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⑧ 엔딩노트
엔딩노트 | 스나다 마미 감독 | 2012년 개봉
메이저 배급사가 메이저 멀티플렉스를 독점한 이 시절에, 개봉영화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다. 아무래도 지난 영화 이야기를 해야겠다. 작년에 개봉한 스나다 마미 감독의 ‘엔딩노트’. 평단으로부터 호평도 얻었고 마니아들의 지지도 얻었지만, 한국 관객에겐 낯선 일본영화인 데다가 장르도 다큐멘터리이다 보니 그리 많은 관객을 만나지는 못한 아쉬운 작품이다.
‘말기 암 선고’처럼 삶을 마감할 때가 멀지 않음을 알았을 때, 그에 대처하는 자세는 그 사람의 기질과 철학과 성격에 따라 판이할 수밖에 없다. ‘엔딩노트’의 아버지, 정년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준비하던 스나다 도모아키는 건강검진에서 말기 암 판정을 받는다.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성취 지향적으로 살아온 전형적인 ‘가장’인 그에게, 암 선고는 죽음이라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수행하라는 업무 지시와도 같았다. 그래서 예상치 못한 죽음 앞에 망연자실 슬퍼하기보다는 죽음이라는 프로젝트를 훌륭하게 수행하기 위해 성실하고 꼼꼼하게 자신만의 엔딩노트를 작성하고 그것을 실천한다.
‘평생 믿지 않았던 신을 믿어보기’ ‘한 번도 찍어보지 않았던 야당에 표 한 번 주기’ ‘일만 하느라 소홀했던 가족들과 여행가기’ 등 아버지의 엔딩노트에 담긴 내용은, 그간 성취 지향적인 가장으로 사느라 하지 못했던, 그러나 죽기 전엔 꼭 하고 싶은 일들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지만, 살아가는 동안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멀리 내다보고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현재의 나를 희생한다. 희생하는 나에는 쾌락ㆍ감정 같은 원초적인 욕망과 가족ㆍ친구를 비롯한 관계, 남은 이들이 기억하는 자신, 즉 내 삶의 가치가 포함된다.
엔딩노트를 작성하고 실천하는 아버지에게 죽음은 아이러니하게도 ‘현재’의 ‘삶’에 충실하게 하는 기제가 된다. 어쩌면 죽음은 현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가치 있는지, 얼마나 살 만한지를 깨우치게 하는 신의 선물일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나 또한 2년 전쯤 병치레와 입ㆍ퇴원을 반복하면서, 끝을 생각한다는 것의 중요함을 몸으로 배웠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위기는 ‘잘 죽기 위해 현재의 내 삶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 깊이 성찰하는 계기를 주었다.
최근 ‘웰빙(well-being)’에 이어 ‘웰다잉(well-dying)’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질수록 죽음에 대한 관심은 커질 수밖에 없다. 좋은 상조회사에 꼬박꼬박 돈 부어 화려한 장례식을 치르는 것이 웰다잉일 수는 없을 것이다. 나중으로 미뤄두었던 소중한 것을 지금 당장 실천하는 것, 시간에 쫓겨 놓치고 살던 가치를 복원하는 것, 죽음을 통해 ‘지금, 여기’를 충실히 살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잘 죽는 길 아니겠는가.
※ 영화 ‘엔딩노트’를 극장에서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겼다. 7월 11일부터 나흘 동안 열리는 인천여성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상영될 예정이다. 영화제 둘째 날인 7월 12일 오후 4시 30분에 상영하며, 배리어프리(barrier free) 영화로 시ㆍ청각 장애인들도 관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