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신뢰성 붕괴

말의 신뢰성이 지금처럼 붕괴된 시절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의 근현대사가 질곡의 역사였던 점 을 돌이킨다면 언어가 시대를 담는 그릇일 진대 그 굴곡이 어떠했을까? 일제 강점기 의 매국노들이 대한민국 건국사를 통해 애 국자로 둔갑하면서 이미 민족사적 관점에 서는 애국과 매국이 한 몸으로 살아가는 언어의 모순을 잉태하게 된다.

특히 먹물 든 자들의 천연덕스러움과 억 지는 20세기 나라 잃고, 반쪽 난 민족의 멍 든 가슴과 조각난 사고영역의 틈새에서 오 히려 활개를 쳤다. 이런 이율배반의 개념 잡종은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 21세기 대한 민국에서는 어떤 논리적 모순도 현실에 존 재한다는 억지가 통하게 되었다. 우리는 권 력이 만드는 기만적 개념과 논리에 길들여 온 것이다.

이미 조지오웰은 소설 ‘1984’에서 권력 의 언어 통제와 그것을 통한 자발적 사고통 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한 바 있다. 그 중 백미는 ‘이중사고’라는 말이다. 이 말 자 체는 의식에 대한 현실 통제라는 용어이지 만 이것이 갖는 부정적 의미를 탈색시키고 자 만든 용어다.

우리를 무감, 무책임하게 만드는 독이 든 사과

우리 현실에도 이와 같은 일은 비일비재 하다. 이를테면 구조조정이라는 말이 그러 하다. 이 그럴듯한 공학적인 용어가 처음 등장했을 때 범접하기 어려운 학술성과 고 도의 경영전략의 외피를 뒤집어 쓴 언어에 시민들은 무방비하게 공략 당했다. IMF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용어는 시민 들의 의식을 장악하고 있는데, 그 본질은 ‘누군가’를 ‘퇴출’시키는 ‘살상용’ 단어임이 명확해졌다.

그러나 정체가 명백해지는 단어는 그에 따른 저항을 수반할 것이다. 보다 혹독한 것은 유동적 기만책이다. ‘언제나 진실보다 한 걸음 앞서가는’ 무한한 거짓말들이야 말 로 우리를 거짓 속에서 무감, 무책임하게 만드는 독이 든 사과인 것이다.

최근 세종시를 둘러싼 대통령의 변명이 나, 언론관계법(=미디어법)과 관련된 대 법원의 판결은 대한민국의 최고 지도부 들이 자국민을 상대로 벌이는 거대한 ‘논리의 사기극’이다.

선거 전후를 통해 자신의 논리와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할 수 있는 대통령이 과연 어떤 약속을 지키겠는가? 게다가 법의 마 지막 보루라 했던 대법관들이 국회에서의 대리투표 사건을 ‘위법이지만 유효하다’는 판결을 내리기 에 이르렀다. 법정신은 고사하고, 법적 논 리마저 포기한 이 한심한 법관들의 작태는 유감을 넘어 무감의 지경에 빠지게 한다.

정치적 외면은 거짓말이 살아가 는 최적의 토양

이들은, 우리말이 마치 사상과 논리를 담 는 그릇이 아니라 그저 의성어나 담아내는 녹음기 정도로 보이는 모양이다.

그러나 항상 유감스러운 것은 이들 권력 자들의 천박한 처신이 아니다. 오히려 이 런 명백한 거짓말을 보고도 이것을 의식하 지 않는 시민들의 능력이야말로 우리가 경 계해야 할 진정한 내면의 적이다. 시민들의 정치적 외면이야말로 거짓말과 논리의 모 순이 살아가는 최적의 토양인 것이다.

언어와 현실의 분열은 곧 계급·계층의 분 열, 나아가서는 자아의 분열을 유도한다. 이것을 용납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시민사 회와 자신을 학대하는 정신적 기반을 허락 하는 것이며, 말이 갖는 진실과 화합의 기 운을 폐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누더기가 된 언어는 우리의 정신을 무력화시키고, 우리 의 정치적 의욕조차 경멸하게 만든다.

오늘도 정치권이나 언론에서 터져 나오 는 언어의 비루함이 하루를 채우지만 여전 히 진실은 거짓의 뒤에서 안타깝게 발을 구른다. 온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화해와 진실의 언어가 우리와 함께 하기가 이토록이나 힘 겨운 것이다.

진실이 고통을 수반하지 않고, 투쟁을 통하지 않고 역사 속에 기록된 적이 없음 을 모르지 않으나, 오늘도 어지러운 뉴스를 펼치는 나의 손끝은 무겁고, 마음은 어둡 기만 하다.

▲ 인태연 <부평신문> 편집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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