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여성독립운동가 없었던 게 아니라 발굴·선양 안 된 것”
인천에도 최선화·장상림 지사 등 여성독립운동가 존재
“월북 등을 이유로 독립유공자 서훈 차별하면 안 돼”

인천투데이=이서인 기자│“현재(2021년 3월 1일 기준) 독립유공 포상자는 1만6685명이다. 이 중 여성은 526명이다.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여성들 많다. 하지만 다수가 서훈을 받지 못했다. 여성독립운동가 중 유관순 열사만 많이 알려졌다. 발굴과 함께 선양작업이 시급하다”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의 말이다. 이윤옥 소장은 여성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그 후손들을 직접 인터뷰하는 등 여성독립운동가 발굴과 기록에 매진하고 있다. 아울러 여성독립운동가를 추모하고, 그 당시 상황과 이들의 모습을 시로 표현한 시집 등 여성독립운동가 관련 저서가 16권에 이른다.

또, 지난해까지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이태룡 박사와 독립운동가를 발굴해 국가보훈처에 포산신청을 했다. 인천대는 2019년부터 2020년까지 4번에 걸쳐 독립유공자 2060명을 발굴해 국가보훈처에 포상을 신청했다.

오는 2021년 3·1만세시위 102주년을 맞아 여성독립운동가 발굴에 힘쓰는 이 소장을 지난 24일 만나 인터뷰했다.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여성독립운동가 없었던 게 아니라 발굴·선양 안 된 것”

이 소장은 40년 넘게 일본어를 전공하면서 일본과 많은 교류를 했다. 그는 대학시절 3·1만세시위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이 있었던 도쿄 재일본 한국YMCA(한국문화관)을 방문했을 때 경험으로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 소장은 “도쿄 재일본 한국YMCA(한국문화관) 독립운동가 자료실을 방문했을 때 남성독립운동가 자료만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라며 “김마리아, 황애시덕, 차경신 지사들도 2·8독립선언에 가담했다.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국내에 가져와 배포했다. 그러나 이들은 독립운동가 자료실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당시 찾아보니 유관순 열사, 권기옥 여자비행사, 김마리아 지사 등 몇 명을 빼고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책이 없었다”라며 “그 뒤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록하는 책을 만들기 위해 자료를 찾고,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부연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2021년 3월 1일 추서되는 275명을 포함하면 독립유공 포상자는 정부 수립 이후 1만6685명이다. 이 중 여성은 526명이다. 전체 포상자 중 1.6%에 불과하다.

이 소장은 “10년 전만 해도 서훈된 여성독립운동가가 200명이 안됐다. 여성독립운동가가 없었던 게 아니라 발굴하지 않은 것이다”라며 “국민들은 유관순 열사 외에는 거의 모른다. 증언을 들을 수 있는 후손들도 점점 연세가 들고 있어 발굴과 선양작업이 시급한데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이어 “로스앤젤레스에서 독립운동을 한 차인재 지사 후손을 2018년 만났다. 그 후손이 한국에서 찾아온 게 처음이라며 감격받아 관련 자료와 사진을 기증하고 싶다고 했다”며 “이런 후손들과 단절되기 전에 정부가 이들에 대한 자료를 기증받고, 독립운동가를 발굴·선양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서대문형무소 수감 기록이 있음에도 서훈을 받지 못한 독립유공자도 수두룩하다. 국가편찬위원회에 따르면, 서대무형무소 수감 기록(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은 6264건이다. 이 중 인천출신인 김영희 지사는 수감기록이 있으나 서훈 받지 못하고 있다.

이 소장은 “김영희 지사는 1926년 8월 5일 21살 때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잡혀갔기 때문에 만세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한다”며 “그러나 아직 서훈받지 못했다. 서대문형무소 수감기록 중 10대 소녀 58명이 있는데 이중 33명이 서훈받지 못했다”라고 설명했다.

미서훈된 김영희 지사 서대문형무소 수감 기록.(자료제공 국가편찬위원회)
미서훈된 김영희 지사 서대문형무소 수감 기록.(자료제공 국가편찬위원회)

인천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독립운동가 다수 존재

인천에도 추서된 여성독립운동가가 더러 있지만, 이들은 잘 알려지지 않다.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공훈록에 들어가야 겨우 설명 몇 줄을 확인할 수 있다. 최선화, 장상림 지사는 인천에서 출생했고, 김란사, 곽낙원 지사는 인천에서 주로 독립운동을 했으며, 유점선, 조인애 지사는 강화 출신이다.

최선화 지사는 인천 출생으로, 흥사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했다. 1940년 한국독립당 창립 후 가입해 상해에서부터 중경까지 임시정부를 적극 뒷바라지 했다. 최 지사는 임시정부를 따라 피난살이를 하며 한국혁명여성동맹 결성 준비위원으로 활동했고, 1943년 2월 임시정부를 따라 중경으로 옮겨가 애국부인회 재건운동에 참여했다.

장상림 지사는 1930년 서울 근화여학교 2학년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해 만세시위와 동맹휴교 시위에 참여하다 체포됐다. 당시 장 지사 외에도 다수의 여학생들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다.

김란사 지사는 이화학당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 교육을 했다. 

또한, 김 지사는 의친왕의 밀사로 특파돼 1919년 초 파리강화회의에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북경으로 건너갔으나 회의 전 갑자기 목숨을 잃었다. 일각에서는 독살설이 있다.

곽낙원 지사는 김구 선생의 생모로, 독립운동가들을 뒷바라지 하며 조국 광복을 위한 항일투쟁을 적극 지원했다. 인천감리서에서 옥살이한 김구 선생을 뒷바라지하며 본인은 잘 챙겨먹지 않고 생활비를 절약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유점선 지사는 17살일 때 남대문역 앞에서 있었던 1919년 3월 5일 경성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다 체포됐다. 체포 후 조선총독부 신문에 기죽지 않고, 정확하게 대답했다는 조선총독부 기록도 전해진다.

조인애 지사는 강화읍 3·1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조선총독부 기록에 따르면, 조 지사는 1만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고,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를 배포했다.

이 소장은 “당시 여성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했지만, 사회조명에서 빗겨나 있다”라며 “국난의 시기에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했던 이들의 정신이 묻혀있으면 안 된다. 이를 후손들이 이어가기 위해 알려야한다”고 강조했다.

이윤옥 소장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동풍신 지사 자료를 보여주고 있다.
이윤옥 소장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동풍신 지사 자료를 보여주고 있다.

“월북 등을 이유로 독립유공자 서훈 차별하면 안 돼”

이 소장은 또한, 남한에 유관순 열사가 있는 것처럼 북한에는 동풍신이라는 여성독립운동가가 있다고 했다. 동풍신 지사도 독립운동으로 매우 유명한 집안이지만, 연구하는 이도 없고, 관련 기록도 거의 없다.

그는 “3·1만세시위 100주년이 지났으면 새로운 인물을 발굴해야하는 데 그게 잘 안되고 있다”라며 “2012년 기준으로 조사한 결과, 유관순 열사는 단행본 20권, 논문 150편 등 많은 연구를 토대로 기록되고 있지만, 동풍신 지사는 아무 기록이 없다. 더 다양한 독립운동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이에 이 소장은 동풍신 지사를 기리고자 헌시를 지었다고 했다. 아래는 이 소장이 쓴 ‘남에는 유관순, 북에는 동풍신’라는 제목의 시다.

‘천안 아우내장터를 피로 물들이던 순사놈들 / 함경도 화대장터에도 나타나 / 독립을 외치는 선량한 백성 가슴에 총을 겨눴다 / 그 총부리 아버지 가슴을 뚫어 관통하던 날 / 열일곱 꽃다운 청춘 가슴에 / 불이 붙었다 / 관순을 죽이고 풍신을 죽인 손 / 정의의 핏발은 결코 용서치 않아 / 끓어오르던 핏빛 분노 / 차디찬 서대문 감옥소 철창을 녹이고 / 얼어붙은 조선인 가슴을 녹였다 / 보라 남과 북의 어린 열일곱 두 소녀 / 목숨 바쳐 지킨 나라 / 어이타 갈라져 등지고 산단 말인가 / 남과 북 손을 부여잡고 / 다시 통일의 노래를 부를 그날까지 / 님이시여 잠들지 마소서!’

이외에도 이 소장은 월북과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 등을 이유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못 받고 있는 김원봉 지사와 조봉암 선생 등의 예시를 들며 분단국가의 모순 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조선이 분단되면서 사상 등을 이유로 본인의 독립운동이 묻히게 되면서 월북한 경우 국가보훈처는 월북한 독립운동가를 서훈 검토대상으로 넣지 않는다”라며 “김원봉 지사는 누구나 아는 조선의열단장이자 독립운동가지만 월북했다는 것으만로 매도해 서훈받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독립운동 시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항하기 위해 사회주의 운동을 했던 조봉암 선생도 비슷한 이유로 지금까지 서훈받지 못하고 있다”라며 “국가보훈처의 서훈 기준은 형평성이 없으며, 병폐”라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이 소장은 국가보훈처가 여성독립운동가뿐 아니라 미서훈자를 적극적으로 발굴해 서훈에 더 힘써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후손들이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하면 국가보훈처가 자료 미비라며 반려한다. 그러나 후손이 자료를 찾는 데 한계가 있다”며 “국가보훈처는 이를 반려할 게 아니라 직접 찾아 포상에 힘써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부연했다.

이어 “앞으로도 남성독립운동가에 비해 덜 알려진 여성독립운동가들을 계속 연구하고 발굴해 기록하겠다”라며 “후대에게 독립운동가들의 헌신과 희생 정신을 알리는 게 이 나라를 잘 꾸려갈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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