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석 생태역사공간연구소 공동대표

김현석 생태역사공간연구소 공동대표
김현석 생태역사공간연구소 공동대표

인천투데이|프랑스의 패션 브랜드 루이비통(Louis Vuitton)이 사운드워크(soundwalk)를 결합한 여행 상품을 처음 내놓았을 때, 우리가 알던 관습화된 여행은 사라질 수도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2008년 무렵 등장한 ‘루이비통 사운드워크’는 그만큼 신선했고, 획기적이었다.

사운드워크란 개념은 단순하게 설명하면 말 그대로 걸으면서 듣는 것이다. 소리를 통해 경험을 극대화시키면서도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현실을 초월한, 이른바 시적인 감정을 느끼게 안내하는 걸 의미한다. 이러한 시스템은 2000년대 초, 아티스트인 스테판 크라스넨스키(Stephan Crasneanscki)가 개발했다고 알려져 있다.

형식은 단순하지만 그 안에 담긴 철학은 가볍지 않다. 사운드워크를 접목한 여행이 표방하는 것 중 하나가 ‘보들레르의 산책’이다. 새소리를 들으면서 전원을 거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대도시 한가운데를 어슬렁거리면서 걷던 보들레르의 걸음을 추종한다.

보들레르는 그러한 산책길에서 깊숙이 숨어 있던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 자본이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파리의 거리와 충돌시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사유와 문장을 완성했다.

조선시대에 한양의 도성 거리를 산책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도시의 산책이란 그 자체로 근대화된 몸짓이고, 당시로서는 부르주아의 행위였다. 루이비통이 걷는 여행에 주목한 것도 그런 이유가 컸을 것인데, 명품을 몸에 걸치고 도시 한가운데를 천천히 걸어 다니는 것이 명품의 이미지를 강조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루이비통 사운드워크에 기획된 여행지는 상하이나 홍콩의 골목길 같은 곳이다. 여행객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미리 준비된 MP3 파일을 들으며 길을 걸으면 된다.그러면 중국계 영화배우인 공리나 서기가 나와 자신의 추억을 버무려 하나의 스토리를 여행 내내 들려준다. 어릴 적 이 거리에서 먹던 음식이나 친구들과 뛰어놀던 모습들이 배우의 입을 통해서 생생하게 재현된다.

여행객은 배우와 함께 걸으며 현실과 허구가 적절히 뒤섞인 ‘영화적인 경험’을 체험하게 되고, 자신이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는 착각에 빠져든다. 인간 속에 내재된 욕망을 채우면서 현장에 대한 강한 기억을 얻게 되는 셈이다.

소리를 통해서 현장을 재구성하는 이러한 시도는 훨씬 이전부터 시도됐던 기법이었다. 소리와 풍경을 결합해 새로운 경험과 세계를 창조하는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가 그 한 예이다. 존 케이지의 유명한 연주, ‘4분 33초’를 떠올리면 된다. 백남준의 예술 세계에서 항상 함께 언급되는 존 케이지는 이 짧은 피아노곡을 공연하는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피아노 앞에 있다가 사라진다.

공연 현장을 대신 채운 관객들의 기침 소리, 바스락거리는 옷깃 소리 같은 것들이 연주를 대체할 수 있게 의도한 것인데, 평소에는 의식하지 않던 소리가 의미가 부여되면서 새로운 경관을 만들어낸다. 신경 쓰지 않던 방 안의 냉장고 소리가 어느 순간 심기를 불편하게 할 정도로 크게 들리는 경험과 비슷하다.

소리를 활용해 여행객을 이끄는 이러한 사례는 지금은 어느 정도 익숙한 현상이 됐다. 박물관을 갈 때마다 음성안내기를 이용하는 게 일반화됐고, 유적지에선 큐알(QR)코드를 찍어 스마트폰으로 안내받을 수 있다. 대부분은 형식만을 끌어온 것이어서 사운드워크가 추구하는 철학을 제대로 담아냈다고 보기 어렵다.

그나마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이 시도한 음성 안내는 관람객, 전시 공간, 소리가 상호작용하면서 낯선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는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기억과 추모라는 메시지가 그러한 경험을 증폭시키는 이유가 크다. 결국, 여러 가지 요소들이 서로 작용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음성 안내라는 형식적 변화만으로 감동을 줄 수는 없다.

최근에는 가상 인간이 음성 안내를 대체하는 추세다. 국립중앙과학관이 3월까지 개최하는 ‘인공지능과 예술 특별전’에도 ‘다:온(DA:ON)’이란 인공지능(AI) 해설사가 등장해 가상공간에서 전시를 안내한다. 전염병의 유행이 만들어낸 풍경이다. 앞으로 전시 현장에서는 홀로그램과 같은 기법이 유행을 이끌 수도 있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사람들이 치열하게 고민하던 철학은 아직 그 안에 제대로 담기지 못했다. 형식의 빠른 전환만으로 여행객이나 관람객의 호응을 지속시키는 건 어렵다. 철학을 담은 기술의 진보는 ‘팬데믹’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과제다.

※ 외부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