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람] 이범우 인천시립극단 단원

“난 어디에도 존재한답니다. 난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고통 받을 때도 거기 있었소. 수난과 전쟁의 장소는 물론이고 혁명의 시대에도 늘 함께 했지요. 왕과 교황들이 수세기 동안 싸움질 하는 걸 난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았어. 난 소리쳤지. 누가 그 많은 사람들을 죽였냐고. 누구지. 누구지. 누구지. 그건 바로 나였소. 앞으로도 난 항상 그들과 함께 할 것이요”(연극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의 대사)

6월 2일,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인천시립극단의 연극 ‘파우스트’(연출 이종훈)가 열흘 동안 이어진 공연의 마지막 점을 찍었다. 객석에선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무대 인사를 하는 배우들 사이에서 묘한 감정에 휩싸인 이가 있다.

시립극단 단원 이범우씨이다. 그는 이번 연극에서 신과 한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파우스트에게 영혼을 팔게 하는 악령 메피스토 역을 맡았다. 19일, 종합문화예술회관 근처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일생에 한 번 해볼까말까 한 연극 ‘파우스트’, 그 중에서도 극 전체 흐름을 좌지우지하는 악역 메피스토 역을 마친 소감을 들어보았다.

보이는 나이가 배우의 나이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가벼운 인사를 나눈 후, 그에게 첫 질문을 던졌다. 그와 이전에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지만 나이를 물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곧은 자세와 단단해 보이는 체격에선 젊음이, 눈가나 이마 등에선 세월이 느껴져 가늠하기도 쉽지 않았다.

“배우는 나이가 없는데” 예상치 못한 대답이다. “나이 묻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저 배우는 몇 살이겠구나’ 하고 봐주는 나이가 제 나이죠. 배우에게는 기대감이나 호기심을 갖는 게 좋으니까요” 굳이 말하지 않겠다면 별 수 없다. 인터뷰하면서 조금씩 그의 나이에 근접해보는 수밖에.

그에게 배우를 꿈꾼 것이 언제쯤인지 물었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네 살 무렵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당시 문화생활이라고는 라디오 듣는 게 전부였어요. 라디오에서 나온 김정구 선생의 노래 ‘눈물 젖은 두만강’을 듣고는 산을 바라보면서 손동작을 해가며 노래를 불렀대요. 내성적인 편이어서 사람들에게 인사도 잘 못 했는데,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건 거침이 없었다고 어른들이 이야기하시더군요. 이때부터 연기하는 걸 좋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중학교 시절엔 티브이에서 나오는 외화를 늦은 밤까지 보며 조금씩 연기에 대한 꿈을 키웠다. 그는 평소엔 조용하다가도 체육대회나 수학여행에서 장기자랑을 할 때면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했다.

“라디오에서 들은 재미난 것을 나름대로 동작까지 붙여가며 따라하면 친구들이 막 웃고 재밌어했어요. 전 그게 좋더라고요”

그는 이 무렵 연기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하지만 가족과 친척 등 주위 사람들이 반대했다. ‘경주 이씨 집안에서 딴따라가 나오면 안 된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부모는 그를 인천으로 ‘유학’보냈다.

누나 집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잠시 충무로 연기학원에 다녔다. ‘돈을 주면 출연시켜주겠다’는 이들에게 몇 차례 사기도 당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예술전문대학(현 서울예술대학교) 연극과에 입학했다. 선우재덕, 손병호, 김세준 등이 그의 동기다.

“연극 하려거든 다 버리고 해라”

▲ 연극 ‘파우스트’에서 악령 메피스토 역을 소화한 이범우씨.
대학생활은 그의 ‘첫째 황금기’였다. 삼화고속 첫차를 타고 학교에 갔다가 막차를 타고 인천에 오는 바쁜 일상이었지만 좋아하는 일에 몰두한다는 것이 행복했다. 졸업 후 그는 명동예술극장 소속 극단 ‘부활’에서 첫 극단생활을 시작했다.

“하루에 (라면 대신) 밥을 한 끼라도 먹으면 잘 먹던 시절이었어요. 선배들이 ‘연극해선 밥 먹고 못 사니 하려거든 다 버리고 해라’는 말을 했어요”

그는 선배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전 뭐든 자신이 있었어요. 연극으로도 먹고 살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죠. 물론,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게 곧바로 증명이 됐어요. 우선, 대학에서 배운 대로 연기를 하기도 어려웠으니까요. 제작비가 뒷받침돼야하는데, 사정이 그렇지 못했죠. 극단에서 갈등이 심했어요”

그는 결국 극단을 나와 프리랜서 연기자로 나섰다. 몇 년이 지난 1996년, 그는 인천시립극단 단원 오디션에 합격했다. 올해로 18년째다. 그 사이 한국방송(KBS) ‘불멸의 이순신’에서 공태원 역, 한국방송(MBC) ‘빛과 그림자’에서 방송국 국장 역, 최근엔 한국방송 드라마 스페셜 ‘환향 쥐불놀이’에서 개성 있는 연기를 선보였다.

인천시립극단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2004년 공연한 뮤지컬 ‘심청왕후’이다. 그는 여기서 심봉사 역을 맡았다. 주인공 심청 역은 뮤지컬 명성황후에서 주인공 명성황후를 맡은 소프라노 김원정씨. 성악을 전공한 김원정씨와 달리 정극을 전공한 그에게 무려 열한 곡을 소화해야하는 심봉사 역은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하루 열 시간 이상 뮤지컬 연습에 몰두했다. 결과는 말 그대로 ‘대박’. 3일 동안 4회 공연은 모두 매진이었고, 그에게는 ‘심봉사 맞춤이었다’는 최고의 찬사가 따라왔다. 그는 “목숨 내 놓고 연습한 작품이었다. 더 쏟을 것이 없는 작품”이라고 회상했다. 큰 인기에 힘입어 ‘심청왕후’는 2006년에 앙코르 공연을 하기도 했다.

알파치노 & 찰리 채플린, 두 모습 다 갖고파

그가 두 번째로 꼽은 작품은 바로 ‘파우스트’이다. 그가 맡은 메피스토는 신과 대적할 만한 무서운 악령이지만 한편으론 유머가 있는 역할이었다. 이종훈 예술감독은 난해하고 어렵기로 유명한 원작을 감동과 재미를 줄 수 있는 내용으로 각색했다.

“웃음은 억지로 끌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참 어렵죠. 적절한 시기에 표정과 억양, 동작이 잘 맞아 떨어져야 웃음이 나거든요”

이번 작품은 특히 부담을 많이 느꼈다. 곁에서 그를 지켜본 이는 ‘악역을 맡아서 그럴 것’이라고 했다. 부담을 안고 무대에 오른 첫 날, 객석에선 그의 연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연극을 본 누군가는 ‘파우스트가 아닌 메피스토로 작품 제목을 바꿔도 되겠다’고 할 정도로 그는 이번 연극에서 가장 빛을 발했다.

“아마 제 외적인 이미지와 메피스토 캐릭터가 잘 맞아 떨어진 것 같아요. 게다가 제가 코믹 연기를 좋아하거든요. 정말 일생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좋은 작품, 좋은 역을 맡아 무사히 연기를 해냈으니,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죠”

그는 아직 메피스토의 후유증이 남은 탓인지, 3주가 지난 지금까지 피로가 덜 풀렸다고 했다. 그는 곧 메피스토를 보내야한다며 “배우는 한 인물을 담았다가 다시 내보내는 작업을 반복하는 사람이에요. 새로운 것을 담기 위해선 놓는 것도 필요하죠”라고 말했다.

그는 인천시립극단에서 ‘원로’격이다. “연극을 처음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스스로 만족하는 배우가 되겠다는 다짐으로 연기에 임할 뿐이에요. 후배들이 저를 원로라고 하는데 전 섭섭하죠”

그가 꿈꾸는 배우의 모습은 두 가지다. 영화 ‘대부’의 알파치노처럼 카리스마를 풍기는 배우. 그리고 찰리채플린처럼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줄 수 있는 배우. 앞으로 시립극단과 함께 나이 들어갈 그의 새로운 연기 인생을 눈여겨봐야겠다. 그의 나이는, 그의 지론대로, 연극 무대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그의 동기 배우들은 모두 1962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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