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공간] 재즈가 흐르는 곳, ‘버텀라인’

직장인에게 진정한 휴일은 금요일 밤에 시작한다. 한주 동안 온몸의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직장스타일’에 맞춰 놓느라 심신이 지쳤다. 꿀 같은 휴일이 바로 지금부터 시작이다. 그런데 막상 ‘휴일스타일’로 모드전환이 잘 안 된다. 그냥 집에 들어가기엔 아쉬움이 남아 무작정 밤길을 걷는다. 어디선가 리드미컬한 색소폰 소리가 흘러나와 발길을 붙잡는다. 베이스의 깊은 울림과 드럼소리도 이어진다. 고개를 돌리니 ‘버텀라인’이라 쓰인 간판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20대부터 60대까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곳

 

▲ 재즈클럽 ‘버텀라인’ 허정선(오른쪽) 사장이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버텀라인’(중구 중앙동 4가 8-4)은 인천에서 유일한 재즈클럽이다. 5월 24일 늦은 밤, 재즈밴드 ‘블루하우스’가 이곳 분위기를 한껏 돋우고 있다. 바와 테이블을 차지한 손님 30여명이 동료와 대화를 나누거나, 음악을 들으며 저마다 한껏 여유를 즐기고 있다.

버텀라인은 1983년 문을 열어, 올해로 31년째 같은 이름의 간판을 달고 있다. 재즈클럽이란 색깔도 변함이 없다. 다만 주인은 초창기 10년 동안 세 번 바뀌었다. 현 사장인 허정선씨가 20년 전 이곳을 인수했다.

세월이 흐른 만큼, 단골 층이 두텁다. 덕분에 세대 간 격차가 유독 크다는 이 땅에서,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자연스럽게 섞이는 흔치 않은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허 사장도 10대 때부터 마냥 음악이 좋아 이곳을 드나들다 덜컥 사장을 맡아, 어느새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벽을 가득 채운 레코드판 수천 장과 단골손님들이 이 공간의 역사를 보여준다.

최고의 연주자들이 찬사를 보낸 이유

재즈클럽이란 이름처럼, 이곳에선 매주 금요일마다 재즈공연이 열린다. 첫째ㆍ둘째 주는 ‘최용민 퀼텟’이, 둘째ㆍ넷째 주는 재능대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블루하우스’가 이곳을 재즈의 선율로 가득 채운다. 상설공연 이외에 기획공연도 꾸준히 열고 있다. 웅산ㆍ김광민ㆍ피트정 밴드ㆍ최우준 밴드ㆍ윈터플레이 등, 이 분야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이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전국 순회공연 일정에 ‘버텀라인’ 공연을 필수로 넣는 연주자들도 많다. 재즈연주자들에게 이곳은 그만큼 각별하다.

그들이 이곳을 특별히 맘에 들어 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이곳에서 하는 공연은 유독 소리 울림이 좋다는 것이다. 허 사장 이야기론, 이곳 음향장비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라고 한다. 그럼에도 연주자들이 만족하는 이유는 건물에 있다. 이곳 내부는, 나무 지붕틀이 높은 천장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지어진 지 100년이 넘었다는 이 건물은 이른바 ‘왕대공 트러스’ 방식으로 지어져 건물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높은 천장이 소리의 울림을 좋게 할 뿐만 아니라,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볏짚ㆍ갈대 등을 섞은 흙벽도 한 몫 하는 것 같다고 허 사장은 설명했다.

“창문을 내려고 벽 일부를 부술 때 이 벽이 보통 벽이 아니란 걸 알았어요. 갈대며 볏짚이 흙과 뒤섞여 단단하게 굳어있더군요. 창문 내느라 고생은 많이 했지만, 흙벽이 소리를 좋게 만드는 것 같아 좋아요“

여기에 더해 재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클럽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허 사장의 열정과 그의 탁월한 안목도 연주자들이 이곳을 찾고 싶어 하는 이유다.

레코드판 소리, 따뜻해서 좋아

 

▲ 재즈밴드 ‘블루하우스’의 연주 장면이다.

허 사장이 음반 하나를 골라 턴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반이에요. 루이 암스트롱과 엘라 피츠제럴드가 함께 만든 건데 우리 집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것 같더라고요. 한번 들어보세요”

턴테이블에 바늘을 올리자 레코드판 특유의 ‘지지직’ 하는 소리가 먼저 들린다. 마치 에피타이저가 입맛을 돋우듯, 음악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는 소리다.

“시디(CD)보다 레코드판이 좋아요. 따뜻하거든요. 어디선가 들었는데, 레코드판에서 나오는 소리는 엠피쓰리나 시디음악과 다르게 뇌를 편안하게 해준대요”

빽빽하게 꽂힌 레코드판은 그가 고등학교 때부터 모은 것이다. 바(Bar) 한쪽에는 포장도 뜯지 않은 레코드판이 한 뼘도 넘게 쌓여 있다. 얼마 전 미국에서 배달된 것이란다.

허 사장이 처음 이곳을 드나들던 80년대에 동인천과 신포동 일대는 ‘인천의 명동’ ‘인천의 홍대’로 불릴 정도로 젊은이들이 넘쳐났다. 음악카페도 곳곳에 있었다. 허 사장은 유독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해 이 동네 음악카페와 클럽은 다 다녀볼 정도였다. ‘버텀라인’도 그중 하나였다. 90년대 들어 젊은 층이 주안으로 이동하면서, 음악카페도 하나 둘 사라지고 지금은 ‘버텀라인’만 남아 있다.

허 사장이 이곳을 운영하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인천에서 재즈 공연을 볼 수 있는 곳이 없었어요. 라이브 공연을 보기 위해 홍대까지 가다보니 답답하더라고요. 그러던 차에, 이곳 사장이 운영을 그만 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재즈연주자들도 이곳에서 연주를 하고 싶다며 바람을 넣어, 덜컥 사고를 쳤죠”

처음엔 일주일에 두 차례 라이브 공연을 했다. 버는 족족 모두 공연비에 쏟아 부어야했다. 비용 문제로 횟수는 주 1회로 줄였지만, 라이브 공연에 대한 처음 뜻은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음악과 사람이 좋을 뿐이에요. 돈 생각하면 이 일 못해요. 돈 벌려고 시작한 일도 아니지만요”

2년 마다 찾아오는 고비, 이젠 함께 지키고 싶어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지금도 어려움은 여전하다. 특히 그의 마음을 가장 괴롭게 하는 고비가 2년마다 찾아온다. 바로 건물 임대차계약이 끝나는 시기다.

“세 들어 살다보니 주인이 나가라면 언제든 나가야하는 처지에요. 뭐가 고장 나도 주인에게 고쳐달라는 말도 못하고 제 돈으로 다 해요. 어떻게든 버티고 싶은데, 힘에 부치는 게 사실이에요. 고민을 나눌 누군가 필요해요”

그에겐 처음에 없던 사명감도 생겼다. “한 곳에서 재즈클럽을 30년 동안 이어온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의미 있는 장소라는 자부심도 있고, 최선을 다해 운영해야겠다는 사명감도 생겼어요”

그는 30주년의 의미를 나누기 위해, 6월부터 8월까지 매달 한 차례 기획공연을, 9월엔 30주년 기념 공연을 열 계획이다. 9월 공연에는 ‘버텀라인 플레이’와 해외 초청팀, 지역 뮤지션과 함께 재즈를 맘껏 즐길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생각이다. 버텀라인 플레이는 그가 재즈를 알리려 2007년 결성한 재즈공연 단체다.

“이곳이 사라진 후에 ‘한때 이곳에 버텀라인이 있었지’ 하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곳을 사랑하는 분들과 함께 이곳을 계속 지켜나가고 싶어요” ‘새로운 세대’를 맞이한 버텀라인의 앞길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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