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양 인하대학교 다문화융합연구소 초빙연구위원

결혼이주여성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유학생의 삶이 10년도 넘었다. 한국어 한마디도 못 한 채 한국에 들어와 한국 생활에 적응하고 살아갈 때 무엇보다 필요한 게 바로 한국어다. 그래서 첫 번째로 시작한 공부가 바로 한국어였다.

이춘양 인하대학교 다문화융합연구소 초빙연구위원
이춘양 인하대학교 다문화융합연구소 초빙연구위원

가정에서만 아니라, 사회생활도, 그리고 아이들을 양육하는 데도 의사소통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주로 어른을 위한 복지관에서 1년 정도 공부하고 한국어능력시험 3급에 합격했다. 그때부터 제 앞에 공부의 길이 열려 10년이 넘는 공부의 길을 쭉 걷고 있다.

결혼을 준비하기 위해 포기한 대학 공부를 2008년에 다시 시작했다. 그 당시에만 해도 저는 한국어보다 일본어를 더 잘했던 것 같았다. 한국 대학교에서 전공, 그리고 졸업 후 진로 추세 등을 몰라 그나마 공부하기 쉽다고 생각한 일본학을 선택했다.

결국은 중국인인 나는 한국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게 됐다. 그리고 한국어를 전문적으로 배워보고 싶어 한국문화정보학(현 한국어교육학과)을 복수전공으로 선택했다. 하지만 그곳은 한국어를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한국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곳이었다.

처음에 무척 당황했다. 나중의 일이지만 나는 이 아름다운 오해 덕분에 결국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한국에서 한국어 교사로 활동할 수 있게 됐다.

유학생 생활은 생각보다 그리 쉽지 않았다. 대학교 입학 첫날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 강당 내 대학생 수십 명 앞에서 일이었다.

낯선 나라에서 한국어능력시험 3급에 합격했으니 이제 대학에서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 그리고 잘할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교수님들이 칠판에 적는 글자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글씨를 “예쁘게” 써달라고 요청했더니, “예쁘게 써달라는 거야, 알아보게 써달라는 거야?”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 한 마디에 뭐가 그렇게 속상했는지 또 한 번 눈물이 터졌다.

기대했던 대학 생활을 즐기며 가사와 육아에, 아르바이트까지. 매일 매일 충실했지만 무척 힘들었다. 그래서 둘째가 출생한 2009년 말 중국의 친정 부모님을 한국에 초청해 육아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렇게 부모님이 방한을 했다. 그런데 앞날이 희미하게 보이려던 순간 맑은 날에 벼락이 떨어졌다. 아빠가 암 판정을 받았다. 장녀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모든 것을 동원해 아빠의 치료를 돕는 것이다.

어느새 4년이 지나 2013년이 됐다. 아빠는 암 치료를 마무리하고 다시 중국 고향으로 돌아갔다. 첫째는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둘째는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한국어 교원자격증 2급을 취득해 한국어 교사라는 직업을 갖게 됐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갑자기 어느 날, 초등학교 아이 담임선생님한테 연락이 왔다. 둘째가 언어발달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말에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 쓰러질 뻔했다. 몇 년 동안 꾸준히 언어치료를 받았다.

2013년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어 교사로 3년 동안 중도에 한국에 입국한 청소년을 교육하며 함께 했다. 그 과정 중 전공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껴져 다시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해 한국어 교육을 더 공부했다.

졸업논문을 준비하면서 내 연구에 참여해 줄 수 있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직접 참여했다. 다른 이주민 친구들을 만나면서 다문화 교육에 관심이 생겼다. 그렇게 2017년 지도교수님의 추천을 받아 다시 다문화 교육학 전공 박사과정에 입학해 공부를 계속했다.

나부터 이주여성 출신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 출신 이주여성이 겪는 언어적, 문화적, 생활적, 경제적, 심리적인 문제 상황을 깊이 공유할 수 있었고 공감할 수 있었다. 비슷한 경험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들이 한국에서 생활하며 적응하는 과정 중 겪는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편안하게 다가가 생생하고 진실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같은 이주여성이기에 다양한 유형의 이주민 집단을 만날 수 있었다. 접하기 힘든 한 부모이주여성을 연구에 참여자로 섭외할 수 있어 많은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들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없다는 무력감과 함께 우울증에 빠져 2년 가까이 박사학위 연구를 멈추기도 했다.

연구를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은 그동안 연구과정에서 만난 참여자들이 한 결 같이 같은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내 말을 이렇게 잘 들어 주는 사람은 선생님이 처음입니다.” 그때부터 나는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하더라도,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한국에서 16년을 살면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 뜻대로 안 되는 일이 늘 열 중 여덟아홉이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의 ‘禍兮福所倚 화혜복소의, 福兮禍所伏 복혜화소복’ 다시한 번 생각하게 됐다. ‘화 속에 복이 깃들어 있고, 복 안에 화가 숨어 있다. 화복은 서로 의존하는 것이며 바뀌어 달라질 수도 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좋거나 좋지 않은 많은 것을 다양하게 경험한다. 지난 16년을 되돌아보며 생애 첫 시를 써 보았다.

타향에서 파란색 하늘 아래

가로 가도 세로 가도, 나의 선택일 뿐이다.

다 함께 가도 홀로 가도, 나(라)의 선택일 뿐이다.

마음에 따라 바로 간다.

사는 것은 복잡하면서도

아주 간단한 일이다.

자세히 음미하고 즐긴다,

차갑고 쓴 따뜻하고 달콤한

카페라떼 같은 삶.

타향에서 파란색 하늘 아래.

그동안 결혼이주여성으로 한국에 살며 타향에서 파란 하늘 아래 차갑고 쓴 경험들로 힘들어 공부를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따뜻하고 달콤한 감동적인 시간도 무척 많았다. 이 많은 것을 맛보고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오늘날 나도 없었을 것이다. 많은 문제 상황을 경험하면서 끊임없는 배움만이 많은 변화와 성장을 이룰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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