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학수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유산센터 센터장

강도의 성곽은 궁성, 외성, 중성 순으로 축조
사료에 ‘강도중성’은 황성이나 내성에 해당해
향토유적 제2호 ‘강화중성’의 성격은 강화도성
명칭을 ‘강화중성’ 아닌 ‘강화도성’으로 불러야
‘강도중성’ 위치와 범위는 조사해 다시 정해야

정학수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정학수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인천투데이 |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최근 강화군 향토유적 제2호 ‘강화중성’의 서남쪽 구간을 발굴조사 하다가 문지(門址)를 확인했다. 몽골이 전쟁을 끝내는 조건으로 강도의 내성과 외성을 파괴할 것을 요구함에 따라 고려의 강화천도(江華遷都) 28년째인 1259년(고종 46)에 고려 군사들이 성곽을 허물었다. 몽골 사신이 매우 급하게 공사를 독촉하자 동원된 여러 영(領)의 군사들이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고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성을 쌓지 않은 게 나았을 것”이라며 울부짖었고, 성곽이 무너지는 소리가 천둥 같아서 온 마을이 진동했으므로 길거리 아이들과 부녀자들이 모두 슬피 울었다고 한다. 이번 발굴조사로 연구자들은 1259년에 파괴한 내성과 외성 기록을 실물로 확인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한다.

‘강화중성’은 강화천도 19년째인 1250년에 축조됐으며, 현재 강화도성으로 이해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강도의 성곽은 궁성(1234), 외성(1237), 중성(1250) 순서로 축조됐다. 궁성은 궁장(宮牆, 대궐담장)인데 정문이자 남문인 승평문이나 ‘궐동문(闕東門)’ 기록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또, 파괴 기록만 있고 축조 기록이 없어 실체가 불분명한 내성이 있었다.

강도는 개경을 모방해 조성했다는 기록에 따라 연구자들은 강도의 성곽체제도 대체로 개경의 궁성, 황성, 나성과 같이 세 겹이었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지금까지 내성은 ①궁성 ②궁성과 황성의 중간 형태 ③황성 가운데 하나로 추정하는데, 1259년에 파괴한 내ㆍ외성 중 내성을 궁성으로 보든 중성으로 보든 강도도 ⓐ궁성(내성)-중성-외성 또는 ⓑ궁성-중성(내성)-외성 또는 ⓒ궁성-내성-외성(중성)의 세 겹 체제인 것은 개경과 동일하다고 보는 것이다.

개경에서 강화도로 건너온 후 고종이 처음 머문 곳이 강화현의 객관이었으므로 도읍 시설 중 제일 먼저 조성한 것은 궁궐과 도읍을 방어할 도성이었을 것이다. 신안식의 연구에 따르면, 그 이후 필요한 사정에 따라 황성 역할을 하는 중성을 축조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희인과 필자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럼 이번 발굴조사로 확인한 문지는 내성의 문지일까, 외성의 문지일까?

지금까지 강도의 성곽은 관청리 일대의 궁성, 염하변의 외성, 향토유적 제2호인 중성이 축조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조사에서 고려 강도 시기 해안에는 외성 축조 흔적이 발견되지 않음에 따라 이희인은 외성을 해안이 아니라 C자형으로 축조된 ‘강화중성’이 도읍을 둘러싼 형태의 외성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렇다면 외성의 문지이다.

그러면 내성은 무엇일까. 사료에 전하는 ‘강도중성’이 내성이라고 추정한다.

궁성과 외성(도성)이 있음에도 최항 집권기에 중성을 축조한 이유는 몽골군과 반란세력의 공격에 대한 군사적 방어력의 증대와 궁성과 주요 관서ㆍ사찰을 민가와 격리해 화재 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이유 등으로 축조했을 것으로 이해한다.

규모 면에서 강도의 궁성은 1.4㎞(내성 3874척), 강도중성은 5.4㎞(2960칸), C자형 외성은 11.2㎞(실측)로 파악된다. 중성은 규모가 개경 황성(4.7㎞)과 비슷하므로 ‘중성(中城)’이라는 말뜻에 부합한다.

특히 『고려사』 등 사료 표기법에서 강도의 외성을 ‘강화외성(江華外城)’이라 기록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중성은 「최항묘지명」에서 ‘강도를 둘렀다(屛江都)’고 기록한 것처럼, 강도와 병칭해 ‘강도중성(江都中城)’으로 기록했다. 필자는 내성도 파괴 기사에서 ‘강도내성(江都內城)’이라 기록했다는 점을 주목한다. 이는 궁성을 내성이라 한 사례가 없기 때문에, 중성이 내성일 가능성을 매우 높게 한다.

이처럼 기록상 강도의 중성은 내성으로도 불렸으며, 개경의 황성과 같은 역할을 9년간 수행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최신 연구 성과를 반영해 향토유적 제2호를 ‘강화중성’이 아니라 강화도성 또는 강도외성이라 불러야한다고 생각한다. 내성인 강도중성은 조선 전기엔 강화부성의 성터로 활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나 위치와 범위가 어떤지 알기 위해서는 정밀조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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