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수의 걷기여행③] 5.18 광주민주화운동 역사기행

올해는 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이 되는 해다. 전두환 등 군부가 정권탈취 야욕의 희생양으로 삼기 위해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한지 벌써 30년이 흘렀다.

지난 5월 16일 일요일, 혼자 광주에 다녀왔다. 원래 ‘5.18 민주올레’에 참가하려고 했는데, 행사일이 17일 평일이어서 가능하지 않았다. 그래서 5.18기념재단에서 일하는 후배 시인에게 연락했더니 5.18민중항쟁 30주년 기념 행사위원회에서 주관하는 5.18역사기행이 있다고 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기행 예약을 하고 광주행 고속버스 첫차를 예매하고 나니 그동안 광주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내 기억속의 광주는 어디서 멈춰 있는 걸까? 89년인가, 학교에서 쫓겨나(=전교조 활동으로 해직) 전남대와 망월동과 무등산을 가본 게 마지막인가? 아닌가?

인터넷을 뒤졌다. 옛 전남도청이 아시아 문화의 전당으로 바뀌는구나. 옛 도청 별관 철거 문제로 시끄러웠구나. 벌써 10여 년 전에 5.18묘지가 국가보훈처에서 관리하는 국립묘지가 되었구나. 전남도청은 무안으로 이사 갔고, 아 그래 광주에도 지하철이 생겼지.

80년 광주 5월의 상징 ‘도청’

▲ 5.18항쟁 때 도청 앞 분수대에 모인 광주시민들.
일요일 새벽 6시 광주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4시간쯤 걸린다고 했는데, 중간 정안휴게소에서 한 번 쉬었는데도 9시 30분에 도착했다. 10시부터 시작하는 역사기행에 늦지 않기 위해 택시를 탔다. 마음 좋게 생긴 50대의 기사님이다. 그 또래 대부분의 광주시민 중 광주항쟁에 연루되지 않은 분이 없겠지만, 기사님 역시 시민군 출신이란다.

올해부터 광주시민의 날도 5월 18일로 바뀌었단다. 점심은 나주곰탕이나 추어탕을 먹으란다. 기사님은 하나라도 더 얘기해주려고 했지만, 시간이 너무 짧아 아쉬웠다. 계엄군에 맞서 싸운 길 위에서 종일 택시를 운행하는 그 분에게 5.18은 30년 전의 과거가 아니라 엄연한 현재인 셈이다.

옛 도청 앞은 5.18 행사 준비와 ‘아시아 문화의 전당’을 짓기 위한 터파기 공사 등으로 약간 어수선했다. 역사기행을 개인적으로 신청한 사람은 나밖에 없어서 전남대병원노동조합 조합원들 틈에 불청객으로 끼었다. 혼자 하는 여행은 언제나 뜻하지 않은 상황과 뜻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옛 도청 민원실에 마련된 곳에 가서 5.18 광주 영상을 보고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도청 안으로 들어가 복도를 보니 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산화한 윤상원 열사 등이 떠오른다. 1층에서는 시민군 현장체험전과 오월 판화체험전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도청에는 광주시민들의 결사항전에 쫓겨 5월 21일 오후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할 때까지 공수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래서 항쟁 초기에 도청은 군부독재에 대한 시민들의 항의와 분노를 표출하는 표적이었다.

공수부대가 철수한 후 민중항쟁본부가 들어섰고, 27일 새벽 계엄군의 진압에 맞서 최후의 항전을 벌이다 윤상원 열사를 비롯한 14명의 시민군이 유명을 달리했다. 그러니까 도청은 항쟁이 처음 시작된 전남대 정문과 더불어 80년 광주 5월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도청 밖으로 나와 주먹밥 체험행사장에 가서 주먹밥을 얻어먹었다. 5.18 때 시민군들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온 주먹밥을 먹고 싸웠다.

도청 앞 분수대는 30주년 행사 준비로 분주하다. 이곳은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적 장소다. 5.18 당시 광주시민들이 이곳 분수대를 연단으로 해서 각종 집회를 열어 항쟁의지를 불태웠다. 5월 18일 이전 3일 동안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민족ㆍ민주화대성회’를 열고 시국선언문을 발표한 곳이며, 5월 21일 계엄군 철수 이후 민주화투쟁 결의를 다지는 각종 궐기대회가 열렸던 곳이다. 지금은 5.18민주광장으로 부른다.

고문과 구타, 죽음의 기억 ‘상무대’

▲ 5.18항쟁 30주년 기념을 위해 도청 앞에 모인 사람들.
버스를 타고 5.18자유공원으로 가서 5.18구속부상자회에서 진행한 5.18민주화운동 30주년 영창 법정 체험행사에 참가했다.

원래 이곳은 상무대(=육군 전투병과 교육사령부)가 있었던 자리로 항쟁 당시에는 계엄사령부 전남북 계엄분소가 설치돼있었다. 상무대가 1990년대 전남 장성으로 이전하면서 집단 배상 차원에서 광주시에 무상 양여했다. 이곳에 5.18기념공원과 5.18자유공원 그리고 신도시를 조성하게 됐다. 상무대지구 택지개발을 하면서 현재 우미아파트와 어울림아파트 사이에 있던 당시의 영창과 군사법정 건물을 당국이 철거하려고 했으나, 5월 단체들의 투쟁으로 현재 자리로 옮겨 복원했다. 다행스런 일이다.

항쟁 뒤 시민 3000여명이 붙잡혀와 이곳 헌병대 영창에서 상상을 뛰어 넘는 무자비한 고문과 구타를 당했고, 군부는 이곳 군사법정에서 시민들에게 내란죄를 씌워 사형과 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했다. 30년 전 일인데도 당시를 설명하는 사람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하기야 직접 겪은 일이었고 몸과 마음 모두에 너무 큰 상흔이 각인돼있기 때문일 것이다.

날이 몹시 덥다. 올해에는 유난히 봄이 안 오더니 그냥 여름에 자리를 빼앗겨버렸다. 역사기행을 진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다. 이날 우리를 안내했던 문화해설사는 중학교에서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분이다. 광주에서는 이분들을 ‘5월지기’라고 부른다.

영령들의 안식처 ‘5.18묘지’

5.18국립묘지로 향했다. 1994년부터 묘지성역화 사업을 추진해 1997년 새로운 5.18묘지가 완성됐다. 망월동에 묻혔던 영령들은 치욕의 17년을 뒤로 하고 새 묘역으로 이장됐다. 편안히 눈을 감게 됐지만 요즘 돌아가는 꼴을 보면 마음이 그리 편하실 것 같지 않다.

분향을 마친 우리들을 먼저 윤상원 열사의 묘비 앞으로 안내했다. 윤상원 열사는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79년 광주의 들불야학에 일반사회를 가르치며 참여했고, 항쟁 때 ‘민주투쟁위원회’의 대변인과 광주시민의 눈과 귀와 입이었던 ‘투사회보’의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5월 27일 도청 본관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들불야학에서 함께 활동하다 1979년 겨울, 노동현장에서 먼저 숨진 동지 박기순과 영혼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만들어 불렀던 노래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정부는 30년이나 불러왔던 이 노래를 올해 30주년 기념식에서 갑자기 못 부르게 했다. 그 대신 뷔페에서 하는 칠순잔치에나 쓸 방아타령을 부르기로 했다고 해서 국민들의 비웃음을 샀다. 하기야 모 정당 대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 서울행사에 조화가 아닌 축하 화환을 보냈다. 제 정신이 아니다. 영령들께서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고 싶을 것 같다.

박관현 열사의 묘비 앞으로 갔다. 수배령을 피해 여수로 피신한 박관현 열사는 82년 4월 뒤늦게 체포됐다. 그는 광주교도소에서 40일간 단식투쟁을 벌이다 그해 10월 12일 전남대 병원에서 숨졌다. 30년 전의 일이라 점점 잊혀 가고 있는 5.18과 열사들, 그러나 더위를 무릅쓰고 땀을 뻘뻘 흘리며 묘비를 닦는 여중생에게서 미래의 희망을 본다.

구묘역으로 갔다. 이곳은 항쟁 당시 산화한 영령들이 묻혔던 곳으로 그동안 ‘망월동 묘지’라 불려왔다. 80년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민주 열사들도 이곳에 묻히면서 ‘민주 성지’로 불렸다. 1997년 국립 5·18 민주묘지가 완공돼 오월영령들이 이장되면서 현재는 민주 열사들만 남아 잠들어 있다.

당시 가족과 친지들은 항쟁 와중에서 공포와 분노에 떨며 처참하게 훼손된 주검을 손수레에 싣고 와 이곳에 묻었고,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거나 5월 27일 도청 함락 때 희생된 주검은 청소차에 실려와 묻혔다. 묘역 입구 땅바닥에 재미있는 비가 묻혀 있다. 28만원밖에 없다고 한 전두환이 대통령 시절 어느 동네에서 민박한 기념으로 만들어 놓은 비를 이곳에 가져다 깨뜨려 묻었다. 묘역을 오가는 사람이 그 비를 밟고 지나간다.

김남주 시인의 묘비가 눈에 띈다. 5.18을 처절하게 노래한 민족 시인이다.

‘오월 어느 날이었다 /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 밤 12시 /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놓은 심장이었다 / 밤 12시 /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 밤 12시 /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 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 밤 12시 /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먹고 / 밤 12시 /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 아 얼마나 끔직한 밤 12시였던가 / 아 얼마나 조직적인 학살의 밤 12시였던가 ’ - 김남주 ‘학살 2.’ 중에서

▲ 1980년 5월 21일 집 근처인 전남대 앞에서 계엄군의 총격으로 숨진 최미애 열사의 묘. 결혼사진이 영정사진이다.
5.18 때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간 열사 중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분이 있다. 최미애 열사. 1980년 5월 21일 집 근처인 전남대 앞에서 계엄군의 총격으로 숨졌다. 그분은 결혼사진이 영정사진이다. 결혼 2년째 신혼으로 만삭의 임신부였던 그의 죽음은 명백한 조준사격으로 확인됐으나, 가해자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딸네 집 근처에서 하숙집을 하고 있던 어머니 김현녀(당시 50)는 딸이 총에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순간 허물어지듯 쓰러지고 말았다. 딸의 주검에는 피가 흥건했고, 처참하게 깨진 두개골 사이에서는 뇌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뿐 아니었다. 벌써 차갑게 식어가고 있는 어미의 몸속에서 8개월 된 태아가 거센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한겨레신문> ‘5.18 30돌, 5월을 지켜온 여성들’ 중에서)

구묘역에는 이밖에도 강경대, 김철수, 이철규, 박승희, 이재호 열사 등이 잠들어 있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오는데 대학생들이 5.18 국립묘지 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시내부터 걸어왔다면 꽤나 먼 길인데. 30년 전의 5.18 민중항쟁을 잊지 않고 기억해준 대학생들이 고맙다.

저항의 거리, 민주항쟁의 거리 ‘금남로’

옛 도청 앞에서 내렸다. 망월동을 끝으로 역사기행은 마무리됐다. 문화해설사 선생님, 전남대병원노조 식구들과 헤어져 혼자 남았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그때까지 먹은 건 주먹밥 하나, 슬슬 배가 고파왔다. 호남에서는 사실 어느 식당에 들어가더라도 걱정이 안 된다. 그냥 길옆 눈에 띄는 식당에 들어갔는데 역시 내 생각대로다. 김치찌개를 먹는데 반찬이 열 가지도 넘는다. 밥을 배부르게 먹고 났는데도 계속 더 먹으란다. 사장님의 마음씨가 하도 따뜻해 하마터면 더 먹을 뻔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도청 앞으로 다시 갔더니 집회가 시작되고 있었다. 집회 구경은 오랜만이다. 그래도 믿을 건 학생밖에 없다.

집회를 구경하다가 인천에서 내려온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이하 건치)’ 사람들을 만났다. 건치 사람들과 도청 오른쪽 상무관으로 갔다. 이곳은 원래 경찰들의 체력 단련 장소였는데 5.18항쟁 당시에는 희생자들의 주검을 임시 안치했던 곳이다. 집단 발포와 무자비한 진압에 희생된 주검이 안치되자 시민들은 다시 한 번 계엄군의 행위에 분노했다.

YMCA를 지나서 행사 때문에 차량이 통제된 금남로를 걸었다. 광주 YMCA는 5.18 항쟁 당시 항쟁지도부가 자주 옥내집회를 열었던 곳이고, 항쟁 이후에도 광주항쟁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수많은 집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반독재, 반유신운동의 거점이었다.

금남로는 시민들이 계엄군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했던 항쟁의 거리다. 5월 18일 가톨릭센터 앞에서 최초의 학생 연좌시위가 있었고, 5월 19일부터 수많은 시민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어 투쟁 의지를 불태웠다. 5월 20일 저녁에는 택시를 중심으로 100대 이상의 각종 차량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이 거리를 누볐다. 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 전까지 30여만 광주시민이 매일 운집, 군사독재 저지와 민주화를 촉구했던 거리다.

건치 사람들과 함께 광주역으로 갔다. 이곳은 민중항쟁 당시 광주시민과 계엄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21일 아침 이곳에서 주검 두 구가 발견됐고, 이들 주검이 전남도청 앞 광장으로 옮겨지자 소식을 들은 시민 수십만 명이 항쟁에 적극 동참하게 된 계기가 됐다.

민주화의 성지, 광주의 중심대학 ‘전남대’

▲ 전국 각지에서 5.18항쟁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금남로에 모인 사람들.
광주역에서 기차를 타고 올라가기로 한 건치 사람들과 헤어져 혼자 전남대로 갔다. 전남대 정문은 바로 5.18이 시작된 곳이다. 1980년 5월 17일 자정 불법적인 비상계엄 전국 확대에 따라 전남대에 진주한 계엄군은 도서관 등에서 밤을 새워 공부하던 학생들을 무조건 구타하고 불법 구금했다. 18일 오전 10시경, 교문 앞에 모여든 학생들이 학교 출입을 막는 계엄군에게 항의하면서 최초의 충돌이 있었고, 학생들은 광주역과 금남로로 진출해 항의시위를 벌였다.

이렇게 시작된 5.18은 5월 19일부터 시민들이 합세했고, 5월 20일에는 도시빈민, 노동자 등이 참여했다. 5월 21일에는 시가전에 돌입했고 농민들도 참여했다. 계엄군이 발포를 시작해 54명이 숨지고 500여명이 다쳤다. 이 사건은 광주시민들이 무장 항쟁을 시작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22일 오전 시민군들은 총공세로 광주를 장악했고 27일 새벽 계엄군에 진압당하면서 10일간의 막을 내렸다.

20여년 만에 다시 와보는 전남대학교. 평화롭게 풀밭과 운동장에서 시민들이 휴일 낮을 즐기고 있다. 항쟁 당시 계엄군은 시내에서 끌고 온 시민들을 이 학교 종합운동장과 이학부 건물에 수용했다. 집단 구타하는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했고, 학교 안에 매장됐던 주검이 나중에 발굴됐다. 당시 정문 앞에는 용봉천이 흐르고 그 위에 다리가 놓여 있었으나 지금은 복개됐다. 교문의 모양도 바뀌었다.

광주에 오기 전에 5.18기념재단이 발간한 ‘그때 그 자리 그 사람들’이라는 민중항쟁 사적지 답사기를 읽었다. 책에 박관현 열사 기념비가 있다고 해서 열심히 찾았다. 학생들에게 물어봐도 잘 모르는 눈치. 한참을 헤맸는데 알고 보니 학교를 거꾸로 돌았다. 법대 올라가는 정문 왼쪽에 있었다. 박관현 열사는 전남대 법대 출신이다. 사회과학대 건물 앞에서 윤상원 열사상도 찾았다. 역시 민주화의 성지 광주의 중심대학답다.

한낱 목련이 진들

잔디밭에 잠시 쉬면서 가족들이 배드민턴 치는 것을 바라봤다. 80년 5월에는 광주시민 그 누구에게도 저런 평화가 허락되지 않았다.

수백 명 광주시민들의 목숨을 제물삼아 정권을 탈취한 자는 단죄 받지 않고 참으로 뻔뻔하게 아직도 국가의 원로노릇을 하고 있다. 광주5.18은 어쩌면 아직 미완이다. 누가 최초 발포 명령을 했는지, 몇 명이나 죽고 다쳤는지, 행방불명자는 어디 있는지, 미국의 역할은 무엇인지, 제대로 밝혀진 게 없다. 정부가 30년 동안 공식적으로 인정한 5.18 행불자만도 모두 76명이다.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런저런 상념 속에 벌써 4시가 넘었다. 이제 천천히 광주를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무등산도 오르고 싶었고, 못 본 사적지도 많았다. 상인들 모두 한마음으로 대동정신을 앞장서 발휘하며 주먹밥ㆍ생필품ㆍ떡ㆍ음료수ㆍ약품 등을 모아 시민군을 지원했던 양동시장과 대인시장도 못 가봤다.

22일 당시 주임신부를 비롯해 광주의 유력한 민주인사 12명이 모여 시민들의 희생을 막기 위한 수습대책을 논의한 남동성당, 항쟁 기간 중 광천동 ‘들불야학’에서 활동하던 강학들과 노동자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그들이 발행했던 ‘투사회보’를 광주시내에 살포, 광주민중항쟁 소식을 시시각각 시민들에게 알렸던 녹두서점터, 23일경 승객 18명을 실은 미니버스에 무차별 사격을 가해 승객 가운데 단 1명만이 살아남았던 주남마을 양민학살지, 계엄군이 비무장 시민을 향해 최초로 발포를 했던 광주고등학교 앞 등은 다음 기행으로 미룰 수밖에.

아침에 내렸던 광주버스터미널에 다시 도착했다. 버스 시간이 남아 광장에 앉아 인천행 고속버스를 기다렸다. 80년에서 꼭 한 세대, 30년이 흐른 지금 2010년, 광주는 무엇인가, 광주정신은 무엇인가. 이 거꾸로 가는 역사 속에서 2010년 5월, 광주정신을 실천하는 길은 무엇인가? 이 시를 쓴 시인이 중학교 3학년 학생이어서 사람들이 몹시 놀랐던, 광주를 노래한 시중 가장 많이 알려진, 슬프고도 아름다운 시, ‘목련이 진들’을 광주버스터미널 광장에 앉아 다시 꺼내 읽었다.

“목련이 지는 것을 슬퍼하지 말자 / 피었다 지는 것이 목련뿐이랴 / 기쁨으로 피어나 눈물로 지는 것이 / 어디 목련뿐이랴 / 우리네 오월에는 목련보다 / 더 희고 정갈한 순백의 영혼들이 / 꽃잎처럼 떨어졌던 것을 // 해마다 오월은 다시 오고 / 겨우내 얼어붙었던 이 땅에 봄이 오면 / 소리 없이 스러졌던 영혼들이 / 흰 빛 꽃잎이 되어 / 우리네 가슴 속에 또 하나의 / 목련을 피우는 것을 / 그것은 / 기쁨처럼 환한 아침을 열던 / 설렘의 꽃이 아니요 / 오월의 슬픈 함성으로 / 한닢 한닢 떨어져 / 우리들의 가슴에 아픔으로 피어나는 / 순결한 꽃인 것을 // 눈부신 흰 빛으로 다시 피어 / 살아있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 마냥 푸른 하늘도 눈물짓는 우리들 오월의 꽃이 / 아직도 애처로운 눈빛을 하는데 / 한낱 목련이 진들 / 무에 그리 슬프랴”(박용주 ‘목련이 진들’ 전문)
▲ 신현수 시인·부평고등학교 교사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