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성윤 푸른솔한의원 원장
‘간덩이가 부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그리 느긋한 상황에서 발화되지 않는 관계로 보통은 좀 더 세게 발음해서 간‘땡’이가 부었다고 하지만, 여기는 신문지상이니 표준말로 써야하겠다. 깜냥도 안 되면서 수습도 안 될 무리한 일을 벌이거나 겁 없이 일을 저지르는 경우에 이 말을 듣게 된다.

간덩이 부은 짓이 우리네 장삼이사들의 소소한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치기어린 일이라면 그리 문제될 것도 없다. 한 대 쥐어박거나 애써 무시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라 일을 하는 수준에서 자행된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국정원의 간덩이 부은 짓으로 나라꼴이 참 한심하게 돌아가고 있다.

한의학의 고전인 ‘황제내경’에는 간(肝)을 장군의 지위에 비유해 전쟁의 승리를 위해 철저한 작전계획을 짜는 것과 같은 기능을 한다고 나와 있다. 외부의 사기와 독을 최전선에서 방어해 인체가 질병에 걸리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간의 한자어 ‘肝’은 무언가를 방어한다는 방패 간(干)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에서도 옛 사람들의 간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실제 현대의학의 관점에서도 간의 여러 가지 기능 중 해독작용이 가지는 비중이 매우 큰 것으로 보아 이러한 비유가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국방부나 국정원쯤이, 우리 인체에서 간이 하는 역할을 국가차원에서 행한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 ‘베를린’을 보면 국정원 첩보원들의 숨막히는 활약상이 정말 멋지게 펼쳐진다. 우리가 상상하는 첩보원들의 모습이다. 이와 대비되는 또 하나의 모습도 있다. 어두운 원룸에서 컴퓨터화면을 앞에 두고 야당 대통령 후보를 비방하고 야권 성향의 국민 대다수를 ‘종북좌익’으로 몰아가는 댓글놀이에 여념이 없는 국정원 직원. 간도 쓸개도 다 떼어내 버리고 정권 재창출을 위해 인터넷사이트를 배회하며 이런 한심한 임무(!)를 수행하는 당사자들은 얼마나 큰 자괴감을 느꼈을까.

그나마 이 정도까지는 참아줄 만한 일인지도 모른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국정원의 전신 안기부의 부훈처럼 아직은 음지를 벗어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음양의 균형과 조화는 건강의 척도다. 음(陰)이 과도해지거나 함부로 양(陽)을 넘보면 어딘가에서 사단이 생기기 마련이다. 음지에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행한 ‘세균전’은 그것대로 심판받아 마땅하지만, 문제가 거기서 끝났다면 어쩌면 별일도 아니다. 어차피 국정원의 몸속에는 정권의 주구노릇을 담당해왔던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보와 비밀을 보호해야할 정보기관이 남북의 정상 간에 은밀히 오간 대화내용이 담긴 비밀문서를 스스로 온 천하에 까발리는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음지에 있어야 할 것이 양지를 침탈한 것이다.

“NLL(=북방한계선)을 둘러싼 남북 정상 간 회담 내용의 진위여부를 둘러싸고 국론분열이 심화됨을 우려했다”고 강변하지만,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그건 국정원 소관이 아니다. “국정원의 명예를 위해서 공개했다”는 남재준 국정원장의 말에 국익은 헌신짝이 되고, 법질서는 유리조각이 됐다. 현재 국정원 건물 앞에 있는 커다란 돌에는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無名)의 헌신’이라는 글귀가 새겨져있다.

멋들어진 원훈과는 달리 자유민주적 질서를 스스로 깨버렸고, 진실한 정보만을 다루겠다는 것 역시 거짓말로 드러났으며, 무명의 헌신은 백주대낮의 꼴통 짓으로 탈바꿈했다. 간덩이가 부은 걸 넘어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부은 간 때문에 국민들만 피곤해지게 생겼다.

이번 사태로 우리사회의 간이 심각하게 병들어 있음을 확인한 것은 어쩌면 다행한 일이기도 하다. 간은 95%가 상할 때까지 커다란 자각증상이 없을 수 있는 ‘침묵의 장기’다. 때문에 자각증상을 느꼈을 때는 이미 늦다. 생명을 잃기 전에 어서 손볼 일이다. 간은 재생력도 아주 좋아서 웬만큼 도려내도 금방 복원된다.

시민의 메스가 필요하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옛 의서에 ‘간(肝)은 장군지관(將軍之官)이고 심(心)은 군주지관(君主之官)’이라 했다. 국정원은 대통령 직속기관이다. 이번 사태가 전개되는 데 대통령의 마음(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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