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엄마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시는 게 있다. 동사무소에 삼남매의 출생일을 모두 제대로 등록해놨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 낳고 정해진 기간 안에 출생신고를 하지 않으면 과태료를 물어야한다.

이 때문에 실제 태어난 날 대신 엉뚱한 날짜를 출생일로 등록하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이다. 엄마는 한 겨울에 첫째인 언니를 낳고 산후통을 앓아 제때 출생신고를 못했는데, 과태료를 내면서까지 그리 등록을 하셨단다. 밀가루도 배불리 못 먹을 만큼 가난한 시절이었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으신다.

엄마가 이토록 뿌듯해하시는 데에는 아마 엄마의 생년월일이 제대로 등록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엄마의 주민등록 앞자리는, 실제 태어난 날짜와 전혀 다를 뿐 아니라 심지어 세 살이나 어리게 돼있다. 아무리 과태료 때문이라고 해도 이건 좀 너무하다. 그런데 당시엔 이렇게 출생신고를 일부러 늦추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아기가 태어나 첫 돌도 지내지 못하고 숨을 거두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엄마 말씀으론,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아기가 죽으면 지게에 지고 산에 올라가 그냥 묻기도 했단다.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으니 사망신고도 할 필요가 없다. 먹을 것이 없어 영양 상태도 좋지 않고, 의료기관도, 위생기술도 부족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이런 시대 모습이 담긴 글자가 있다. 夭(어릴 요)는 사람을 뜻하는 大(클 대)에 (삐침 별)을 얹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나타낸 글자이다. 고개를 갸우뚱한 귀여운 아이의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夭에는 또 다른 뜻이 있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것을 두고 ‘요절(夭折)했다’고 하는데, 이때 夭는 ‘일찍 죽는다’는 뜻이다. 서로 가까이 두면 안 될 법한 두 가지 뜻이 한 글자 안에 들어 있다. 그만큼 아기는 생과 사의 얇은 경계를 수시로 오갔다.

그 경계를 밀어내고, 어느 순간 아기가 두 발로 땅을 딛고 일어선다. 이를 바라보는 어른들은 기뻐 어쩔 줄을 모른다. 아기가 일어섰다는 것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는 것이고, 이를 눈으로 확인했으니 그 자체로 감동일 수밖에 없다. 아이는 첫 돌 무렵 스스로 일어서서 조금씩 걷기 시작하는데, 실제로 첫 돌을 넘긴 아기들은 사망률이 크게 줄어든다고 한다. 그래서 생후 1년 미만 아기의 사망률(영아사망률)을 따로 계산해 다양한 지표로 활용하고 있다.

立(설 입)은 사람(大) 아래에 땅을 뜻하는 一(한 일)자를 놓아 땅을 딛고 선 사람의 모습을 나타낸 글자다. 그런데, 아기가 일어서려면 본인의 의지만으론 안 된다. 누군가의 보살핌과 관심, 인정과 지지가 필수로 따라야한다. 여기서 一은 말 그대로 땅일 수도, 아기가 넘긴 숱한 좌절과 고비일 수도, 아니면 누군가 일어설 수 있는 든든한 지지대를 나타낸 것일 수도 있다. 이렇든 저렇든, 立은 그 자체로 승리자의 모습이다. 立에 ‘이루어졌다’는 뜻이 담긴 것도 이런 연유가 아닐까 싶다.

立과 夭에 대한 글을 쓰고 있자니, 첫 조카를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오른다. 온몸에 근육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듯 피부는 쪼글쪼글하고, 맑은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혹여 다칠까 함부로 안을 수도, 만질 수도 없었던 그때, ‘이 아이가 언제 커서 나와 손을 잡고 걸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꿈은 이미 한참 전에 이뤄져, 조카는 열심히 운동장을 달리고, 강남스타일 춤도 신나게 출 만큼 훌쩍 자랐다. 새삼, 조카에게 고맙다. 아니, 나 자신에게, 그리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며 함께 살아가는 모든 승리자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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