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이웃] 십정동 불정사 주지 현광스님

십정동에서 25년 동안 ‘보시행’ 실천 
전산프로그램 개발, 투명한 사찰 운영

▲ 십정동 불정사 주지 현광스님.
인천 부평구 십정동에 있는 부평아트센터의 주차장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 불정사가 오는 19일 창건 25주년을 맞는다. 또한 이 날은 불정사의 주지 현광스님이 출가한 지 30년이 되는 날이다. 이를 기념해 19일 오전 10시 30분에 신도 등을 초청해 법회를 연다.

불정사의 전신인 월봉 약사암이 십정동에 둥지를 튼 건 1987년. 현광스님이 지금의 사찰을 만들기까지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지하단칸방에서부터, 빌라에서, 부처님을 모셔야했지만, 부처님을 향한 마음으로 꾸준히 달려왔다. 그 과정에서 현광스님은 십정동 주민들의 이웃이 됐다. 불교인으로서, 십정동 주민들의 이웃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그가 걸어온 삶은 범상치 않다.

“속세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살고 싶었다”

현광스님은 1958년 서울에서 육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가 둘 있다. 출가하기 전에는 공승학으로 불렸다. 그의 가족은 그가 열아홉일 때 인천으로 내려왔다. 십정동 기찻길 옆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 때 주변은 돌산이었고, 백운역 옆을 제외하고 집이 거의 없었다. 지금 동암신동아아파트 자리에는 양계장들이 있었고, 그곳에서 한센병 환자들이 살았다. 거의 모두가 어렵게 살던 때였다. 그의 집안도 그러했다. 그의 출가는 가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집안이 굉장히 가난했다. 그 와중에 아버님(당시 70세)이 어디를 다녀오시다 버스 안에서 쓰러지셨다. 뇌출혈이었다. 병원엘 갔는데, MRI(=자기공명영상) 촬영 비용이 15만원이라고 했다. 그런데 가진 건 12만원이 전부였다. 병원은 3만원이 부족하다고 찍어주지 않았다. 그날 밤 아버님은 돌아가셨다. MRI를 찍었더라도 돌아가셨겠지만, 자식으로서 지금도 큰 상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뇌를 많이 했다”

당시 현광스님은 홍제스님(=현 관음정사 주지스님, 부평구불교연합회 회장)의 권유로 출가를 결심했다. 그의 어머니와 홍제스님은 가까운 사이였다. 현광스님은 가난 때문에 겪은 상처를 씻기 위해 출가의 길을 택했다. 하지만 그의 출가는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 속세에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는 홍제스님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말뿐만이 아니라 몸으로 ‘보시행’을 실천

그래서 현광스님은 ‘보시행(=베푸는 행위)’을 펼친다. 일례로 불정사만의 전통이 있다. 예로부터 사찰에서는 해마다 일정한 때에 방생(放生)을 하고자 방생계라는 것을 조직해 방생회를 연다. 방생은 다른 사람들이 잡은 물고기·새·짐승 따위의 산 것들을 사서, 산에나 못에 놓아 살려주는 일을 뜻한다.

방생 가는 날, 현광스님은 신도들에게 그러지 말고 어려운 이웃 7~15명을 도와주라고 한다. 그것이 방생이라고 강조하면서. 그는 말뿐만이 아니라 몸으로 보시행을 실천해왔다. 해마다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해주라며 적지 않은 쌀을 동 주민센터에 전달해왔다. 그것이 벌써 17~18년 이어지고 있다. IMF 한파가 몰아칠 때는 노숙자들에게 점심을 제공했다. 또한 심장병을 앓는 아이들을 찾아내 돕기도 했다. 형편이 정말 어려운데, 도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아이들을 찾아가 손을 잡아줬던 것이다.

지금도 불정사에는 쌀자루가 하나 있다. 많은 날은 하루에 열명도 찾아와 쌀을 가져간다. 그러다보니 부작용도 생긴다. 하나를 주면 둘을 달라는 사람이 생기는 법. 막무가내로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리는 사람도 있다. “2003년이었는데, 어머님이 신발로 뺨을 맞기도 하셨다. 자식 때문에….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굉장히 아프다. 어머님(82세)이 지금은 중증환자로 병원에 계시는데, 쓰러지는 날까지 나를 돌봐주셨다”

물질적인 도움만으론 한계가 있다고 보는 현광스님은 ‘신행’상담을 중요하게 여긴다.
“지금 신도가 1000가구가 넘지만 ‘3분의 2’가 어려운 사람들이다. 신행상담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곧 부처이며, 마음속의 부처를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래서 신도들에게도 절에 자주 못 오게 한다. 절에 자주 오는 만큼 가족과 가정에 소홀해질 수 있다. 가족이 편해야한다. 자신과 가족을 돌보는 게 더 중요하다”

사찰 관리 전산프로그램 개발해 투명한 운영

불정사가 신도들에게 좋은 평판을 가지고 있는 다른 하나는 사찰 행정의 투명성이다. 1988년, 일찍이 불정사는 자체로 사찰 관리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한국 사찰 가운데 최초다. 이 전산프로그램은 사찰이 돌아가는 상황을 속속들이 보여준다. 신도 관리뿐 아니라 사찰 입출금이 컴퓨터에 입력돼 신도들이 그 내용을 볼 수 있다. 2003년엔 이 프로그램을 태고종 총무원에 기증해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현광스님은 투명한 사찰 운영시스템을 갖추는 데 그치지 않았다. “불사를 위해 시주를 걷지 않는다”는 그의 말이 인상적이다. 보통, 절에선 사찰을 증개축할 때 시주를 걷는데 말이다.

참다운 보시행은 ‘무주상보시’

현광스님에겐 앞으로 하고픈 일이 있다. 무의탁 노인을 돕고 맞벌이 부부들을 위한 탁아소를 운영하기 위해 몇 해 전부터 준비해왔다. 이를 위해 불정사 옆 빌라를 매입해 놓기도 했다. 지금은 사찰과 함께 재개발구역으로 묶여있어 더 기다려야 하지만, 꼭 이루고 싶은 꿈이다. 또한 올해부터는 장학사업도 시작할 계획이다. 올해엔 어려운 학생 5명 정도로 시작 점차 장학생을 늘려나갈 생각이다.

현광스님은 자신의 보시행을 주변에 잘 알리지 않았다. 동 주민센터에서 쌀 전달식에 나와 달라고 수차례 요청해도 거절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행해지는 보시행이야말로 참다운 보시행’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는 “남을 도와준다는 건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남을 도우면 마음이 편안해지는데, 그것이 곧 극락이다. 남의 것을 빼앗으면 불안해지는데, 그것이 곧 지옥”이라고 말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무주상보시’를 실천하라는 가르침이 있다고 한다. 아무 조건 없이 모든 것을 베푸는 것이라는 무주상보시. 현광스님은 이를 몸소 실천하고 전파하려 노력하는 듯 보였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