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복희(부평1동)

 

 

만감이 교차하는 계절. 이맘때만 되면 막 물들기 시작한 나뭇잎처럼 그리움이 새록새록 짙어지는 사람이 있다. 첫사랑 같은 가슴 벅찬 감동과 잊을 수 없는 추억을 갖게 해 준 여고 때 친구. 지금은 서로 멀리 떨어져 사느라 아쉽게도 그 아이와 마주 잡았던 손을 놓치고 만 회한에 젖는다.
유난히 혹독한 사춘기를 겪었던 학창시절. 지금이나 그 때나 사람 사귐이 적극적이지 못했던 내게 다가온 그 친구는 같은 반이었는데 거의 일등을 도맡아 차지하던 아이였다.
가까워지면서 알게 된 그 친구는 배경이 매우 좋은 엘리트 집안이었다. 내가 부러움을 가질 만큼 독서량이 엄청 많았던 그 친구는 우리 또래에 비해 나름대로 확고한 인생철학과 사회 전반에 대한 냉철한 비판의식도 갖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는 선생님과 열띤 논쟁을 하게 되었는데 결국 선생님께서 항복의 미소를 지으며 끝이 날 정도였다.
결코 자만에 빠지지 않는 수수한 인간미를 가진 그 친구와 나는 학년이 올라가 다른 반이 되어도 점심시간이면 어김없이 교정의 느티나무 아래서 만났다.
줄줄이 같이 외웠던 시와 작은 풀잎 하나에도 의미와 감동으로 가슴 충만했던 나날들. 나뭇잎을 타고 내리는 여름비에 세일러복을 흠뻑 적셔도 비가 와서 더욱 할 얘기가 많은 우리였다.
그 친구와 나는 테스가 되고,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베르테르가 되어 함께 책 속으로 많은 여행을 떠나곤 했다.
소리 없는 벽지처럼 내 가까이서 지금도 문득 문득 많은 얘기를 자아내는 그 친구. 돌이켜 보면 그 친구가 있어서 참으로 아름답고 귀한 시간의 터널을 지나 올 수 있었다.
나비가 되려는 누에처럼 고뇌하고 아파하며 꿈을 만들어 가던 그 귀중한 날들은 내 인생에 버려서는 안 될 오래 묵은 보석함이다.
비 오는 날 함께 부르던 흑인영가를 들으면 어디선가 그 친구도 나를 기억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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