공동창작방식으로 운영됐다. 오전엔 2시간 동안 체력단련을 하고, 무술과 풍물도 배우고, 글 쓰는 법도 배웠다. 무대와 극 의상도 직접 만들고, 때론 기획서를 쓰기도 했다. 8년 동안 이어진 극단생활은 인생에 필요한 것들을 압축해 배운 소중한 시간이었다. “대학 때 배운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걸 경험했어요. 이때 배운 것으로 지금까지 먹고 사는 것 같아요. 제 생업이 연극수업이잖아요”

영화 ‘낮술’ 출연으로 인기 얻어

그는 2005년 개봉해 큰 인기를 끈 영화 ‘웰컴 투 동막골’로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출연자를 모집하는 공고를 본 남편이 그의 프로필을 제출한 것이다. 그의 남편은 영화 ‘낮술’에서 트럭운전사로 나온 배우 신운섭씨다.

“웰컴 투 동막골에서 부락민 중 한 명으로 등장했어요. 대체로 단역들은 본인 촬영분이 있을 때만 촬영장에 가는데, 저는 특이하게 영화 촬영 초기부터 스텝들과 함께 움직였어요. 덕분에 영화 만드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죠”

영화 현장에서 재미를 느낀 그는, 곧바로 영화 연출 학교에 들어가 6개월 과정의 수업을 들었다. 수강생 중엔 노영석 감독도 있었다. 시나리오를 준비하던 노 감독은 2006년 여름 그를 불러내 “시나리오에 ‘예쁜 여자’와 ‘못 생긴 여자’가 한 명씩 나오는데, 누나는 이중 못 생긴 여자 역할”이라며 그에게 출연할 것을 제안했다. 2007년 1월, 두 주 동안 촬영한 ‘낮술’은 2009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매진을 기록하며 주목을 받았고, 이후 정식 개봉을 통해 독립영화로는 말 그대로 ‘대박’을 쳤다.

“개봉한 극장으로 무대인사도 다니고, 무척 바빴죠. 홍대에 가면 저를 알아보는 분들도 있었어요”

‘낮술’ 성공에 이어 그가 연출한 단편영화 ‘파마’는, 2010년 독일 함부르크국제단편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상 수상을 비롯해 베를린영화제 단편경쟁부문, 노르웨이단편영화제 국제경쟁부문 등 수많은 국내외 영화제에 초청ㆍ상영되는 쾌거를 이뤘다. “이때는, 하기만 하면 당연히 잘 되는 줄 알았어요.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았죠”

영화 속 여성의 역할, 지극히 한정돼있어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현실의 높은 장벽이 그를 가로막았다. 소속사가 없는 그에게는 영화 출연 기회가 쉽게 오지 않았다. 2011년부터 단편영화제작 지원 신청에서도 번번이 탈락했다.

“40대 여성인 제가 할 역할이 많지 않더군요. 제가 흔히 말하는 ‘예쁘고 여성스러운’ 인상이 아니잖아요? 현실에는 있지만 (기자를 가리키며) 이런 여성 캐릭터를 영화 속에선 찾아볼 수 없어요. 제 남편만 봐도 ‘인상 좋은 택배기사’ ‘거친 운전사’ ‘중학생 아들과 의사소통 되는 아버지’ 등, 역할이 다양해요. 하지만 40대 여성의 이미지는 ‘마르고 병약한 엄마’ ‘인자한 엄마’ ‘사교육에 몰두한 주부’ 등으로 한정돼있어요”

그는 말을 이었다. “제 시나리오에는 남자가 잘 나오지 않는데, 그 이유는 제가 그들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남자들은 여성을 많이 등장시키더군요. 과연 여성에 대해 얼마나 잘 알까 하는 의문도 들어요”

이야기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인천여성영화제로 옮겨 갔다. “몇 해 전 인천여성영화제에서 제 영화 ‘파마’를 상영하면서, 저를 자문위원으로 위촉한 적이 있어요. 그때 맺은 인연으로 이번 트레일러 작업도 함께 하게 됐죠”

그는 내친 김에, 이번 영화제에서 준비한 ‘여배우 열전’(13일 오후 4시, 7시) 사회도 볼 예정이다. “‘남배우’라는 말은 없는데 왜 굳이 ‘여배우’라는 말을 쓸까, 궁금해요. 여성들이 영화에서 마치 ‘꽃’처럼 다뤄지고 쓰이니까 ‘여배우’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아마 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작품 속 여성들은 일반 영화와는 많이 다를 것 같아요. 관객들과 이런 이야기들을 나눠보고 싶어요”

그는 마지막으로 “꾸며진 모습이 아닌, 실제 여성들의 다양한 삶이 영화에서도 많이 다뤄졌으면 좋겠다”며 인터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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