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수의 걷기여행 22 - 천년고도, 경주

▲ 불국사.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인데 김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 석굴을 창건했다고 한다.
지난 1월 7일부터 8일까지 1박 2일간 벗들과 신년 여행 삼아 경주에 다녀왔다. 케이티엑스(KTX)를 타고 가니 신경주역까지 2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 빠르기는 하다. 안내를 해주기로 한 송흥기 선생을 역에서 처음 만났다. 송 선생이 보내주던 ‘우리말 공부’ 메일을 받아보다 알게 됐는데, 얼굴은 이번에 처음 봤다. 인터넷이 맺어준 친구다.

신경주역은 경주시내에서 제법 떨어져 있었다. 문화재 보호 때문에 그리 됐다는데 약간 불편하다. 마치 공항에 내린 기분이다.

먼저 태종무열왕릉에 들렀다.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최초의 진골 출신인 김춘추의 능이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어쨌든 당과 연합해 백제를 정복하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다. 입구에 있는 무열왕릉비는 국보다. 무열왕릉은 신라의 왕릉 가운데 무덤 주인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능이다.

▲ ‘능’과 ‘묘’.
김유신묘도 멀지 않았다. 김유신도, 어쨌든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이다. 12지신상을 새긴 돌로 봉분을 둘렀다. 비석을 보니 능이라고 되어 있다. 김유신이 왕이었나? 송 선생이 비에 물을 뿌리니 ‘묘’자가 나타났다.

아마도 후손들이 ‘묘’자를 메우고 ‘능’자를 새로 판듯했다. 묘나 능이나,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뭐가 다르랴. 자료를 찾아보니, 흥덕왕이 그를 흥무대왕으로 받들고 왕릉의 예를 갖췄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묘 입구에 조성된 공원이름도 흥무공원이다.

포석정으로 갔다. 도대체 얼마 만에 와보는 포석정인가? 처음에는 포석정인지도 모르고 지나쳤다. ‘유상곡수’라는 말이 있다.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놓고 술을 마시며 노는 것인데, 중국의 왕희지가 그렇게 놀았다고 한다.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했다.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로 술 세잔을 마셔야했다.

포석정은 바로 이 유상곡수를 본 따 만들었다. 물길은 22m, 높낮이의 차는 5.9㎝라고 한다. 신라 경애왕이 이곳에서 술 먹고 잔치를 벌이다 견훤에게 잡혔다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은 소문이라고 한다. 견훤이 쳐들어간 때는 추운 겨울. 추운 날에 포석정에 앉아 술 먹고 놀았을 리 없다. 역사는 어차피 승자의 기록, 백제 의자왕도 궁녀를 무려 3000명이나 거느렸다지 않은가? 모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백성들이 피해를 입을까봐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특히 아들 마의태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평화적으로(?) 나라를 고려에 넘겨줬다. 경주라는 지명은 피 흘리지 않고 기쁘게 얻은 땅이라는 뜻으로, 왕건이 지었다는 얘기가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경주사람들에게 ‘경주’는 기분 좋은 지명은 아니다.

▲ 포석정.
하기야 나라 이름이 신라에서 고려로 바뀌었다고 해서 백성들의 삶은 무엇이 달라졌겠는가? 경순왕은 여생을 편하게 잘 살았다. 능도 경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성 근처에 있다. 신라 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 지역을 벗어나 있다. 포석정할 때 ‘포’는 ‘전복 포’자다. 잔을 띄운 곳의 모습이 전복 모양이다. 전복은 여성의 성기 모습을 닮았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물이 흘러나오던 곳은 거북 모양이다. 거북의 머리는 남성의 성기를 닮았다. 결국 포석정은 음양이 함께 어우러진 곳, 다산을 상징한다.

수리뫼라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궁중요리를 하는 곳인데, 경주를 방문하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식당이다.

동리목월기념관에 갔다. 불국사에서 석굴암 올라가는 길 오른쪽에 있다. 동리와 목월, 남한 문단의 두 거목이 같은 경주 출신에, 중학교 선후배 사이인 줄은 몰랐다. 문학에도 승자가 있을까? 문학판도 역사처럼 승자의 기록일까? 어릴 때부터 국어교과서는 온통 동리 아니면, 목월 아니면, 미당이었다. 호까지 달달 외우고 있지 않은가? 백석, 이용악, 정지용을 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불국사로 갔다. 정말 오랜만이다. 중학교 수학여행 때 왔었나? 아니 대학교 다닐 때인가?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다. 불국사는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인데 김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 석굴을 창건했다고 한다.

▲ 석굴암 입구.
대단한 김대성이다. 그러나 20여년간이나 공사를 했지만 정작 그는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불국사는 말 그대로 신라인이 그리던 불국, 즉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석가탑과 다보탑은 오히려 너무 유명해 아무 감흥이 없다.

다시 버스를 타고 석굴암으로 올라갔다. 길이 넓어진 것 같다. 석굴암은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토함산 중턱에 화강암으로 석굴을 만들고, 본존불인 석가여래와 벽면에 여러 불상을 조각했다. 불교 조각품 중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그런데 유리로 막아 놓아서 들어가 볼 수 없다. 밖으로 나오니 경주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경주에서 감포 가는 길은 듣던 대로 아름다웠다. 문무왕릉으로 갔다. 흔히 대왕암으로 불리는 문무왕릉은 해변에서 200m 정도 떨어진 바다 속 수중릉이다. ‘나 죽어 동해바다를 지키는 용이 되리라’ 했던 바로 그 문무왕의 능이다. 바다 속에 거북모양의 돌이 덮여 있는데, 이 안에 문무왕이 안치돼있다고 한다.

이곳은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은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파도가 바로 무릎 밑까지 쳐들어오는 식당에 앉아 친한 벗들과 회 한 점을 안주로 소주 한잔을 기울이니 세상 부러운 게 없다.

안압지 야경을 보기 위해 다시 경주 시내로 나왔다. 안압지는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던 곳이다. 정식 명칭은 임해전지다.

▲ 안압지의 야경.
1975년 발굴 당시 많은 유물이 나왔는데, 가장 재미있는 것이 주령구였다. 주령구란 14면체 주사위인데, 술 먹다 이 주사위를 던져 벌을 줬다. 열네 가지 다양한 벌칙들이 신라인들의 음주습관과 풍류의 일단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노래 없이 춤추기, 한잔하고 크게 웃기, 술 석 잔을 한 번에 마시기(‘후래자 삼배’는 그때도 있었네), 러브샷, 간지러움 태워도 참기, 시 한수 읊기, 더러운 것 버리지 않기 등. 숙소를 정하고 밖으로 나와 몇 차례나 차수를 변경해가면서 술을 마시니, 신라의 달밤은 어지러워만(?) 갔다.

아침에 일어나 그토록 괴로울 줄 알았다면, 전날 술을 절대 안 먹었을 텐데. 술은 평생 마시고, 또 평생 후회한다. 양동마을로 갔다.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 경주시 강동면 설창산에 둘러싸여 있는 유서 깊은 양반 마을이다. 2010년 7월, 브라질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 양동마을.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 두 성이 서로 경쟁하고 협동하면서 600여년간의 역사를 일궈온 마을이다. 대학자 이언적이 양동마을 출신이다. 국가가 지정한 전통마을 중 마을의 역사와 규모, 보존상태, 문화재의 수와 전통성, 뛰어난 건축양식, 조경학, 아름다운 자연환경, 때 묻지 않은 향토성 등의 면에서 한국에서 가장 우수한 가치를 지닌 마을로 평가받고 있는 곳이다.

먼저 관가정으로 갔다.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배롱나무는 한자어로는 자미화라고도 하며, 개화기가 길어서 백일홍이라고도 한다. ‘붉은빛 꽃이 백일 동안 피어 있는 나무’란 뜻이다. 백일홍나무였다가 배기롱나무로, 다시 배롱나무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백일홍은 국화과 식물에도 있으므로 구별하기 위해 목백일홍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고, 껍질을 긁으면 잎이 약간 흔들린다 하여 간지럼나무로 부르기도 한다. 도종환 시인이 쓴 ‘목백일홍’이란 시가 생각난다.

‘피어서 열흘 아름다운 꽃이 없고
살면서 끝없이 사랑 받는 사람 없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하는데<이하 생략>’

서백당으로 갔다. 월성 손씨 종가집이다. 어느 풍수가가 이 집에서 위대한 인물 3명이 태어날 거라고 예언했단다. 청백리 손중돈(이언적의 외삼촌)과 회재 이언적(외가)은 이미 태어났다. 세 번째 위인은 누구일까? 그런데 이집에서 만들어야 되는 건가, 낳아야 되는 건가? 객쩍은 생각이다.

‘번뇌속의 차 한 잔’이란, 이름도 고상한 찻집에 가서 송 선생이 특별히 주문한 닭백숙으로 점심을 먹었다. 주인아주머니가 담근 야관문주도 한 잔 했다. 밤늦게 과부가 사는 집에 가서 이 술을 먹고 왔다고 하면, 잽싸게 문을 열어준다는 바로 그 술이란다.

옥산서원으로 갔다. 이언적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한 서원이다. 기보다 이를 중시하는 이언적의 주리적 성리설은 이황에게 계승됐다. 사액서원이고 대원군의 서원 철폐 정책에도 살아남은 서원 중 하나다. 구인당은 강당이고, 무변루는 2층 누각으로 유생들이 휴식하는 곳이다. 앞쪽에 공부하는 곳, 뒤쪽에 사당을 배치한 전형적인 전학후묘 형식의 서원이다. 현판은 추사의 글씨다.

이언적의 고택인 독락당으로 갔다. 계곡 쪽에 있다. 박인로의 유명한 가사 ‘독락당’이 바로 이 독락당이다. 박인로가 독락당을 찾아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이언적의 덕을 추모해 읊은 가사다.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었을 테니 공부가 저절로 됐을 듯하다.

▲ 대릉원.
대릉원으로 갔다. 커다란 능이 있어서 대릉인줄 알았더니 ‘미추왕을 대릉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딴 것이란다. 신라시대의 왕·왕비·귀족 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묘가 23기나 모여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그 유명한 천마총이다. 70년대에 23기 중 가장 작은 무덤을 하나를 발굴했는데 말 그림의 안장이 나와서 천마총으로 불렀다. 천마총에서만 장신구류 8767점, 무기류 1234점, 마구류 504점, 용기류 226점, 기타 796점 등 총합 1만 1526점의 유물이 나왔다. 누구의 무덤인지 확실하지 않을 때 ‘총’이라고 하는데, 소지마립간 또는 지증왕을 이 고분의 피장자로 추정하고 있다.

오랜만에 첨성대를 다시 본다. 이렇게 작았나? 계림은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닭이 울었다고 하여 계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신라의 국명으로 쓰이기도 했다.

석빙고는 보물 제66호로,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석조 창고로 겨울에 얼음을 채취해 저장했다가 여름에 사용했다. 생각해보니 우리가 신라시대 역사를 너무 과도하게 공부한 것 같다. 이것도 아마 박정희의 유산이겠지.

신라 시대의 성은 왜 흔적도 없이 모두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월성은 지금은 평평한 들판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월정교는 신라궁궐과 외부를 연결하는 통로였는데 현재 복원 중이다. 다리 위를 기와지붕으로 덮은 루교다.
이제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삼국사기에, 경주의 절은 하늘의 별보다 많고, 경주의 탑은 기러기가 줄지어 선 것 같다더니, 경주의 유물은 한도 끝도 없다.

▲ 계림지의 석양.
천년의 유적을 단 이틀에 모두 본다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겠지. 국보만 31개이고 보물이 82개다. 그래도 ‘노천 박물관’ 남산은 봤어야하는데, 김시습이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쓴 금오봉 중턱 용장사도 못 가봤다.

현재 경주 인근에 월성원전이 들어서 있고, 야산 지하에는 방폐장이 들어서고 있다. 방폐장을 유치한 인센티브로 한국수력원자력이 들어설 예정이지만, 그 장소 문제로 경주 전체가 몸살을 앓고 있다. 과거와 현대의 조화로 봐야할 것인가? 고대와 첨단이 어우러진 도시로 봐야할 것인가? 쉽지 않은 문제다.

황남빵 또는 경주빵은 경주시민들이 살아갈 먹거리의 대안으로 너무 약한가? 계림 숲 사이로 해가 지고 있다. ‘천년 고도’ 경주는 (놀랍게도 경주사람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천년고도’라는 말이라고 한다.) 어디로 갈 것인가?
▲ <글·사진> 신현수 시인·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