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수의 걷기 여행 <15> 남이섬

1년 중, 선생들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날이 있다. 바로 개교기념일. 남들 모두 일할 때 혼자만 쉴 수 있다는 ‘통쾌함’ 때문에 선생들은 대부분 그날을 뭔가 의미 있고 알차게 보내고 싶어 한다. 지난 5월 6일은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의 개교기념일이었다. 무얼 하면서 알차고 의미 있게 보낼까 생각하다가 평소에 한 번 가보고 싶었던 남이섬에 다녀왔다.

평일, 그것도 아침에 서울 방향으로 가는 전철을 타는 건 좀처럼 드문 일이다. 젊은이들이 신문 대신 아이패드를 들고 있다. 예전에는 보기 어려웠던 풍경이다. 남이섬 가는 셔틀버스는 종로 탑골공원 담장 옆 도로에 있다.

예상 외로, 남이섬 가는 셔틀버스에 빈자리가 하나도 없이 꽉 찼다. 예약을 못한 한 쌍은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간다. 아니 평일인데. 모두 개교기념일이라는 말인가? 버스 좌석마다 책이 꽂혀 있었다. 남이섬주식회사 강우현 사장의 ‘상상망치’라는 책. 남이섬에 도착할 때까지 반쯤 읽었다. 책의 요지는 ‘발상의 전환’, ‘창의력’ 등등. 나는 오늘 남이섬에서 무얼 배워갈 수 있을까?

북한강 위에 떠 있는 반달 모양의 섬

▲ 남이섬의 상징인 메타세콰이어길.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출입국 수속’을 밟은 후(나야 미리 ‘여권’을 인터넷으로 예약했지만) 배를 타고 ‘나미나라공화국’으로 건너갔다. 모두 강우현 사장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남이섬은 원래 춘천시 남산면 방하리에 붙어 있는 육지로서 홍수 때만 섬이 되었는데, 1944년 청평댐이 만들어지면서 완전한 섬이 됐다. 북한강 위에 떠 있는 반달 모양의 남이섬은 넓이 약 46만㎡에, 둘레는 약 5km로 여의도 면적의 ‘5분의 1’쯤 된다. 행정구역상 섬은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방하리에, 주차장은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달전리에 속한다.

배를 탔는데 선실 안내문도 예사롭지 않다. ‘물방울이 차가울 때, 태양이 뜨거울 때, 사랑이 다가올 때, 사랑이 멀어질 때’만 사용하는 곳이란다. 다 이해가 가는데 사랑이 멀어질 때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남이섬으로 이별여행 온 사람들을 말하는 건가? 사랑이 멀어지는데 선실에 들어가서 뭘 어떻게 하지?

배를 10분 정도 타고 남이섬에 도착했다. 얇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관광안내소에 가서 안내지도를 한 장 받아들고 남이섬 투어에 나섰다.

남이 장군의 기개

입구에 소주병으로 만든 조형물이 눈에 띈다. 강우현 사장의 주된 생각주제 하나가 ‘재활용’이다. 소주병만 굴러다니던 남이섬을 현재와 같은, 모두 한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여행지로 만든 강 사장의 아이디어를 상징하는 것 같다.

‘중앙잣나무’길로 접어드니 왼편에 남이(南怡:1441~1468) 장군의 묘가 있다. 하기야 남이섬은 남이 장군의 이름에서 따왔다. 누가 상석 위에 사과를 한 개 올려놓았다. 뜻을 펴지 못하고 일찍 죽은 남이 장군을 그리워하는 이인가?

1965년에 남이섬을 처음 매입한 사람은 수재 민병도 선생. 매입 당시에는 남이 장군의 묘라고 전해진 돌무더기에 불과했다. 이 돌을 옮기거나 집으로 가져가면 액운이 낀다는 전설이 있었다고 한다. 민병도 선생이 봉분을 만들고 추모비를 세웠고, 이은상 선생이 추모글을, 김충현 선생이 글씨를 썼다.

남이 장군은 조선 세조 때의 무신인데 17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했다. 1467년(세조 13년)에 이시애의 반란을 토벌해 공신에 올랐고, 27세의 젊은 나이로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평소 그를 시기하던 유자광의 모함을 받아 처형됐다. 1818년(순조 18년)에 복권돼 ‘충무’라는 시호를 얻었다. 학창시절 배운 남이 장군의 시가 생각난다. 그의 죽음과도 연관된 시다.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다 닳아 없애리라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모두 없애리라.
사나이 스무살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칭하리오.


대단한 기개다. 그러나 바로 이 시를 유자광이 조작(‘나라를 평정치 못하면’을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섬에 기차라! 유니세프 나눔 열차

▲ 유니세프 나눔 열차.
장군 묘에서 내려와 걸으니 열차역이 있다. 섬에 기차라. 이것도 발상의 전환인가? 그런데 기차 타는 사람의 기분을 참 즐겁게 한다. 기차 이름이 유니세프(UNICEF) 나눔 열차다. 이 기차를 타는 일이 전 세계의 어려운 아동들을 돕는 일이라니, 열차 요금 2000원이 전혀 아깝지 않다.

유니세프를 입에 자주 올리지만 정작 어떤 단어들의 약자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중에 찾아보니, ‘United Nations International Children’s Emergency Fund’ 즉, ‘국제연합 국제아동 긴급 기금(=1946년 개발도상국 아동의 복지 향상을 위해 설립한 국제연합의 특별기구)’의 약자다.

국적이나 이념, 종교 등의 차별 없이 어린이를 구호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연합의 상설보조기관 가운데 하나다. 1946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기아와 질병에 지친 아동을 구제하기 위한 긴급원조계획으로 ‘유엔 국제아동 긴급구호기금’이라는 명칭으로 발족했다. 본부는 뉴욕에 있다.

유니세프의 설립정신은 국적이나 이념, 종교 등의 차별 없이 어린이를 구호한다는 ‘차별 없는 구호’이며, 이에 따라 2차 대전의 승전국과 패전국, 동유럽과 중국, 한국의 어린이들도 유니세프의 도움을 받았다.

기차를 타고 섬의 북쪽에서 남쪽까지 간다. 그래야 10여분 타는 거지만, 역도 시발역인 선착장역과 종착역인 중앙역 단 두 개지만, 어쨌든 기차로 섬을 종단한다.

소주병이 아름다운 꽃병으로!

▲ 소주병으로 만든 조형물.
중앙역에 내려 ‘메타세콰이아’길을 걸었다. 드라마 ‘겨울연가’로 유명한 길이다.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리는 메타세콰이아 묘목을 1977년 서울대학교 농대에서 가져와 심었다. 키가 빨리 자라고 우아한 기품과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는 이 나무 길은 지금도 드라마나 영화, 그리고 여행자들의 촬영 명소다. 남이섬의 상징나무길이기도 하다.

드라마가 끝난 지 오래됐는데 아직도 일본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콘텐츠(=내용 또는 주제)의 힘은 대단하다. 수제 소시지를 하나 사먹었다. 혼자 다니는 여행의 묘미다. 나를 아는 이 없으니 체면이고 뭐고 따지지 않게 된다. 행복원미술관에 가니 중국인 우경성 선생의 진흙예술 작품을 전시해 놓았다. 하찮은 진흙이 우 선생의 손을 거쳐 예술이 됐다.

행복정원 옆 유리공방에 가니 소주병으로 만든 유리공예가 눈길을 끈다. 남이섬에 굴러다니던 소주병의 목을 늘여놓으니 정다운 한 쌍의 학이 되고 아름다운 꽃병이 됐다. 발상의 전환이다.

정관루로 갔다. 남이섬에는 숙박시설이 있는데 별장과 정관루 두 종류다. 별장은 에델바이스 별장 등 다인실과 투투별장 등 2인실이 있는데 다인실은 취사가 가능하다. 정관루는 말하자면 남이섬의 호텔인데 방 하나하나를 모두 다른 작가들이 디자인했다. 밤이 되고 불을 모두 끄면 남이섬에는 달빛과 별빛과 ‘고요’만이 남는다. 남이섬에서는 ‘고요’도 중요한 콘텐츠다. 시간 나면 다시 와 1박을 하면서 남이섬의 ‘밤의 고요’를 느껴보고 싶다.

남이섬에선 청소도 예술이다. 낙엽을 빗자루로 쓰는데도 예사롭지 않다. 그냥 다 쓸어버리는 게 아니라 그 위에 그림을 그린다. 낙엽은 그대로 캔버스가 되고 빗자루는 붓이 된다. 남이섬에서는 낙엽을 쓰는 일이 더 이상 노동이 아니다. 남이섬에서 낙엽을 쓰는 일은 그래서 예술이다. 청소부가 아니라 길 위의 예술가다.

남이섬 설립자 민병도 선생

남이섬 설립자 수재 민병도 선생은 판사 출신으로 한국 최초의 출판사인 을유문화사를 정진숙, 윤석중, 조풍연 선생 등과 함께 설립하기도 했고, 국내 최초의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을 현제명 선생 등과 창설하기도 했으며, 어린이 문학지인 ‘새싹문학’을 윤석중 선생과 함께 창간하기도 했다.

또한 60년대 말부터는 천리포수목원의 민병갈 선생과 함께 나무 심기 운동을 펼치는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65년 남이섬을 사들인 후 경춘관광개발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섬의 북쪽 끝에 북풍을 막아주는 천경원, 남쪽 끝에 따뜻한 남풍을 안아 들이는 창경원을 짓는 등 평생 남이섬에 나무를 심었다. 2006년에 타계했다.

민병도 선생의 동상을 보고나서 안데르센홀로 갔다. 남이섬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세계 아동도서 축제도 열린다.

‘송파은행나무’길을 걸었다. 이 길도 ‘발상의 전환’으로 유명한 길이다. 송파구청은 늦가을 도로에 떨어진 은행잎 처리에 골치를 썩였다. 그 얘기를 들은 강 사장이 가져다 은행나무 밑에 푹신하게 깔았고, 그 길은 이제 유명한 은행나무길이 됐다. 은행나무 잎이 상할 정도가 되면 또 새로 깐다. 은행잎은 무궁무진하니까.

상한 은행잎은 태운다. 낙엽 태우는 풍경을 또 하나의 관광콘텐츠로 만든다. 재는 퇴비로 쓴다. 송파구청으로서는 은행잎 처리비용이 들지 않는다. 길 이름에 ‘송파’를 붙여주니 저절로 홍보가 된다. 자칫 쓰레기로 버려질 은행잎이 모두에게 이로운 은행잎으로 바뀌었다.

이야기와 콘텐츠의 원천은

▲ 낙엽을 다 쓸어버리지 않고 그림을 그려 놓았다.
열차 타고 온 길을 되짚어 선착장 쪽으로 걸었다. 유니세프 환경무대에서는 록그룹의 공연이 시작되고 있었다. 모르는 노래지만 그룹도 청중도 모두 진지하다. 역발상나무라는 이름의 나무가 있었다. 물론 식물도감에 그런 나무는 없다. 자세히 보니 나무를 거꾸로 세워놓았다. 뿌리가 하늘로 갔다.

겨울연가 첫 키스 다리와 첫 키스 자리(사실 드라마를 보지 않아 잘 모르지만)를 지나서, 남이섬에서 유명한 타조의 사진을 찍어주고 난 후, 전시관으로 갔다. 제미영 작가의 ‘색깔풍경 조각조각전’이라는 이름의 전시를 하고 있었는데, 수와 조각천으로 그림을 그렸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이것도 발상의 전환. 오늘 기행의 주제는 아무래도 ‘발상의 전환’인 것 같다.

나루터로 돌아와 이번에는 섬을 일주하는 전기자동차를 탔다. 운전기사가 잘 생겼다. 잘 생기니 괜히 기분이 좋다. 섬 동쪽 북한강을 따라 난 자작나무 길과 튤립나무 길을 천천히 달렸다. 비늘처럼 반짝이는 북한강을 바라보며 한 쌍의 남녀가 앉아있다. 벤치 옆 나무처럼 저들의 사랑도 영원할 수 있을까?

야외무대도 보인다. 기사가 설명을 해주는데, 바로 가수 이선희가 ‘제이(J)에게’를 불러 상을 탔던, 강변가요제가 열렸던 곳이란다. 섬 서쪽의 굴피나무길이 재미있다. 나무가 사정없이 이쪽저쪽으로 굽어 있다. 그래서 굴피나무인가?

비가 제법 내린다. 한 가족이 깔았던 매트를 뒤집어쓰고 걸어가고 있다. 아, 그렇구나. ‘삶의 비’를 함께 피하는 게 가족이구나.

전기자동차에서 내렸는데 아직 돌아갈 시간이 이르다. 화석원을 거쳐 참전기념탑으로 갔다. 나미나라공화국의 문자는 윈난성 리장 나시족의 동파문이다.

선뜻 이해가 안 가는 이상하게 생긴 곳이 있어 가보니 ‘짚와이어’라고 해서 줄을 타고 남이섬으로 들어오는 곳이었다. 남이섬으로 들어오는데 이런 방법도 있었구나. 강을 가로 질러 줄을 타고 공중으로 ‘나미나라’에 ‘입국’하는 것도 색다른 체험일 것 같다. 난 별로 타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이제 남이섬을 떠날 시간. 선착장 근처에 있는 남이섬의 또 하나의 명물, 인어공주가 비를 맞고 서 있다. 벌거벗고 있으니 내려가 옷이라도 입혀주고 싶은데 엉덩이에 ‘돈 터치 미’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이 인어공주도 - 사실 하반신도 사람의 몸이니 인어공주도 아니지만 - 섬 한 구석에 버려져있던 것을 선착장 쪽으로 옮겨 세워 놓았는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됐고, 결국 정식으로 덴마크 안데르센 박물관 쪽의 인증도 받았다. ‘이야기와 콘텐츠’는 대단한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난 어떤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하나?

▲ 역발상나무. 나무를 거꾸로 세워놓았다.
‘나미나라’를 떠나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강가 번지점프장으로 갔다. 열혈 청년들이 비를 맞고 번지점프를 하고 있다. 용감무쌍하게 하나 둘씩 강으로 뛰어내리고 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짧은 바지를 입은 젊은 여성이다. 저들의 용기가 참으로 부럽다.

생각해보니 점심을 안 먹었다. 모든 식당이 닭갈비만 판다. 비를 피해 식당을 찾아들어가니 한 가족만 빼고 모두 쌍쌍이다. 나만 혼자다. 닭갈비는 2인분만 판다. ‘대략 난감’이다. 홀로 여행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오늘따라 혼자라는 게 불편하다. 묵밥과 막걸리 한 통을 시켰다.

막걸리를 ‘3분의 2’쯤 먹으니 기분이 ‘알딸딸’하다. 비는 퍼붓고, 묵밥을 안주로 혼자 막걸리를 따라 먹고 있자니 갑자기 비감해지면서 눈물이 나려고 한다. 내 삶의 어느 구비를 나는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눈물과 함께 비도 그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가는 버스 안에서 오줌 마려우면 그건 더욱 ‘대략 난감’이므로 막걸리를 남기고 식당을 나왔다. 아, 낮술은 이런 기분으로 먹는 것이군.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강우현 사장이 쓴 책을 다 읽었다. 세상일은 저절로 되는, 쉬운 일이 하나도 없는 법. 강 사장은 남이섬을 새롭게 디자인하면서, 그의 개혁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숱한 고난을 겪었고, 심지어는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목숨을 안 걸면 되는 일이 없구나.)

나의 삶은 무엇을 바꾸어 하나? 나는 어떤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하나? 나는 내 삶에서 무엇에 목숨을 걸어야 하나? 새로 시작하는 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는 어떤 ‘발상의 전환’을 통해서 발전해나가야 하나? 인천의 굴업도도 남이섬처럼 환경친화적으로 개발하면 좋으련만, 재벌이 이미 사들여 골프장을 짓는다니 답답하다.
▲ 신현수(시인ㆍ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


※ 이 글을 쓰기 위해 참고한 책 - 남이섬 CEO 강우현의 상상망치, 강우현 저, 나미북스

※ 필자의 홈페이지(http://cafe.naver.com/shinhyunshoo)에서 더 많은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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