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영업자는 살아있다] 고추장ㆍ된장ㆍ간장 유통만 28년, 조중목씨

4H운동 집어치우고 검정고무신 신고 상경

▲ 장사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조중목씨.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박정희 쿠데타정부 시절, 이젠 기억조차 가물 하지만 마을 어귀마다 네잎클로버 문양에 ‘4H’라고 명명한 지덕노체(智德勞體)가 선명하게 새겨진 비석이 있었다. 지덕노체를 영문으로 번역해 앞글자(지-Head, 덕-Heart, 노-Hand, 체-Health)만 따서 이른바 4H운동이라 불렀다.

인천유통상인연합회장을 맡아 최근 ‘SSM(=기업형 슈퍼마켓) 규제법안’ 마련 운동에 함께하고 있는 조중목(59) 동양식품 인천영업소장은 4H운동이 한창이던 23세 때 가평군 고향마을을 3년 동안 4H운동 최우수 마을로 만든 장본인이었으나, 거꾸로 농촌은 더욱 피폐해지는 상황이 이해가 안 돼 고향을 떠났다.

고향을 떠나 공장과 건설현장, 식당을 누비며 산전수전 다 겪고 심지어 목숨까지 버리려했던 그가 이제는 벼랑 끝에 몰린 상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상인들의 운명과 마주하고 있다. 그도 이젠 식자재 도매유통업에서 28년째인 베테랑이지만, 삶은 여전히 고달프다.

조중목 회장은 “우수 구락부 상 받아가며 열심히 농사져 생산해도 소용없었다. 특용작물? 재배해도 판로가 없었다. 이래저래 청산하고 남은 돈으로 어머님과 형님은 미아리고개 근처 전셋집을 구해 살게 하고, 난 검정고무신 딱 한 켤레 들고 공장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73년 1월. 그렇게 그는 타지 생활을 시작했다. 맨 처음 일하게 된 곳이 홍제동 염색 공장이다. 그곳에서 꼬박 4년 6개월을 일했다. 양장 원단을 생산하던 공장이었는데, 당시 김동호 사장의 ‘자네는 사장이 될 재목’이라는 말에 힘을 얻어 장사 일에 나섰다.

어쩌면 이때가 단초가 됐을지 모른 채 그는 공장을 나와 동대문시장에서 일한다. 원단을 생산하던 노동자에서 이제는 파는 사람이 된 것. 하지만 쉽지 않았다. 젊어서였을까, 세상 물정 몰라서였을까, 그는 장사도 그만두고 다시 건설 일에 나섰다. 동아건설이라는 말에 혹해서 갔더니 알고 보니 하청이었다.

조 회장은 “뭐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내 팔자가 왜 이러지 하는 생각도 들고… 동대문시장에서 일할 때 만난 아내와 골몰하던 끝에 건설 일을 정리하고 80년 1월 인천 부평으로 내려왔다”며 “그때부터 인천생활이 시작됐다. 현 롯데백화점 부평점 앞에서 삼겹살구이 식당 ‘부신정’을 개업하고 다시 장사를 시작했는데 장사가 비교적 잘돼, 아! 이제는 팔자가 풀리나 보다 생각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죽으려했더니, 문 걸어 잠그고 혼자 죽으라고

나름대로 식당이 제자리를 찾고 있을 1983년 무렵, 식당을 자주 이용하던 손님이 그에게 솔깃한 제안을 하나 건넸다. 그게 바로 도매유통업이다.

그 손님이 조 회장더러 ‘장사를 잘할 것 같다. 식당을 하고 있으니 식자재 도매유통업을 한 달 정도 해보고 자신감이 생기면 한번 해보라’고 권유했던 것. 식당이 자리를 잡긴 했으나 가족들의 고생이 심해 안 그래도 이 궁리 저 궁리 중이었던 그는 그 길로 따라 나섰다.

조 회장은 “한 20일을 식당하면서 따라 다녀보니 이건 ‘나를 위한 일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자신감 있었다. 그래서 그 길로 바로 인수했는데, 그 도매유통업체가 지금 내가 운영하는 가게다. 전에 경영하던 사람의 월 매출이 260만원이었는데, 내가 1000만원을 기록했다. 일이 재미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었던 때”라고 말했다.

당시 그가 고용하고 있던 직원 중 운전기사의 월급이 15만원, 경리가 8만원 할 때라 20% 마진율을 적용하면 200만원에서 150만원이 그의 소득이었다. 이렇게만 가면 부자 되는 것은 금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국내 식자재 시장이 커지자 일본 간장이 한국에 상륙했다. 조 회장은 “한 3개월 잘 되나 싶었다. 그런데 일본 업체가 들어와 시장을 흔들기 시작했다. 한국 제품을 폄훼하는 광고를 내보내니 매출이 반절로 뚝 떨어졌다. 반절로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살만했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결정적인 시련이 앞두고 있었다.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으로 식자재 납품하러가던 87년 5월을 그는 아직도 기억하지 못한다.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던 것. 운전 중 버스를 추돌했는데 같이 차에 타고 있던 이는 죽고, 자신은 간신히 살아남아 병원에 실려 왔다.

그는 “정신차려보니 병원이었다. 153일만에 병원에서 나와 보니 집도 날라 가고, 가게는 업체로부터 공급이 끊겨 팔게 없고, 남은 것은 빚 3000만원밖에 없었다. 3000만원, 지금도 큰돈이지만 그 땐 상상할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정말 답이 없었다. 이렇게 사느니 죽자고 했다. 그래서 연탄불 방에 가져다 놓고 아내와 죽자고 했더니, 아내가 밖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러고선 죽으려면 혼자 죽으라고 했다”고 당시를 전했다.

일어섰더니 눈앞에 나타난 골리앗 ‘대형마트’

한참 후 아내가 다시 들어와 문을 열어주며 도매일을 다시 시작하자고 했다. 그래도 그는 동양식품 48개 대리점 중 1위를 기록했던 장사꾼이었다.

아내가 다시 도매유통을 시작하자는 말에 조 회장은 지금껏 장사하면서 기록해온 매출기록장부와 거래처 기록 장부를 들고 동양식품 본사를 찾아갔다. 그는 사장 앞에서 “대리점 그만 두려고 왔다. 회사에 줄 돈이 1250만원이고, 제가 받을 수 있는 돈이 2000만원이니 이 장부를 가지고 가면 동양식품은 손해 볼 것 없다”고 했다.

이에 동양식품 사장도 마음이 동했는지 오히려 조 사장에게 도움 줄 수 있는 방법을 달라면서, 8톤 트럭 두 대 분량에 해당하는 500만원 어치의 물건을 실어 인천으로 다시 올려 보냈다. 그는 목발을 짚은 채로 다시 영업에 나서 4개월 만에 다시 매출 1위에 오른다.

그렇게 나름대로 80년대 후반 호황기를 보냈다. 그가 고용하는 직원들도 6명으로 늘었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90년대 초반 가계수표가 성행했다. 당연히 나중에 갚아야 함에도 불구, 그는 가계수표를 발행해 남을 빌려줬다. 그게 쌓여 고스란히 그의 부채가 되고 말았다.

당시 도매유통에 종사했던 상인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97년 IMF 경제 불황 전까지도 가계수표를 최대 1억 5000만원까지 발행했다. 조 회장만 해도 월 매출이 92년만 해도 1억 5000만원서 1억 8000만원 할 때다.
그는 “경기가 좋으니 식품회사들이 물건을 외상으로 가져다주곤 했는데, 한 번에 물건 값을 많이 주면 물건을 더 줬다. 그러니 너도 나도 수표를 발행했다. 그리고 나 역시 가계수표에 대해 무지한 것도 사실”이라고 전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96년 유통시장이 개방되면 대형마트가 들어섰다. 부평에도 96년 처음으로 이마트가 들어섰다. 그 대형마트가 조 회장을 비롯한 도매유통 상인들을 잠식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그러나 애석하게도 도매유통 상인들은 잠식당하기 시작한다.

조 회장은 “우리가 물건을 납품해 자금을 회수할 때까지 보통 3개월이다. 시장, 슈퍼마켓 등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나니 결국 우리가 부도 맞게 됐다. 쓰러진 이가 한둘 아니다. 50여개 업체 중 5개만 살아남았다”며 “나만해도 갈산동에서 월 1500여만원, 산곡동에서만 약 20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그런데 대형마트 들어서니 그대로 주저앉았다. 순식간에 빚이 6억원 되더라. 정말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이젠 그 대형마트와 싸우고 있는 그는 “내 나이 이제 내일모레면 환갑이다. 이젠 세상살이도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장사하는 사람이 절대 과욕을 내서도 안 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을 잃어선 안 되는 것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사실 내 주변에 사람이 있어서 버텼다. 이젠 그 사람들과 상인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가고 싶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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