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람] 황미선 극단 십년후 배우

이런 사람 꼭 있다. 평범한 이야기도 이 사람의 귀와 입을 거치면 마치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진 양 증폭된다. 몇 다리 건너는 사이 의혹은 사실로 둔갑하고, 이야기의 주인공은 뒤늦게 엉터리 이야기가 퍼진 것을 알고 당황한다. ‘소문 제조기’ ‘험담 생산자’로 불려도 시원찮은 이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에 휘둘리지 않고 꼿꼿하게만 살기엔, 우리 일상은 또 얼마나 무료하고 따분한가.

어이없고 때론 무섭기까지 한 ‘소문’을 중심으로 사람 사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연극 ‘소문’이 7월 5일부터 14일까지 부평아트센터 달누리극장에서 열린다. 극단 ‘십년후’가 마련한 명품 코믹극으로, 2009년(원제 ‘나비 날아가다’) 인천연극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고, 일본 삿뽀로연극제에 공식 초청된 작품이다.

연극 ‘소문’에서 소문의 진원지인 ‘덕만 처’ 역을 맡은 배우 황미선(29·사진)씨를 6월 26일 부평아트센터에서 만났다.

신인 개그맨 오디션, 마지막 관문에서 그만

▲ 황미선 극단 십년후 배우
그는 배우가 되고 싶었다. 중학교 3학년 때 부모님에게 ‘고등학교 대신 극단에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나중에 크면 할 수 있으니 공부나 해라’는 것이 부모의 대답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함께 살던 할머니에게도 ‘내 꿈은 뮤지컬 배우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배우는 배곯는 직업’이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는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공부엔 별 흥미가 없었다. 생긴 지 몇 해 안 된 고등학교에는 흔한 연극반도 없었다. 졸업 이외에 특별한 목적이 없던 학교생활에서, 그나마 재밌는 것은 학교 선생님이나 개그맨 흉내 내기로 친구들을 웃기는 일이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니 많은 사람 앞에 나가는 건 쑥스럽더라고요. 대신 주위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선생님 성대모사를 해요. 친구들이 ‘정말 똑같다’며 신나하죠. 전 그게 재밌고 좋았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무역회사ㆍ건설현장 사무소ㆍ모델하우스 안내원ㆍ옷가게 점원 등 많은 일자리를 거쳤다. 24세 무렵엔 에스비에스(SBS) 개그프로그램 ‘웃찾사’에서 신인 개그맨을 뽑는 오디션에도 참가했다. 친구와 재밌는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차 서류 시험은 간단한 콩트를 짜는 것이었다. 가볍게 통과했다. 2차 면접 오디션에서 그는 편안한 기분으로, 성대모사와 노래를 버무려 콩트 연기를 맘껏 펼쳤다.
결과는 합격. 기대도, 예상도 못한 합격에 갑자기 그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3차 오디션만 합격하면 진짜 개그맨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떨렸어요. 욕심이 생겼는지 전에 없던 긴장감에 표정관리도 잘 안 되더군요”

그는 ‘여기까지 왔으니 웃긴 춤이나 춰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결국 긴장을 완전히 풀지 못했다. 어색한 표정으로 성대모사를 하고는 도망치듯 무대를 내려왔다. 불합격이었다.

“다 보여주지 못해 아쉬웠죠. 아직도 친구들은 ‘개그맨 시험 계속 봐라. 네게 잘 어울린다’하며 응원해요. 즐거운 추억이죠(웃음)”

어느 날 갑자기 배우가 되다

작년 4월, 그는 회사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언니, 저는요,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어요”

무심코 던진 그의 말에 선배는 ‘친구 중 연극배우가 있다’며 그 자리에서 전화 연결을 해주었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그는 극단을 방문했다. 극단 십년후와 첫 만남이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어요.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무작정 찾아갔던 것 같아요” 송용일 극단 대표는 그에게 ‘연기를 배운 적이 있느냐’고 묻고는, 곧바로 극단 일정을 들려줬다.

“5월에 인천연극제를 하는데, 연극 ‘화’로 참여한다고 하셨어요. 저에게 함께 해보자고 하셨죠” 얼떨떨했다. 연기를 배우기는커녕 무대에서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조차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그였다. 그는 곧바로 직장에 사표를 내고 극단생활을 시작했다.

얼마 후 첫 극본이 그의 손에 들어왔다. 첫 배역임에도 대사가 있는 역할이었다. 연기수업은 현장에서 이뤄졌다. 선배들의 ‘당근과 채찍’은 ‘무대에 서 있는 모습도 어색한’ 그가 극단생활에 적응하고 연기가 무엇인지 알아가도록 도왔다.

드디어 첫 무대. 무대에 불이 켜지고, 객석은 누가 어디에 있는지 가늠이 안 될 만큼 어두웠다. “머릿속 필름이 끊긴 것처럼, 정신이 나갔다 들어온 것 같았어요. 연기를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안 나요. 친구들이 무대에 선 저를 보고는 눈물이 났다고 하더군요. 무사히 끝냈다는 생각에 기뻤어요”

그가 두 번째로 맡은 역은 작년 가을 공연한 연극 ‘소문’의 술집 여주인. 닳고 닳은 장사속과 오랜 타지 생활의 고독을 동시에 드러내는 역할이었다. 게다가 대사는 경상도 사투리로 돼있었다.

“울산에 사시는 친척에게 전화를 해, 이게 사투리가 맞는지 몇 번을 확인했어요. 일상생활에서도 사투리로 대화를 했죠”

첫 무대를 마친 그에게 선배들은 칭찬 일색이었다. 뜻밖의 칭찬에 으쓱해진 그는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에 두 번째 무대에선 이전보다 연기에 힘을 줬다. 바로 연출가의 지적이 들어왔다. ‘오버를 하면 역효과가 난다’는 것이었다.

“연기를 하면서 배워가는 게 많은 것 같아요. 아직도 한참 모자라지만, 그래도 저를 믿어주는 극단 식구들이 있어 큰 힘이 돼요”

무대 위에서 ‘살아있음’ 느껴

▲ 황미선(앞줄 맨 왼쪽) 배우와 극단 십년후 단원들.
이번 연극 ‘소문’에서 그는 술집 여주인이 아닌 ‘덕만 처’역을 맡았다. 덕만 처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에 등장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요 배역이다. 1년 2개월밖에 안 된 ‘신입’이 이 역할을 맡은 것은, 타고난 끼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

“욕심나는 배역인데, 기회를 주셨으니 열심히 해야죠. 이번 연기로 더 성장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 할 때, 자꾸 눈물이 나 걱정이라고 했다.

“커튼콜을 할 때 객석에 불이 들어오잖아요. 박수치고 격려해주시는 관객을 보면, 긴장감이 풀어지면서 눈물이 나요. 주인공도 아니고 특별한 사연도 없는데 우는 건, 좀 이상해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무대 위에선 간신히 참고 있다가 무대 뒤에서 엉엉 울 때도 많아요”

‘하나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는 기자의 대답에 그는 안심한 듯 말을 이었다.

“그 순간, 제가 무대에 있고, 눈앞에는 관객이 있다는 게 참 감사하죠. 뒤늦게 막내 단원으로 들어와 연기를 배우면서 힘들 때도 있지만, 행복해요. 무대 위에서 ‘살아있다’는 걸 느껴요. 연기란, 아침에 눈을 뜨는 이유, 아프면 안 되는 이유, 제가 살아가는 이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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